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6화 (6/87)

〈 6화 〉 이건 무협이 아니야!

* * *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다.

내일 TS를 당하거나 세상이 남녀역전세계가 되더라도 분명 무언가 원인이 있으니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있긴 있으니까 그렇게 되어버리는 거겠지.

비슷한 느낌으로 길거리에서 마법사를 만나 비밀결사에 들어가고 내 목숨이 임박한 상황을 맞이하는 일 정도야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닐까.

멍하니 벽에 기대어 잡생각을 해보았다.

신혜영이 무언가를 받아 오겠다며 자료실에 들어간 지 10분쯤 되는 시점이었다.

슬슬 배가 고프다는 생각까지 갔을 때, 끼익─ 신혜영이 두꺼운 서류철을 손에 들고 등장했다. 드디어 나왔구나, 혜영아! 원래도 반갑지만, 평소보다 더 반가운 그녀였다.

“그래서 받아야 한다는 게 그 서류야?”

“아, 네. 진우 씨가 할 만한 이벤트 목록을 추려 가지고 왔어요.”

“내가 따로 확인하는 게 아닌가 보네?”

“아뇨, 따로 확인할 수는 있는데 많이 혼잡해서. 시간도 없고 하니 제 임의로 골라왔어요.”

으음. 믿음직스러운 신혜영 마망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동료와 친우를 넘어 지도자 포지션까지 맡은 그녀를 나는 믿고 있다! 암 그렇고말고. 믿어야지!

우리는 그 목록을 확인하기에 앞서 마탑 바깥의 카페로 이동했다. 카페인이라도 보충하면서 일하자던가.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고져스하달까. 중세 귀부인들이 티타임을 갖던 카페가 이랬을 것 같았다.

‘……애초에 귀부인이 카페에서 티타임을 가졌던가?’

요즘 왜 이리 헷갈리는 게 많은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녹차라떼를 들이키는 순간 신혜영이 손짓했다. 그녀의 옆으로 잽싸게 다가갔다. 내가 옆에 착석하자마자 신혜영이 빠르게 서류를 넘기기 시작했다.

휘리리릭─

제대로 읽는 건지 마는 건지 의심이 갈 정도로 빠르게 넘어가는 종잇장.

순간 미혹심이 들어 옆얼굴을 힐끔 바라보니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열은 상인(?人). 등급은 녹(?). 참가자 간의 상해·약탈·활동 방해 금지. 쾌적하고 안전한 환경의 장소로 골랐어요.”

“예, 믿고 말고요. 선생님. 어리버버한 첫인상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믿음직스러우십니다!”

“그냥 죽으실래요?”

“선생님, 살려주십시오….”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던 내 눈에 모든 임무에 달린 ‘등급’이란 게 보였다.

방금 그녀가 녹(?)이라 말했던 등급이 내 상태창에도 달려 있었다.

헌터물에 나오는 S급, F급 그런 느낌이겠거니 하고 일단 넘겼다.

샤라라락­ 지금은 그녀가 집중한 듯하니 조금 있다가 물어보면 될 듯싶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진우 씨가 이걸 좋아할 것 같더라고요. 어떠세요?”

신혜영은 그리 말하며 서류의 한 부분을 펼쳐 내게 보여주었다.

무엇일까.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그것을 확인했다.

──────────────────

< 녹급 임무 : 무스닥 >

당신의 직관과 재력과 담력을 보이시오. 그렇다면 재물은 저절로 따라올 것입니다.

장소 : 안휘성 천주객잔

※참가자간의 상해·약탈·방해 행위를 금지합니다.

※수익률 100% 이상의 인원만이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 보상 : 의문의 무공 비급 ]

──────────────────

“무스닥? 이게 무슨 뜻이야?”

“원래 던전이나 이벤트나 다 두루뭉술한 이름이 많아요.”

“음, 그래도 지명에 보상을 보니 뭔가 무협지가 떠오르는데.”

“네, 맞아요. 무림, 진우 씨 마음에 드실 것 같아서 일부러 골라봤는데.”

신혜영은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기대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오버액션하는 나지만, 정작 그런 반응을 기대하는 모습을 보이니 쉽지 않다.

나는 어떤 미사여구를 붙일까 고민하다가 그저 엄지 하나만 치켜세웠다.

다행히 그것만으로 괜찮았는지 신혜영의 얼굴은 나름 뿌듯해보였다.

어쩌면 별 기대를 안 한 것일 수도 있고. 그건 그것대로 슬프네.

“그러면 이걸로 결정하신 거죠?”

“응, 왠지 이게 끌리네.”

“그러면 임무창을 열어서 [ 무스닥 ]으로 결정했다고 하세요.”

“네, 엄마.”

그 말에 신혜영의 미간이 왈칵 찌푸렸다. 붙임성이 좋아서 그렇지 저렇게 얼굴을 찌푸리니 금세 새침하달까. 학창 시절 일진 누님이 떠오르는 무서운 얼굴이 되어버린다. 나는 그것을 못 본 체하고 제자리로 돌아가 바로 외쳤다.

임무차아앙──!

삐릭─!

깜찍한 소리와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상태창보다 살짝 가로로 길쭉한 형태. 나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찌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 권한 내의 임무 : 164, 895개 ]

“……이거 어떻게 찾아야 해? 살려줘요, 혜영에몽.”

“[ 무스닥 ]을 검색해줘. 라고 하면 돼요.”

“무슨 빅스X냐.”

무려 홀로그램이 탑재된 시스템이니 음성인식 정도는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말한 대로 따라 하니 아까 서류로 본 것과 같은 임무 설명 창이 떴다.

대충 훑고는 수락 버튼을 눌렀다.

[ 임무 예정 시간까지 04 : 21 : 53 ]

그와 동시에 나타난 타이머.

아까 확인했던 시간이 7시 반 정도 됐으니 얼추 자정에 시작하는 게 맞는 듯했다.

나는 잠깐 그것을 바라보다가 신혜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걸로 땡? 이제 4시간동안 자유 시간이야? 드디어 쉴 수 있는 거야?”

신혜영은 조용히 눈을 감고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뒤, 착취당하는 오늘의 우리를 향해 묵념했다.

“……쉬는 게 쉽지 않은 일이구나.”

“모든 직장 생활이 다 그런 게 아닐까요?”

“네 말이 옳다.”

“그런데 남은 건 별거 아니에요. 혹시 모를 일을 위한 도핑 정도일까요?”

“도핑?”

그녀가 테이블 위로 파란 시약병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것과 신혜영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파란 시약병과 도핑이라…

“마약은 무리.”

“마약이 아니라 마력 물약이에요. 듣는 사람이 오해할라. 자자, 일단 들이켜보시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구요?”

흐흐흐흐, 음흉한 웃음을 흘리는 신혜영이 미심쩍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우리의 우정과 신뢰를 믿는다!!!

시약병을 잡았다. 코르크 마개를 잡아뜯어 그대로 들이켰다!

꿀꺽꿀꺽.

청량한 기운이 온몸에 깃들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띠링­! 하며 울리는, 어느새 익숙해진 시스템 알람.

[ ‘마력’이 24시간 동안 ‘15’ 상승합니다. ]

오우쉣. 이게 도핑?

나는 곧바로 상태창을 열었다.

──────────────────

< 이진우 >

[ 등급 : 녹(?) ]

[ 직업 : 거상(巨?) ]

[ 특성 : 금력(力) ]

[ 능력 : 매수(??), 매각(?) ]

[ 성향 : 중도(中?), 열혈(?血) ]

[ 근력 : 13 ] [ 체력 : 15 ]

[ 민첩 : 11 ] [ 지혜 : 22 ]

[ 마력 : 19(+15) ] [ 행운 : 73 ]

[ 소지금 : 100, 000, 000 Gold ]

──────────────────

“……오.”

“어때요? 현질의 힘이 느껴지시나요?”

“온몸에 왠지 모르게 힘이 넘치네. 이렇게 사람들이 마약에 빠지는 걸까? 근데 24시간 동안만이라는데 벌써 마셔도 돼?”

“이벤트는 길어봐야 한나절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게다가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라고요?”

짤랑─ 신혜영은 이번엔 주머니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짤랑? 그 소리를 듣자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주머니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500원짜리보다 곱절은 큰 금화가 무더기로 들어 있었다.

“……왓?”

“1억 골드. 이벤트는 대부분 동등한 조건으로 시작하지만, 가끔 돌발로 사비를 써야 할 때가 있는 것을 감안해 지원해드리는 거예요.”

“아, 참고로 시스템 재화라 마력 없는 사람한테는 안 보이니까 금은방에 가서 팔 생각은 마세요.”

느낌상 거금이었다.

분명 사비로 준 것은 아닐 테지만, 비록 게임머니 같은 것일 테지만.

일부러 턱을 괸 채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하는 신혜영을 보니 뭔가 벅찬 감정이 울컥울컥 밀려왔다.

일개 사원이 이 돈을 빼오려 얼마나 애썼을까!

얼마 전, 친구에게 돈을 떼먹혔던 나다.

앞으로 금전적인 부분에서 철저하게 살려 했는데!

마음이 흔들린다.

“크흑, 선생님. 제게 이렇게 잘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제 장기를 다 팔아먹어도 이 정도 금값은 안 나옵니다!”

“비전투 직군이지만, 상인(?人) 계열은 분명 필요한 직업이니까요. 그런 타산적인 부분이 있어서 드리는 거니까 너무 훌쩍거리지 마세요. 아, 막 쓰지도 말고요.”

“네, 선생님! 명심하겠습니다.”

“자, 이제 실질적인 준비는 다 끝났으니 마음의 준비를 할 때가 됐군요.”

끼이이익─ 벌떡 일어나는 신혜영을 따라 나도 함께 일어섰다.

선생님…… 볼을 붉힌 게 부끄러우셔서 피하려시는 건가?

아니면 정말 명상 수련이나 특별강의?

그렇게 긴가민가하고 있을 때,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녁으로 치킨 먹으러 갑시다! 이벤트에 들어가면 컨디션이 회복되니 괜한 숙면은 필요없다구요?”

“……선생님.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응, 싫어요.”

“참고로 저는 스노우가 좋습니다.”

“그건 참고할게요.”

그렇게 우리는 빈 연구실에서 3시간의 치맥을 즐기고, 이별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녀에게 귀동냥으로 많은 정보를 듣기도 했지만, 그만큼 거리감도 가까워진 시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뭉클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간절하게 말했다.

“단골 바 나도 데려가 줘. 나 찐따라서 한 번도 바 못 가봄.”

“만약에 일등 하고 오면 한턱낼게! 그러니까 제대로 하고 오기나 해!”

명확하게 새빨개진 얼굴과 들뜬 목소리.

맥주 4캔에 대취의 징조를 보이는 신혜영을 보니 과연 바에서 제대로 마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뭐 그건 그때 생각하면 되겠지.

나는 꼭 비싼 술을 얻어먹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 만약 일등 하면 말이야. 한 잔에 30만 원이라는……, 그 맥켈란, 그거! 그것도 한 병째 시켜도……?”

슈룽─!

“…….”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바뀌어버린 주변 풍경.

그런데 아직 확답 못 들었는데. 설마 술 깨고 발뺌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그래도 그녀를 안 지 하루도 안 됐지만, 말을 바꿀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일단 나는 맑아진 머리를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곳곳에 걸린 홍등(??).

로비와 천장이 뚫린 2층에 보이는 전통복장 차림의 사람들.

석재로 만들어진 기둥과 벽, 탁자까지.

내 상상 속 무림 객잔보다는 미묘하게 세련된 것이 기루에 가까운 느낌이다.

‘……음, 그럭저럭 괜찮은데?’

그렇게 두리번거리던 나는 문득 정면 천장에 달린 판자를 보게 되었다.

아니, 전광판을.

현대 지구에서 볼 법한 그 번쩍번쩍 빛나는 그 전광판.

“……어?”

──────────────────

【 무림맹 ─ 90,700 】

【 천마신교 ─ 85,800 】

【 제갈세가 ─ 12,700 】

【 남궁세가 ─ 46,500 】

──────────────────

언젠가 무협지에서 봤었던 이름들이 어째서인가 포물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왠지 모를 싸늘한 감각을 느끼는 것이었다.

“무스닥? 코스닥? 설마……?”

끼에에에에에에에엑!!!!

미르스틴!!!

미친 상황을 깨달은 나는 “이건 무협이 아니야!”라며 울부짖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