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재회(?會)
* * *
세상 일이 기대대로 흘러가리라 바라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다.
역경 끝에 빛이 오리라 믿는 것도 헛된 꿈에 불과했다.
“시발.”
그래. 나는 헛된 꿈을 꾸었다.
겨우 담당 업무가 바뀌었다고 업무 환경과 워라밸이 개선되리라 기대했던 내가 병신이었다.
[ 소지금 : 10, 743, 488, 000 Gold ]
“…….”
백억을 받았다.
‘골드’라는 현실성 없는 단위가 뒤에 붙어져 있어 확 와닿지는 않았으나 이것은 한화로 1조의 가치를 두고 있다 했다.
그래서 그런 거금을 얻어 기쁘냐고? 아니, 시발. 내 돈도 아닌데 도대체 왜 기뻐. 신용을 받는다는 생각에 뿌듯하지도 않았다. 그야 어떤 회사건 제정신이라면 일개 사원에게 일조 원을 맡길 리가 없었으니까.
“자, 이거 차요.”
노벨피아 유
“……예?”
나는 이리엔에게 목걸이를 건네받고는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디자인이 제법 예쁜 것이 패션 용품으로도 잘 어울릴 법한, 이런 걸 초커라고 하던가?
아니, 잠깐만.
그런데 이걸 갑자기 왜 주지?
나는 극심한 불안감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의 악마는 웬일로 멋쩍은 말투로 말했다.
“그, 너라면 솔직히 말해도 괜찮겠지. 그거 사실 도주 방지용 폭탄 목걸…,”
시발.
망할 놈의 블랙 기업.
다 뒤져라.
‘한때 꿈을 꿨습니다. 비밀결사에 들어가 세계평화에 이바지한다는 꿈이요.’
그러나 이건 무슨 개꼴인가 하는 생각에 나는 폭탄 목걸이를 차되 조건을 걸었다.
시발. 만약 오작동이건 배신이건 이 목걸이가 터지면, 이리엔 너도 같이 뒤지는 걸로.
이리엔은 잠시 고민하더니 승낙했다.
그 약속은 [ 거래 ] 능력으로 하여금 체결되었다.
일명, ‘마나의 맹세’.
아무튼, 그런 우여곡절 끝에 나는 폭탄 목걸이를 차고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하게 된 일은 이지적인 판단으로 투자를 하는 것도, 그냥 무지성으로 매수·매도 노가다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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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눈알】
【현자의 돌】
【미스릴 주괴】
【아다만티움 주괴】
【천상비단】
【세계수의 가지】
【불꽃 마녀의 왼팔】
【해주의 부적】
【드래곤의 이빨】
【드래곤의 비늘】
【최상급 마력석】
【유희 생활】
【불사조의 깃털】
【미르가르드 나무 수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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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릴·아다만티움 주괴, 최상급 마력석 각각 100개씩 구매해줘.”
“네.”
자판기…….
그래도 서류 작업만 하다가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기분을 환기시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재력이 있다고! 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주우우우우 잠깐 우월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이번에는 연금팀에서 만든 중상급 마력 물약들 좀 팔아주고. 그래. 마진은 네가 전부 가져도 돼.”
“……예.”
매수와 매각 능력이 시스템 상점에서도 발휘된다는 것은 내게 충족감을 주기도 했다. 그 전의 것은 정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노가다에 불과했으니까.
“물.”
“……?”
이따금 살인 충동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성취감을 느끼는 측면에서는 그 전보다 확연히 나았다.
[ 16 : 40 ]
나는 시계를 보았다. 내가 언제 출근을 했었는지 가늠했다.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하나…, 둘…, 셋…, 사흘 전인 화요일을 기점으로 퇴근을 못 하고 있다.
그래. 나는 퇴근을 못 하고 있다.
분명 내 워라밸을 저울에 달아 측정하면, 한쪽이 지구 내핵까지 떨어지고 말겠지.
“시발.”
금화신공(???).
이번에 재화가 많아지면서 내게 활력을 더해주던 망할 무공 또한 공능이 강해졌다.
내가 잠을 자지 않더라도 몸이 전혀 상하지 않게 해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덕분에 업무 강도가 더 빡세졌다. 단순히 구매하고 판매하는 것뿐인데 뭐 그리 주문 사항이 많은지 모르겠다.
“아니, 상인 직업 가진 사람이 저밖에 없어요?”
“응? 어. 지금 너밖에 없으니까 이렇게 일이 밀리지?”
그렇다고 하니까 뭐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흑우라도 정도가 있고, 선이 있고, 한계란 있다.
내가 얼마나 헌신짝으로 일했는데 더 이따구로 대우를 해?!
돈? 시발 얼마를 주더라도 이렇게는 못 산다! 애초에 이제 나 돈 겁나 많아!
“……해버릴까?”
그래…, 해버리자…!
드디어 결심을 마친 나는 악마 상사의 책상으로 달려갔다.
휘리리릭─! 보름 전부터 준비해둔 사표를 상사의 면상에 던졌다.
차악─! 그러나 이리엔은 놀랍게도 여유롭게 그것을 잡아챘다.
그녀는 조용히 곁눈질로 ‘사표’라 적힌 흰 봉투를 확인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솔직히 쫄렸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하겠습니다.”
그러자 이리엔은 요즘 슬슬 생겨난 웃음기는 어디가 팔아먹었는지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째서? 맛있는 식사에, 높은 봉급에, 안전한 방식으로 공적치를 듬뿍 받아가고 있는데? 독식인데?”
“……사무실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돈을 몇천만 원 벌면 뭐합니까. 시발. 집에 가지를 못 하는데!”
“그런 이유로 나간다고? 이제야 좀 살 것 같은데 조금 더 오래 있지?”
“갈! 당신은 정말 끔찍하게도 이기적이야!”
나는 이마에 줄줄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을 이어갔다.
한 달간 고대해왔던 순간이다. 확실히 끝맺음을 짓는다!
“아니, 차라리 저한테 돈을 주고 굴리라고 지시를 내리던가요. 우리 부서에 배정된 자금! 그거 하루면 몇십 배로 늘리는데! 아니, 시발. 어째서 특급 인재인 저를 못 알아보시고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겁니까!”
“잠깐만. 좀 기다……,”
“저한테! 돈을! 맡기면! 복사가! 된다니까요?!”
“아니…, 으음……. 그래서 일단 업무가 힘들어서 그만두는 게 맞는 거지?”
아니…….
이 미친년은 방금 내가 했던 소리를 어디 귓구녕으로 들은 거지?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로 비밀 결사에 이바지하고 싶다니까?
아니, 분명 힘들어서 퇴사하고 싶은 것도 맞지만.
이리엔은 곤란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이며 고민했다.
그렇게 침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그녀는 큰 결단을 내린 듯 외쳤다.
“좋아! 그러면 휴가를 줄게. 내일 회사 안 나와도 되니까 머리 좀 식히면서 생각해봐. 알겠지?”
이리엔은 아주 자애로운 선택을 내렸다는 듯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휴가’라는 말에 잠깐 환희를 느꼈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애초부터 내일 토요일인데?’
이런, 시발.
거의 한 달간 핫산 짓을 하느라 주말에도 회사를 나오는 것이 순간 당연하게 느껴졌다. 내 뇌가 세뇌당해버렸어!
그렇게 불평을 하면서도 나는 일단 휴가는 받아들였다.
아주 소중한 것이었으니.
* * *
옅은 주황으로 물들어 있는, 마치 타오르는 듯한 하늘색이 낯설다.
밥도, 산책도, 화장실도 전부 사무실에서 해결해서 이 시간에 밖으로 나올 일이 없었다.
“시발. 더럽게 선선하네.”
뭔가 사무실에서 썩으면서 욕지거리를 확연히 늘어난 듯한 기분이다.
분명 마탑 사무실에서 계속 근무하면 성격도 버리고, 사람답게 살 여유도 반의반에 반 토막이 나겠지.
“……절대 그럴 수는 없지.”
무조건, 반드시 퇴사한다. 그 후에는 적당히 돈을 벌어서 유유자적 살자. 시골에 내려가서 별장이나 짓고 살까?
그래, 이게 맞는 거지. 비밀 결사에 들어가서 세계평화를 지키느니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에휴.”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과거에 품었던 다짐에서 줄행랑친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도 않았거니와.
하필 오늘…,
[ 친우 신혜영 ]
[ 짜잔! 제가 돌아왔답니다! 저 없는 동안 잘 지내고 계셨나요? 혹시 퇴근하셨으면 오랜만에 한잔하시겠습니까? ]
나의 친우이자 사수이자 동지인 신혜영이 드디어 연락을 주었으니까!
게다가 슬슬 가물가물한 약속인 술대접도 해준다는 모양이다.
“이걸 어쩌면 좋지.”
비밀 결사의 업무 강도가 너무 빡세고 지겨워서 탈퇴할 거라고.
자판기 신세는 이제 질색이라고. 그렇게 솔직하게 털어놔?
하지만, 그렇게 말하려니 오로지 내가 참을성이 없어서 그냥 런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혹시 정말로 내 잘못인가? 아니야. 그건 절대로 아니야. 나는 충분히 호구처럼 회사에 헌신했어!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나의 빤스런을 그녀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지.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약속장소로 지정된 바에 들어갔다.
“……오, 이게 바?”
원목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따라 내려가 보니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로 목재로 만들어진 듯한 실내 바닥과 벽, 의자와 기다란 탁자. 마탑 마을의 바라서 그런지 고풍스러움을 추구한다는 느낌.
매끄럽고 찬란한 느낌의 모던바를 상상한 것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실망하진 않았다.
곳곳에 로브와 고깔 모자를 쓴 사람들이 널려 있어 마법 세계의 술집에 온 것만 같아서 오히려 신선하고, 좋았다.
비록 마법에 대한 환상이 많이 깨졌지만, 그래도 선망했던 것이었으니.
“시발.”
괜히 그 환상을 완전히 깨뜨린 지난 한 달을 떠올리며 서글픔을 느끼고 말았다. 나는 그것을 억누르고는 소중한 친우가 어디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먼저 자리해 있겠다고 했는데……, 일단 바에는 안 앉아 있고……. 어디 테이블에 있으려나.
그렇게 구석구석 둘러보던 내 시야에 정말 한쪽 구석에 앉은 금색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금발의 여인은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을 드러내는 듯이 고깔모자와 깜찍한 드레스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예 나를 등지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살짝 미심쩍은 마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혜영아!”
“응?”
다행히 목소리가 들렸는지 그녀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금발에 적안, 새침하고 귀여운 얼굴이 보였다.
그래……! 내 친구 신혜영이 맞구나!
나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한걸음에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그런 마음은 신혜영도 마찬가지였던 걸까. 그녀는아주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민했다. 무어라 말해야 하지? 그 갔다 왔다는 일은 많이 힘들었어? 잘하고 왔니? 아니면 그냥 애썼다고 말해야 하나?
그렇게 어찌 말해야 나의 반가움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흐헤?”
딸꾹질 소리.
일단 나는 범인이 아니었다.
다른 데에서 범인을 찾을 필요도 없이 흐헤, 흐헤. 신혜영은 연신 딸꾹질을 해댔다.
나는 새삼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멀리 있을 때는 조명에 비쳐 잘 몰랐지만, 가까이에서 살핀 그녀의 얼굴은……, 굉장히 취해 보였다.
"흐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