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블랙기업(Black Company)
* * *
끼이이익.
어둠과 침묵으로 잠긴 공간에 침입자를 알리는 경고음이 울려 퍼진다.
그러나 집주인은 그를 알아채지 못한다. 새근새근 깊은 잠에 취해 있는 상태.
그를 알아챈 침입자는 대범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오직 침대 위로만 눈길을 두고 거침없이 전진했다.
빛을 발하는 건 이따금 깜빡거리는 공유기의 불빛뿐이었지만, 곳곳에 발에 치일 장애물들이 산적해 있었지만, 침입자는 순조로이 고지에 다다랐다.
삐걱삐걱──.
제 주인이 누워 있는 침대에 한 사람이 더 올라타자 싸구려 스프링이 비명을 질렀다.
유한나는 그를 괘념치 않고, 위로 기어 올라갔다.
소꿉친구의 단단한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하아.”
유한나는 이진우의 얼굴을 아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진한 눈썹과 우수에 찬 눈, 우뚝 솟은 콧대에 앵두 같은 입술까지.
답지 않게 하이얀, 부드러운 피부도 좋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일일이 열거해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하나 없다.
어떻게 성격조차 미워할 수 없는 걸까.
“……그놈의 자만추가 뭐라고.”
하지만, 이 멋지고도 병신 같은 바보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신단다.
처음에는 농담인가 했지만, 정말로 진지하다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욕지거리를 했던가.
오랜 소꿉친구인 자신을 미래의 동반자는커녕 당장 연애 상대로도 보지 않으니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미친 새끼.”
그래서 그냥 이 바보한테서 마음을 돌리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게 이롭겠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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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끗힐끗.
그러다가 그녀는 언제나처럼 그를 흘기던 중 문득 깨달아버렸다.
항상 저 남자만 바라보려 하고, 그러고 싶어 하는 자신을.
앞으로 가슴 속의 불길이 사그라지지 않고, 점점 거세질 것이란 사실을.
그녀는 결심했다.
그래, 한 번 해보자.
미친놈을 얻기 위해 그래, 나도 한번 미쳐보자.
어떻게든 쟁취해내 보자고.
그렇게 그녀는 사랑에, 이진우에 미치게 되었다.
유한나의 손이 이진우의 등 아래를 슬그머니 파고들었다.
껴안았다.
가슴이 맞부딪혔다.
찌부러졌다.
쿵쿵쿵.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서로의 숨결이 만나 바스러졌다.
그녀는 애타는 눈빛으로 이진우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이러는 건 전부 너 때문이니까 네가 책임져…….”
유한나는 서로의 얼굴을 비비며, 그의 몸통을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만 꽉 껴안았다.
깨어있을 때는 이러지 못하니 지금이라도 이렇게 해야 했다.
정말 아쉽지만, 소꿉친구라 할지라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으니.
하지만, 머지않았어.
유한나는 언젠가 ‘친구’에서 탈피할 날을 고대했다.
곧 찾아올 날.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다고.
그런 다짐을 하며, 그녀는 뺨에 입을 맞추었다.
쌕쌕. 아주 태평하게 자는 그와 마찬가지로 눈을 감았다.
들려오는 숨소리를 자장가 삼고 지금 순간을 편안히 만끽했다.
앞으로의 고된 여정을 대비한 충전 시간.
무심코 말을 뱉었다.
“……사랑해.”
한동안 그렇게 되뇌며, 그를 껴안았다.
동이 텄다.
* * *
이전의 석촌 호수가 보이는 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즐기다가 마침내 결계로 감춰져 있는 비밀결사 마탑에 도착했다.
오늘도 굳건히 서 있는 칠흑의 마탑.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대로 내뱉고 싶었지만, 옆에 유한나가 있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비록 십년지기의 털털한 부랄친구지만, 지켜야 할 선이란 게 있었다.
성별이 달라서가 아니라 나는 원래부터 이런 대화를 못 하는 편이었다.
어딘가의 인싸들끼리는 섹드립을 난사한다고 하던데 그것이 나는 아니었다.
정말이지, 아쉽군.
여러모로…….
어느새 22년 찐따 기록을 경신 중인 내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 무렵,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나 간다? 일 잘하고, 다음에 보자.”
고개를 돌리니 뭔가 굉장히 가라앉은 표정의 유한나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방금까지 드라이브할 때만 해도 방긋방긋 웃고 있더니만, 갑자기 축 처진 분위기로 변해 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눈시울이 붉었다.
“너 우냐?”
“…응, 일하러 가는 거 싫어서. 일 안 하고 다달이 월급 받으면서 놀고 싶어.”
“그거 동감.”
비록 십억 정도는 하루, 아니지 이제 몇 시간만 투자하면 돈이 복사되더라도 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출근하고 싶어 환장해 직접 온 사람이 할 생각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러했다.
나는 얼마나 일을 하기 싫은 건지 계속 훌쩍거리는 유한나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야야, 너 칵테일 바라던가, 모던 바라던가. 그런 데 잘 알지?”
“응? 대충은?”
얘가 그런 걸 왜 묻지. 그런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한 의아한 표정.
그것을 보니 묘하게 기분이 뒤틀렸지만, 술이라고는 소맥 막걸리밖에 모르는 내 사정을 떠올리고 간절히 내뱉었다.
“그러면 나중에 일 끝났을 때, 같이 가자. 나는 그런 데 잘 몰라서. 대신 술은 내가 살 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까 우리 술 안 마신 지 좀 오래되지 않았……?”
와락. 유한나가 달려와 그대로 나를 껴안았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서 녀석의 등을 주먹으로 약하게 두들겼다.
생면부지의 마탑 마을 거주민들이 우리를 슬쩍슬쩍 바라보는데 굉장히 남사스러운 짓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뭐하니, 너? 좀 떨어져 줄래? 갑자기 왜 지랄이야.”
“입 좀 다물어봐. 얘가 웬일로 이런 소리를 하나 감동 중이니까.”
“……허어.”
어찌나 진득하게 달라붙었는지 떨어지지를 않는다.
떼어내기를 포기하고, 가만히 놔두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다.
겨우 떨어진 녀석은 여전히 붉은 눈시울로 코를 훌쩍거리며 이번에는 내 손을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반드시 같이 가자고. 만약 안 가면 반드시 죽여버릴 거라는 섬뜩한 예고.
어째서인지 진심이 느껴지는 그 말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반드시 같이 가겠다고 확언을 하며, 겨우 그녀를 진정시켰다.
“진짜지? 진짜로 같이 갈 거지?”
“응, 진짜로 같이 갈 거니까 제발 일 좀 하러 가. 미친놈아.”
제 차량까지 몇 미터도 안 되면서 올라타지를 못하는, 자꾸 뒤돌아보며 되묻는 유한나를 어찌어찌 보내고, 간신히 마탑 건물에 도착했다.
나는 로비에서 덩그러니 서서 문득 흐르는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이 땀줄기 뭐야…….”
분명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쌀쌀했는데 왜 이리 더운지 모르겠다.
몇십 분 걸어온 것이 힘들었다기보단 괜한 생고생을 와서 그럴 것이다.
아니, 그렇게 바를 좋아하는지 알았다면, 진작 가자고 했을 텐데.
그땐 돈이 없어서 불가능했으려나?
그런 잡생각을 하면서 안내역을 기다리던 도중이었다.
콰아아아앙──! 굉음이 귀청을 울리는 것과 동시에 건물이 크게 흔들렸다.
시발? 나는 예상치 못한 거센 진동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로비 중간의 기둥을 짚고 겨우 균형을 되찾았다.
“……뭐야, 시발. 테러?”
비행기가 날아와 건물에 때려 박혔다고 해도 믿을 만한 소음과 진동.
이곳에서 얼른 튀어 나가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
“…….”
“…….”
로비의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얼굴을 와락 찌푸리거나 피식 웃음을 흘릴 뿐 그다지 놀란 기색은 보이지 않고, 각자 제 갈 길을 간다.
뭔가 나만 유난스러운 기분.
방금 소음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냥 별 대응 안 해도 되는 걸까. 이걸 도대체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지? 지나가는 사람들? 아니면 카운터의 아가씨?
그렇게 약간의 소외감과 혼란을 느끼고 있는 내 어깨를 누군가 턱 하고 짚었다.
나는 개쫄보마냥 깜짝 놀라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붉은 머리에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가 보였다.
무테안경에 피로에 찌든 얼굴.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많은데도 태연하게 담배를 태우던 그녀는 굉장히 기운 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올라갑시다.”
그녀는 그리 말한 뒤 곧바로 옆에 있는 승강기에 올라탔다.
나는 성의 없는 인사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지만, 일단 올라탔다.
그렇게 무지성으로 뒤따라 사무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녀의 이름이 ‘이리엔’이고, 내 상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게 될까.
간단한 마법을 배우거나 또다시 다른 세계로 날아가게 되려나?
나는 약간의 기대를 품은 채 병아리가 어미 닭을 바라보듯 그녀를 바라보며 지시를 기다렸다.
이리엔은 제 키만한 서류더미를 들고 오더니 내 책상이라 안내받은 곳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이게 뭐지?’
나는 그것들과 내 상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붉은 머리의 악마는 여전히 기운 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일입니다. 잘 부탁해요.”
“……에?”
그리고는 어떤 안내도 없이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여기, 블랙기업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