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닌자의 시간
* * *
“그냥 아무도 믿지 마요.”
“뭐?”
“진우 씨, 지금 좀 풀어진 것 같아요, 저 빼고 다 괴물이라 생각하란 말이에요.”
그때 신혜영은 화난 듯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서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말했었다.
정확히 언제였었지?
던전에 들어오고부터 틱틱거린 기억이 많아 조금 헷갈린다.
‘저녁에 사이비 포교를 하다가 행인과 즐겁게 떠들었던 때인가?’
어쩌면 여관으로 가던 길에 사이비 사제(정식이다)를 우연히 만나 신전에 따라가려 했던 때일지도 모른다.
뭐, 아님 말고.
아무튼, 내가 그날의 기억에서 배운 것은 심하게 장난을 치면 부처 같은 신혜영도 가출을 한다는 것과──.
“코인 친구일지라도 맹목적으로 믿어선 안 된다는 것이지.”
“읍읍──!”
내게 사지를 묶이고, 재갈을 물려진 근위병들은 무슨 짓이냐고 묻는 듯한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무슨 짓이긴. 나의 연금술 메이트 혜영이가 충고해줬던 뒤통수 점검 중이지.
물론 대놓고 말하진 않았다. 교황이 배신한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 대신으로 나는 삭막한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모든 건 교단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부디 이해해주시죠. 교황의 인가를 받은 절 믿지 못하는 건 아니시겠죠?”
“…….”
내가 검을 슬쩍 뽑으며 나지막이 읊조리자 근위병들은 부르르 떨고는 하수구 통로 한쪽에 얌전히 몸을 눕혔다.
‘그래, 신실한 친구들이로군.’
현재 나는 교황에게 이번 작전에 한해 모든 권한을 이양받은 상태다. 즉 교황과 다름없거늘 저들이 내 말을 안 듣는다?
그렇다면 마구니가 머릿속에 잔뜩 껴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래도 결국엔 잘 들어서 참 다행이다. 나중에 교황이 아군이란 게 확실해지면, 잘 변호해주리라고 믿고 있을게. 내게 무슨 오해가 있던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이내 근위병들을 은폐했다. ‘비밀 공간’으로 감쪽같이 감춰놓았고, ‘초특급 매듭’으로 사지를 묶었으니 웬만해서는 문제없으리라.
“자, 그러면 이제 탈주 닌자의 삶에 종지부를 찍으러 가볼까.”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상점에서 구매한 암행복을 주섬주섬 껴입었다. 닌자 세계관에 어울리지 않지만, 상급 보호 마법과 신속화 마법이 걸린 좋은 암행복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 목숨은 제대로 지켜줘야지. 허리춤에 수리검 세트까지 장착한 나는 그대로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탈주 닌자의 시간이다.
* * *
쿠르르쾅쾅──!
레지스탕스의 본거지, 하수구 전체에 거센 지진이 찾아왔다.
고전에 의하면, 대마녀님께서 발하셨다는 ‘천둥 폭격’이 이런 소리를 낼까.
대지 속성 마법 중 최상급에 속한다는 ‘어스퀘이크’가 이런 위력일까.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지상에 일어난 폭발은 거대했고, 하수구 지하 깊숙이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온갖 물건이 바닥에 쓰러지고, 장정이 엎어지는, 모든 것이 지진에 의해 평등하게 비틀거리는 대난리였다.
개중에 상위 마법사라는 이유로 개인 연구실을 가진 마틸다는 책상 밑으로 들어가 지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웬만하면 당당하게 자기방어를 할 자신이 있는 편이었지만, 하수구가 무너지리란 생각이 들 정도로 진동이 거셌다.
마틸다는 거사를 앞둔 와중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녀는 눈을 꾹 감고 지진이 지나가기를 영적 세계에 기거하시는 대마녀님께 기도했다.
───────────.
그 덕분일까. 지진은 금방 멈췄다.
마틸다는 한숨을 내뱉고서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야에 들어온 연구실 바닥에는 온갖 물건이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설마 이 재난재해가 인간이 벌인 것이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어질러진 연구실을 빠르게 정리해나갔다.
그리고, 어느 정리를 마쳤을 때쯤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장인의 눈빛을 빛내며 본래 하던 작업을 시작했다.
마틸다는 마녀님의 말씀에 의해 하수구를 지키는 역할을 맡았지만, 혹시 지원을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휴식 시간일지라도 확실히 장비를 정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에 다다른 그녀는 경건한 마음과 섬세한 손길로 수리검의 날을 갈았다.
최대한 날렵하게──.
마틸다는 닌자처럼 신속하고 현란한 발놀림에 자신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정작 육체 강화나 바람 속성 마법이 아니라 ‘효과 부여(Enchant)’ 쪽에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특출나게.
“으음! 이 정도면 성기사의 흉갑 사이로 꽂아 넣을 수 있겠어.”
마틸다는 수리검을 이리저리 훑어보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번쩍번쩍 빛나는 수리검에서 강철마저 자를 예리함이 엿보였다.
나중에 코인교의 상급 사제나 성기사를 만날지라도 두렵지 않을 듯했다.
“좋아, 마녀님을 도와 코인교의 무리들을 전부 척결해주겠어!”
‘모지 코인’에 가산을 탕진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복수를 반드시──!
그렇게 굳게 다짐하던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자신보다 몇 기수는 아래인 후배가 헐떡거리며 외치는 모습이 보였다.
“마틸다님! 습격입니다!”
“……뭐어?”
마틸다는 얼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첫째 이유로는 ‘습격’이란 요즘 들어 새롭지도 않으면서 위급한 소식 때문이었고, 그다음으로는 연구실 문을 제멋대로 열고 들어온 후배 녀석 때문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동료와 후배에게 친절한 편이라고는 하나 연구실을 오가는 것만큼은 엄중하다는 걸 알 텐데도 허락도 안 받은 채 마음대로 들어오다니…….
마틸다는 마음이 불편했으나 그만큼 급한 사안이겠거니 생각하고는 얼른 보고를 듣고자 손짓했다.
후배 마법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 제3 통로가 뚫렸습니다. 분명 용해액으로 막아놨었는데…….”
“그 이후로도 함정 많이 깔아놨지 않아?”
“그것도 뚫렸습니다……. 그보다 침입자가 현자의 샘에 이르기 직전입니다. 당장 지원이 필요합니다!”
“알겠어. 잠깐만 무기만 챙기고.”
마틸다는 사물함에 든 수류탄과 섬광탄, 연막탄을 전부 챙기고서 마지막으로 암행복 차림을 점검했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완성한 수리검을 허리춤에 단단히 꽂아 놓았다.
“좋아, 한번 막아보자고.”
그녀는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 싱긋 웃어 보이고는 곧 재빠른 발놀림으로 하수구를 주파하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질풍(?風)과도 같았다.
* * *
“네 이놈──! 예가 어디라고 감히──!”
언젠가 현자의 샘에서인가. 그곳에서 봤던 닌자 무리가, 정확히는 흑의의 마법사들이 내 앞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그 기세는 과연 철벽과도 같았지만──.
“꾸에에엑──!”
의외로 정말 간단하게 정리되었다.
“……마음에 안 들어.”
내 닌자의 로망이 산산이 조각나다 못해 이젠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수리검은커녕 파이어볼 같이 어쭙잖은 걸 던지는 애들이 왜 이렇게 많지?
어떻게 강한 놈이 수십 명 중 한 명도 없어?
“실화냐?”
나는 실망스러운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이런! 이렇게 엉망인 곳이라면! 손수 부숴주는 게 인지상정이겠지!
참고로 전투력 비교 대상은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이리엔 살해 특훈을 열심히 도와주었던 소꿉친구 유한나였다.
“……으음, 어쩌면 말도 안 되는 녀석과 비교하고 있던 걸지도.”
나는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 손으로 닌자들을 격퇴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아는 길이라고는 이쪽밖에 없었다.
그렇게 꾸준히 전진한 덕분에 ‘현자의 샘’이라 불렸던 장소에 이르렀다.
“으음, 추억이 돋는구나. 이곳에서 마력 펌핑을 엄청나게 했었지.”
개꿀이었다.
아직 써먹을 데는 없었지만, 수치 상으로 거의 2배 수준이었으니.
나는 여전히 황금빛으로 발광하는 샘을 내려다보다가 불현듯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터벅터벅─.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통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보처럼 침음했다.
“……어?”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이는 그야말로 닌자의 귀감! 암행복의 마틸다였다! 그녀는 씁쓸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살벌한 표정으로 수리검을 빼 들었다.
마틸다는 후회 따위 남기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레옹, 너를 죽이겠어.”
나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활짝 웃고서 마찬가지로 수리검을 빼 들었다.
“마틸다! 너일지라도 호카게 자리는 넘기지 않을 거야!”
분명 병신 같겠지만,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대사였다.
그래서 뱉었다.
마틸다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더니 내게 달려왔다.
나도 마주 달려갔다.
채앵──! 곧 수리검이 맞부딪혔다.
나는 손아귀에 느껴지는 거센 저항을 느끼며, 기쁘게 웃었다.
드디어 진정한 닌자의 시간이 도래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