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후회
* * *
째깍─째깍─.
나와 달리 시간은 탈주하지도, 멈추지도 않고, 착실히 흘러간다.
해가 막 뜨기 시작한 게 바로 아까 전 같은데 어느덧 이미 중천에 떠 있다.
그 말인즉슨 신혜영과 약속한 시각이 머지않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는 남은 시간 동안 굳이 밖으로 나가 뙤약볕을 쐴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여관방 침대에 걸터앉아 탈주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기다렸다. 그녀의 성격을 감안하면 금방 오리라고 생각했었다.
띠릭─!
[ 생존시간 24시간 18분 37초 ]
“……에.”
아니, 이 녀석 왜 안 오는겨.
나는 당혹스러움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조금 화난 것처럼 보였는데 설마 가출한 건 아니겠지.
설마 너도 탈주의 참맛을 알아버린 게냐?
“으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나는 긴급 발신기를 들어 신혜영에게 호출 신호를 보냈다. 처한 상황에 따라 미리 정해놓은 신호를 보낼 터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답신을 기다렸다.
띠릭─!
[ 생존시간 25시간 01분 48초 ]
“……어째서?”
슬슬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만 나는 표정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에, 맙소사.
침대에 누워 있을 게 아니라 진작 알아채고, 찾아다녀야 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혜영아!”
동료가 탈주했다.
* * *
항구도시 ‘모지’, 인적이 드문 해안 절벽.
신혜영은 슬픔에 가득 찬 얼굴로 그 위에 오롯이 서 있었다.
그녀는 바다에 뼛가루를 한 줌씩 흩뿌릴 때마다 통곡했다.
혹시라도 바람에 엉뚱한 곳으로 날아갈까 걱정도 했다.
“……크흣, 진우 씨!”
진작 바보인 걸 알았는데…….
신입을 던전에 데리고 들어 왔으면, 조금 더 신경 써야 했던 건데!
내가 이번에도 죽여버린 거야!!!
이진우의 흔적을 전부 바람에 날려 보낸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 허물어졌다.
얼굴을 손에 파묻었다.
엉엉,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라. 과연 이 도시에 코인 사이비를 굳이 수상하게 여길 사람이 있을까?
개소리라고 말했었다.
──혜영아! 자신을 잠깐만 내려놓는다면, 이 마을의 비밀을 알 수 있어! 우리는 명탐정이 될 수 있다고!
그래서 도대체 내가 왜 사이비를 따라 해야 하는 거냐고 대꾸했었다.
──봐봐! 의외로 할 만하지? 게다가 우리 처음 만날 때 떠오른다. 안 그래?
사이비 짓이 할 만하기는 개뿔. 전혀 할 만하지 않다고 불평했었다.
──우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게다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변함없이 바보 같다고도 말했었던가.
──혜영아! 우리는 최고의 연금술사 팀이 될 수 있는 환상의 듀오! 잠깐의 창피함은 현자의 돌로 돌아올 거라고!
그냥 귀를 막았다.
참 바보 같던 남자는 말했었다.
──내가 널 현자로 만들어줄게.
갑자기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냥 언제나처럼 바보 같은 소리에, 바보 같은 짓거리를 하는구나.
지난 며칠처럼 장단을 맞춰줬을 뿐인데.
“……멍청이, 만들어준다더니 먼저 가버렸네.”
이렇게 바보처럼 빨리 죽을 줄 알았으면, 불평하지 말고, 잘 들어주는 건데…….
신혜영은 불현듯 여비를 가져오지 않은 자신을 다시금 원망했다.
당장 수중에 돈이 없으니 이진우의 저승길 여비를 전혀 챙겨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현재 보유하고 있는 아티팩트 중의 하나를 따로 골라냈다.
발신기였다.
신혜영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 가장 값비싼 것이었지만, 이젠 신호를 주고받을 누군가가 없으니 가장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그녀는 화풀이라도 하듯이 발신기를 콱 쥐고서, 하늘 위로 힘껏 내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가 결국에는 퐁당. 바다에 빠졌다.
꼬로록, 그대로 익사했다.
비록 금화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든든한 여비가 되기를 바랐다.
신혜영은 눈을 감고, 기도했다. 하늘의 유성우도, 옆에 소중한 가족도 없었지만, 간절히 소원을 읊조려 보았다.
“다음 생에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세요.”
그녀는 활짝 웃고 있는 이진우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리었다. 이번 생도 나름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지만, 만약 다음이 있다면 조금 더 오랫동안 삶을 즐기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진우 씨, 너무 늦어서 구해드리진 못했지만, 복수는 반드시 이뤄드릴게요.”
마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리고는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 자는 내일을 준비해야 했다. 죽은 자의 복수를 해줘야만 했다.
인원이 반 토막이 났지만, 그녀는 던전 공략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현자의 서’라는 물건이나 공적치 따위를 얻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한순간에 상급 방어 마법을 뚫어 버린 노인의 창격을 떠올려보면 공략 난도가 쉬운 것도 결코 아니었다.
전이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자신도 그 자리에서 죽었으리라.
“……할 수 있을까?”
이제부턴 생존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복수’뿐이었다.
신전을 아예 괴멸시키지는 않더라도, 그 수괴인 교황으로 추정되는 노인의 목은 반드시 베어야만 했다.
그러나 은밀기동과 암살이 특기가 아닌 신혜영으로서는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굉장히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설령 일대일로 마주하게 될지라도 상급 공격 마법을 가뿐히 버텨냈던 걸 떠올려보면, 십중팔구는 패배할 것이다.
──하지만, 해야 한다.
“복수는 해줘야지.”
마녀는 공허한 눈빛으로 푸르른 하늘, 작열하는 태양을 올려다보다가 메마른 목소리로 문득 중얼거렸다.
“그러려면 동료가 필요해.”
* * *
똑똑─.
똑똑─똑똑─.
상점창에서 신혜영과 만날 방법을 찾고 있던 이진우는 돌연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혹시 그녀인가 싶어서 다급하게 문 앞으로 달려갔다.
끼익─. 문을 열었다.
“형제님, 성하께서 찾으십니다.”
“……허어.”
그러나 갑주를 입은 장정 여럿만 문 앞에 서 있을 뿐 발랄하게 웃는 금발 적안의 마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후회했다.
작작 놀릴걸.
지금껏 탈주할 생각만 했지, 탈주한 사람을 찾으려니 골치가 아팠다.
“…….”
그리고, 똑똑한 듯 바보 같은 마녀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이진우는 솔직하지 못했고, 누군가를 돌보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변의 도움을 조금 받기로 마음먹었다.
“오케이, 브라더. 나를 안내하시오.”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