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혈사자(血?者)
* * *
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
누가 말했다고 따지기가 무색할 만큼 흔히 들어왔던 이야기.
그리고, 내가 머리가 굵어지며 개소리로 치부해왔던 이야기였으나 오늘 비로소 복이 찾아온 듯했다.
“……실화냐?”
나는 휘둥그레 방을 훑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새로운 친우 샤오팡이 내 침실이라며 안내해준 것이 방금이었다.
그러나 막상 방에 들어오니 사실은 잘못 알려준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의 고급스러운 방이 눈 앞에 펼쳐진 게 아닌가.
5성급 호텔에 가면 이럴까. 현관부터 모든 바닥과 벽에 고급스러운 타일이 도배되고, 곳곳에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배치된 것은 물론이요. 온 구석이 금칠과 보석으로 치장되어 휘황찬란 빛이 난다.
드라마에서조차 여태껏 보지 못했던 호화로움. 그 상상치도 못한 광경에 나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벅차올랐다.
“……허어.”
어째서 이렇게까지 대우하는 것이냐. 샤오팡!
분명 내게도 만만치 않은 재력이 있었으나 이것을 통째로 선물로 받는 것은 또 다른 감상을 안겨주었다.
돈 복사 능력을 지녔고, 백억 자산이 있고, 조 단위로 돈을 굴리면 뭐해.
모태 서민이라 제대로 돈 쓸 줄을 모르고! 퇴근을 못 해서 쓸 시간도 없었는데!
그래. 모든 것은 나름 내가 제대로 인생을 살 수 없게 만든 악덕 상사 이리엔이 문제였다!
“……망할 이리엔. 반드시 죽여버린다.”
샤오팡의 부탁을 따라야 하니 영원히 만날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 우연으로라도 만나 죽빵 정도는 갈길 수 있기를 소원할 뿐이었다.
그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방 안쪽으로 발걸음을 슬금슬금 옮기니 조금 과장을 보태 내 자취방만 한 크기의 침대가 보였다.
“……지저스.”
정말로 침대에서 살아도 되겠는데?
아니, 이렇게 럭셔리한 침대와 방을 공짜로 내준다고?
나 아직 일도 시작 안 했는데? 실화야? 당신 제정신이야?!
빨리 대답해!
샤오파아아아아아앙!!!
세상에, 이게 참 직장인가? 천사 같은 상사인가?
내가 그동안 일해왔던 회사는, 셀베르크 마탑은, 시발 이리엔은 도대체 뭐지?
그리고, 그곳에서 열정페이로 갈렸던 나는 도대체 무엇?
나는 정체성 혼란을 느끼며 무심코 침대에 다가갔다가 발을 멈췄다.
한참 시멘트 바닥을 뒹굴어 온몸이 먼지투성이였기 때문이었다.
“으음, 첫날부터 더럽히면 안 되지.”
나는 럭셔리한 침대에 뛰어들기에 앞서 럭셔리한 욕심에 들어가 럭셔리한 목욕을 즐기기로 했다.
“……아니, 시발. 어떻게 마음 안 드는 게 하나도 없지?”
나는 황금빛이 감도는 욕탕에서 몸을 녹이며 의문을 표하는 것이었다.
정말 너무나도 호화롭고, 훌륭한 직장이다.
그러나 출근 첫날부터 한 달간 숙직시키는 회사를 떠올리니 너무 분에 넘치는 환경에 놓인 것이 아닌가, 괜히 두려워진다.
아무튼, 나는 목욕을 마치고 가운을 걸친 뒤, 결전을 앞둔 마음가짐으로 울트라 침대 앞에 오롯이 섰다.
외쳤다.
“가즈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나비처럼 날아 쿠웅! 육중하게 떨어졌다.
그러나 침대 매트리스는 출렁거리기만 할 뿐 오히려 이내 푹신푹신 부드럽고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으로 나를 감싸온다.
“아아, 이것이 정녕 인세의 침대가 맞단 말이더냐…….”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물건에 익숙해지면…….
절대로 마탑의 허름하고 작은 침대로는 만족할 수 없다.
……나는 결심했다.
아무리 신혜영이나 마탑 사람들이 울고 빌어도 이곳이 평생직장이라고. 반드시 뼈를 묻겠다고 말이다.
참고로 이리엔이 빌면, 때릴 생각이었다.
‘……한나가 돌아가자고 하면 어떻게 하지? 우리 엄마, 아빠는?’
흐음. 역시 그냥 같이 살자고 하면 안 되나?
……아니지, 나한테 세계가 멸망한다고 알려주지도 않은 계집애가 뭐가 좋다고 그래!
나는 아까 샤오팡에게 바보 취급을 받은 것을 떠올리며 괜히 뾰로통해져서 역시 이곳이 내 평생직장이라고 결단을 내렸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나니 블랙기업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스르르,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한 달간의 피로가 잔뜩 쌓여 있던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곧 수마에 빠졌다.
* * *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진다.
반짝반짝 빛나는 청발이 붉은 융단 위에서 흔들린다.
그 머리칼의 주인인 샤오팡은 언제 자신이 상냥하게 웃었냐는 듯 아주 무뚝뚝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걸은 샤오팡은 이윽고 연구실에 도착했다.
끼익─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쪽 벽에 불청객이 미리 들어와 있는 모습이 보였으나 그녀는 별 대꾸하지 않고, 책상 위의 물건을 정리하는 데에만 신경을 쏟았다.
그러나 불청객, 검성(??) 마르코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중국 흑(?) 등위의 무인 중에서도 검의 정상에 이른 자에게 주어지는 ‘검성’.
그 칭호와 괴리감이 느껴지는 금발 벽안의 백인 중년이었다.
“샤오팡, 너 대체 뭘 데려온 거야.”
“꽤 좋은 능력이라서 주워 왔을 뿐인데 뭐 문제라도?”
“아니, 그거 말고.”
마르코는 헛웃음을 흘렸다. 흑(?) 급의 능력자 중에서도 감각으로는 수위에 드는 그는 샤오팡과 이진우의 대화를 선명히 들을 수 있었다.
“아니, 황(?) 정도면 짬이 좀 찬 단계 아닌가? 마탑 쪽은 조금 느낌이 다른 건가? 어떻게 세상 망하는 것도 모르지? 마탑에 기르던 개나 노예 같은 건가? 아, 그렇다면 이해할만 하군.”
마르코는 제 혼자 결론을 내리고는 흡족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을 본 샤오팡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뭔 말을 하나 했더니 겨우 이런 소리인가?’
무(?)에 꽂혀 그것에만 몰두하는 철부지라 그런가 생각하는 구석이 참 뭐 같았다.
자신이 왜 그런 불바다에서 굳이 주워 왔는가를 물어봐야지.
이진우라는 남자나 이 사람이나 더럽게 바보다.
그리고, 나는 그 바보 둘 사이에 낀 불쌍한 리더.
샤오팡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그냥 바보라서 모르는 것 같은데.”
“에이, 농담도. 아무리 바보라도 일원이라면 마탑에서 교육을 했을 텐데 모를 리가 있나. 분명 노예라서 방치한 걸 거야.”
마르코가 계속 강건하게 말하니 샤오팡 듣고 보니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처음 봤을 때, 목에 봉쇄구를 달고 있기도 했었고.
……하지만, 마탑이 꼰대끼는 있어도 노예를 두진 않았는데.
한때 마탑에 적을 뒀었던 그녀는 그들이 길거리를 활보시킬 정도로 노예라는 것에 개방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다가 샤오팡은 불현듯 이진우를 감싸던 마력 파장을 떠올리고는 덧붙였다.
“차라리 마탑보다는 혈사자 개인 소유라 보는 게 맞을걸?”
“……혈사자?”
껄껄 웃던 마르코는 그 말을 듣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혈사자(血?者).
신의 사도를 맡는 동시에 흑급 던전 원정대에 속해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괴물.
강한 무인을 보면 호승심을 느끼는 마르코로서도 그녀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고, 심연이었다.
“……위험한 거 아닌가? 그 광년이라면 제 것에 손을 댔다고 발광을 할 터인데.”
“푸흡, 마르코. 쫄았어?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샤오팡은 웃음을 흘리며 목함을 손에 쥔 채 들어 올렸다.
다시 탈환한 최상급의 유물, 영옥(氷?). 이것이 있고, 당장 그들은 은폐된 요새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요새에서 나갈 일도 없어. 종말까지 차근차근 준비해나가면서 어떻게 잘 살까 궁리만 하면 돼.”
애초에 들어올 수도 없는 건물을 숨겨놓기까지 했으니 아무리 혈사자라도 우리를 해코지하지는 못하리라.
설령 찾아오더라도 뭐 어쩌겠는가. 당장 요새에 있는 적급 인원만 수백에, 실력이 정점에 이른 흑급은 다섯이나 된다.
세계 삼대 세력인 셀베르크와 무신궁, 길드만 제외한다면, 나머지의 그 어떤 세력과도 붙어볼 만한 병력.
완벽하게 지배하진 못했으나 최상급 유물도 수중에 있으니 아무리 신의 사도라 할지라도 하나쯤은 손쉽게 담글 수 있었다.
그래…….
“불안요소는 없어.”
대계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샤오팡은 확신했다.
* * *
중국 길림성(???). 민간인들에겐 감춰진 무신궁의 영역 내 가도(??).
따르르릉─!
제 갈 길을 열심히 가고 있던 인력거꾼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허억!”
뚜욱.
뚝.
온몸에 피칠갑을 한 여인이 인기척도 없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손에 쥔 기다란 장검은 덤이었다.
인력거꾼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상대가 피칠갑을 하고 있다고 마냥 놀란 것이 아니었다.
[ 특급 인력거꾼 ]이라는 괴상한 직업으로 인해 인력거꾼을 하고 있다지만, 그는 엄연한 적(赤)급 무인이었고 혈겁은 익숙했다.
‘바로 옆에 서 있었는데도 전혀 못 알아챘어…….’
상대가 살의를 가지고 검을 내리쳤다면, 영문도 모른 채 죽었으리라.
……고수다!
그렇게 결론 내린 인력거꾼은 잔뜩 긴장했으나, 그와 별개로 여인은 태연하게 다가와 인력거 위로 올라탔다.
뚝뚝. 인력거 바닥에 피가 떨어져 고였으나 인력거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피칠갑을 한 여인은 하나둘씩 무장을 해제하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섬서(??)로 달려.”
그 소리에 본래 흑룡강성으로 갈 계획이었던 인력거꾼은 어버버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니, 되돌아가는 건 그렇다 쳐도 섬서는 중간에 성을 3개는 거쳐야 하는데요?
인력거꾼은 차라리 비행기를 타는 게 어떻겠냐고 묻고 싶었으나……,
“빨리 출발해.”
“……네!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왠지 조금이라도 기어오르면, 머리가 잘릴 듯한 예감에 그는 군말 없이 섬서로 인력거를 몰았다.
게다가 설마 느려터졌다고 죽이지 않을까 걱정이 든 인력거꾼은 정말 최선을 다해 달렸다.
“…….”
그리고, 여인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애달프게 중얼거렸다.
“……어디 있어, 진우야.”
내가 곧 구하러 갈게.
(유한나 일러스트 러프안 중 하나입니다! 아까워서 올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