소설리스트

마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3화 (3/87)

〈 3화 〉 사이비를 만났다

* * *

아마도.

삼만 구천 팔백 원의 식량이 담긴 비닐봉지는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그러나 발걸음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제대로 걸어 보려 하지만, 비틀비틀 흔들리는 발걸음.

그저 길을 되돌아갈 뿐인데 어째서인지 다른 길을 걷는 기분.

진창에 푹푹 빠지는 듯했다.

‘……이게 삶의 무게?’

시밤바.

새삼 부모님이 존경스러워진다.

직접 내 밥벌이를 궁리하는 것이 이리도 막막한 일일 줄이야.

어느샌가 자취 경력 2년.

이 정도면 건방질 만하지 않나 싶었는데, 정말 그냥 건방질 뿐이었다.

“……알바 해야겠지?”

아니…….

원래 전혀 할 생각 없었는데 말이지.

노벨피아 유

[ 잔액 : 45, 330원 ]

기분이 서글픈 것을 넘어서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지갑사정을 떠올리면, 이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알바는 불가피했다.

내가 고를 수 있는 건 어느 직장에서 일할지 뿐이다.

다만, 집으로 쫄래쫄래 달려가 알아봐봤자 여전히 문제는 산적해 있었다.

알바를 해봤자 봉급이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릴 텐데, 도무지 내 수중에 있는 사만 원만으로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래.

내겐 급전이 필요했다.

아주 절실하게.

나는 미간을 짚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오늘은 3월 31일 수요일.

지금 비닐봉지에 든 식량으로 토요일까지 버티고, 당일 발표되는 로또에 전 재산을 풀배팅.

그 당첨금으로 생계를 꾸려보는 건 어떨까.

“……기각.”

내가 아무리 화끈한 편이라 해도 로또에 삶을 바칠 정도로 완전히 미치진 않았다.

그렇다면, 로또 말고 다른 수단이 필요했다.

급전을 많이 얻을 수 있는.

단기 알바……?

‘……흐음, 호빠?’

갑자기 떠올랐다.

그거 말고 상하차도 있었지만, 전에 해봤는데 더럽게 힘들더라.

그래서 그건 보류해두었다.

나름 불법적인 일은 하지 말자고 마음을 먹는 주의지만, 어느새 내 손은 얼굴을 더듬거리며 취직할 가능성을 가늠하고 있었다.

남자다운 얼굴.

훌륭한 기럭지.

온몸을 가득 채운, 울퉁불퉁한 근육.

그래도 나 정도면 괜찮지 않나.

그런 생각…, 아니 확신이 들었지만, 그냥 하지 않기로 했다.

혹시 미래에 만날 여친이 그런 전적이 있는 나를 싫어할지도 모르니까.

예전에 정해두었다.

아주 예쁜 첫사랑을 자연스럽게 만나 결혼하던가.

그게 아니라면, 그냥 서른 살까지 동정을 유지한 다음에 대마법사가 돼버리겠다고.

자만추로 초절정 미인과 플라토닉 러브 후 결혼에 골인하지 못하다면 차라리 호트와그를 가버리겠다고.

“……그러면 역시 상하차밖에 없나?”

결국 그것으로 귀결되는가.

분명 상하차를 해서 돈을 갚아야 하는 건 친구 새기인데 어째서 내가 하게 된 거지?

전부 그새기 때문이다.

시밤바 새기.

그렇게 온갖 욕지거리를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중.

터억─!

누군가 앞에서 길을 막아섰다.

한창 생계의 무계를 느끼며, 아스팔트 길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야 했다.

어떤 새기지.

불량배 새기인가.

설마 나 삥뜯으려고?

어떤 씹새가 한때 쌍문동 거인이라 불렸던 내게 덤벼 오는 거지?

건방지구나 네 녀서어어어어억!!!!

바로 파이어 펀치로 작살내주겠어.

그동안 억눌러왔던 분노를 해방할 때인가.

나는 내심 기대한 채 상대의 정체를 확인했다.

슬그머니 전신을 훑었다.

선글라스.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교복 차림. 찬란한 금발 생머리와 아이처럼 뽀얀 피부. 우월한 기럭지. 바보 같은 선글라스로 가려도 숨길 수 없는 미인형의 얼굴까지.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봐도 가녀린 여학생.

나를 쥐어패거나 삥뜯을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순간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불량학생인가도 싶었지만, 뭔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보면 혼혈이라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안 되겠지?’

차라리 불량배였다면!

그저 미성년자만 아니었다면!

세상의 잔혹함을 깨닫게 해줄 파이어 펀치를 아구창에 박아줬을 텐데.

그러나 세상의 노예가 될 미성년자는 지켜줘야 할 대상이었기에 죽여서는 안 됐다.

쉬이이이익──! 슬쩍 준비해놨던 파이어 펀치를 해제했다.

여기까지가 그녀와 조우한 지 단 0.85초 만에 이뤄진 사고(??)였다.

나는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여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얘야, 무슨 일이니?”

이렇게 말하니 왠지 유괴범 아저씨가 된 듯한 기분. 분명 내가 친절한 인상이라 앞을 막아선 것일 테지만, 혹시라도. 뒤늦게라도 겁먹지 않게 친절한 미소를 유지했다.

“안녕하세요.”

그렇게 마주 인사하며, 여학생은 스르르륵─ 선글라스를 벗었다.

교복과 어울리지도 않는데 도대체 왜 낀 것인지 의문인 그것을 치워 버리니 드디어 그녀의 눈이 보인다.

적안(赤?). 붉은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빛을 발했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서클렌즈인가?

그녀의 컨셉에 슬슬 의문이 들 무렵, 사락, 여학생이 손을 내밀었다.

뭐지.

악수하자고?

프리 허그의 아류.

무슨 프리 악수 캠페인이라도 되는 건가?

아니면 수행평가?

그런데 악수가 영어로 뭐였더라?

“어, 그래.”

여하튼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으려 마주 손을 내밀었다.

그야 상대가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까.

그래, 나는 백수 대학생 주제에 무심코 미성년자 여학생의 손을 붙잡으려 한 것이다.

‘이건 안 된다아아아아아아아!!!!!!!!’

뎅뎅뎅뎅─!

직감이 아주 요란하게 경종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나는 떠올렸다.

섣불리 울타리를 넘다가 뒤져버린 수많은 남정네를.

그리고, 그녀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온갖 위험요소를 떠올려버린 것이다.

미성년자.

아청법.

신체접촉.

성추행.

강제.

납치.

아동성범죄자.

철컹철컹.

전자발찌라는 저어급 악세사리까지.

“오우쉣.”

아주 예전, 초등학교 시절에 짰던 인생 계획표에는 교도소 엔딩 따위 없었다.

나는 죽어도 성범죄자가 될 생각이 없었다.

절대! 네버!

샤샤샤샥!

나는 재빨리 손을 되돌렸다.

그리고, 이런 잔악한 암수를 던진 금발 적안의 여학생을 노려보았다.

네 녀석! 도대체 무슨 속셈이길래 이런 악독한 짓거리를 하는 게냐!!

그보다 상대가 먼저 손을 내밀어도 “악수 멈춰!”라고 말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라니.

이 무슨 지옥도란 말인가!

조선이 문제인가.

아니면 세상 전체가 무서운 곳인가.

닭이냐, 달걀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

여학생은 내가 악수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품으로 되돌렸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 무언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흠흠, 목을 가다듬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도(??)를 아십니까?”

“……뭐?”

“당신을 마법의 세계로 인도하겠습니다. 자, 제 손을 잡으시죠.”

그런 바보 같은 대사와 함께 다시금 내뻗어진 손.

어안이 벙벙하다.

이 어쩜 신선한 영업 멘트란 말인가.

아니, 도대체 어디의?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나?

나는 미간을 짚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요즘 고등학교는 무차별적으로 행인에게 이런 대사를 뱉도록 교육시키는 걸까.

아니면, 생활과 윤리 시간의 자신감 기르기 수업이라도 되나?

‘……설마 사이비?’

라는 아주 일리있는 생각이 떠올랐을 때, 나는 이미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확실히 평일 대낮에 선글라스를 쓰고 싸돌아 다니는 금발 적안 여학생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

아니, 이렇게 늘여놓으니까 진짜로 이상한 광년이네 그려.

아무튼, 상대는 미성년자.

궁극의 기술, 파이어 펀치를 봉인되어 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

나는 최적의 도주 경로를 통해 후퇴를 실행할 계획을 진행시켰…

‘……잠깐만. 그녀는 어째서 사이비가 된 거지?’

굉장히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고 속. 나는 문득 그런 의문을 가졌다. 정말 쓸데없는 의문. 그러나 생각해보니 그러하다. 허우대는 멀쩡한 녀석이 어째서 저 어린 나이에 사이비로 활동하게 된 걸까. 분명 내가 쟤 아빠였다면 무어라 했을 텐…

어? 설마 아빠가 없어?

아니, 엄마도?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녀의 슬픈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린 나이.

부모님의 사망.

산더미처럼 쌓인 빚.

맏언니로서 어린 동생들을 책임져야 해.

하지만, 반지하.

배고픔.

벌레.

축축함.

몸에 찌든 무력함.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살아야 한다.

다단계.

사이비.

혹시 도를 아십니까?

그리고, 그녀는 나와 만나게 되었다.

새삼 그녀의 앳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 뒷면에 얼마나 많은 슬픔을 감추며 살아온 것일까. 어째서 그녀는 저 어린 나이에 그렇게 많은 역경을 겪어야 했던 것일까……!

그렇게 한번 시작된 망상은 멈출 줄을 모르고, 더욱 박차를 가한다.

~~~~~~~대충 슬픈 사연들~~~~~~~

“……이런, 씨발….”

또륵.

또르르륵─.

한 사나이의 뺨을 타고, 뜨거운 공감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생을 살면서 울 기회 중 한 번을 여기에 소비했지만, 후회 따윈 하지 않는다.

한 소녀 가장의 생존을 위한 발악.

그 쓰라린 과거의 기억을 훑어본 나는!

부랄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돈과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는 나는!

그 아픔을!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공감할 수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나는 울부짖으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교도소? 철컹철컹! 그딴 것을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오직 그녀의 슬픔을! 마음을 위로하기에도 바쁘다!

이젠 괜찮아.

내가 너의 친구가 되어줄게.

또, 도와줄게.

그리고 함께…,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눈물을 흘려줄게…….

* * *

‘……뭐지, 미친 사람인가?’

신혜영은 지금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분명 바보인 것이겠지.

그동안 덜렁대고 눈치가 없단 소리를 많이 들어봤어도 이걸 눈치 못챌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굉장히 안쓰럽게 바라보는 표정.

급기야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전혀 알지 못하는 과거를 위로하고 자빠졌다.

어라? 우리 부모님 언제 죽었어?

으응? 나 사이비였어?

아니, 내 어떤 점이 그렇게 보인 거야?!

신혜영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뭔가 피드백이 격렬하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몰라도 선배라는 인간들이 전통이랍시고 시킨 어딘가에 이상한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냥 이 남자가 이상한 사람이거나.

슬슬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니 일단 진정을 시켜야겠지.

신혜영은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어떻게든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부연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오해가 풀리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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