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결착(上)
* * *
지상 아래, 하수구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폭우가 쏟아져 내린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릴 만큼 곳곳에 물소리가 넘쳐흘렀다.
찰박찰박,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들려오는, 신발이 축축하게 젖어가는 소리.
그것은 찍찍이 신발을 신고 다녔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며, 기분을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정확히는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하체가 더럽게 찝찝하다.
팬티까지 젖었어.
“시발.”
현재 내 신발과 양말의 H2O 함유 비율이 90%에 육박하고 있단 사실은 참 경이로우면서도 불쾌한 일이다.
그러나 내 얼굴을 찌푸리게 하고, 마음을 무겁게 하는 원인은 따로 있었다.
‘……오오, 마틸다.’
그립다, 그리워, 그립다, 그리워.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온몸에 극심한 그리움과 슬픔이 몰아치다니.
설마 그녀는 정말 내 운명의 사람, 혹은 사랑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전부 끝났어…….”
그래, 전부 끝.
사랑도 전쟁도 닌자도 모두 결착(?)에 이르렀다.
그 직전에 다다랐다.
‘그야 보스방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나는 불현듯 고개를 들고서 정면의 옥좌를 바라보았다.
비루한 하수구의 아지트와 어울리지 않는, 형형색색의 보석으로 이뤄진 옥좌.
꼭 지하조직 보스들이 부하들 몰래 자금을 빼돌려서 이런 걸 장만하더라.
“이봐, 무슨 변명이라도 해보시지!”
“…….”
어느 역사에서도 닌자 조직의 우두머리 중 쓰레기가 아닌 새기는 없었다.
왠지 모를 확신을 품은 채 노려보자 칠흑의 로브를 뒤집어쓴 노파는 곧 우수에 찬 눈빛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십 년 전의 일이었지.”
으음, 굉장히 먼 시점의 이야기다.
그리고, 나는 저것이 구질구질한 변명이리란 것을 직감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떠올린 건 덤.
강당에서 주구장창 하품만 하던 기억들이 뇌리를 스치는 것과 동시에 나는 어느새 검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를 곁눈질한 노파는 멈칫했다. 그녀 자신도 너무 긴 이야기가 되리라 생각한 것인지 결국 이야기 주제를 바꾼다.
“홀로 우리 아이들을 뚫고 온 겐가…….”
“거뜬했지!”
“그래? 대단하군…….”
“……후훗.”
나의 진정한 닌자 롤모델, 마틸다를 제외하고는 전부 쭉정이들이었다. 이리엔을 대비하기 위한 수련으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정도의 약골 마법사들.
‘그러고 보니 굳이 변명을 들어줘야 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본래는 지하조직의 보스로서 대우를 해줘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굳이 특별 대우를 해줄 정도로 강한 조직도 아니었고, 딱히 특별하지도 않았다.
나의 사랑 마틸다를 제외하면 그랬다.
차라리 노파를 해치우고, 서둘러 신혜영을 찾는 게 훨씬 보람찬 일이 아닐까. 그래! 나의 소중한 파트너 혜영이를 찾아야만 해!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닌자 보스에 대한 마지막 예우로 나름 상급 유물, ‘불멸의 닌자도’를 뽑아 들었다.
채앵─. 날카로운 금속음이 비좁은 공동에 울렸다.
노파는 다급하게 손을 내밀었다.
“잠깐만 기다리게.”
“시간이 없소, 한시라도 빨리 전개를 쭉쭉 뽑아야 한단 말이오.”
“아니, 정녕 이 옥좌의 비하인드 스토리나 교황의 비밀을 알고 싶지 않은 겐가! 그대! 현(?) 교황의 형제, 사르한카 가르커니카!”
“……교황의 비밀?”
“그래! 교황의 추악한 비밀이 궁금하지 않나? 그의 의붓형제여!”
내가 은근히 귀를 기울이는 듯하자 노파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공략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래, 들을 것만 듣고, 쓱싹해버리자!’라고 마음먹었을 무렵,
띠리링, 낯익은 알림음이 들려왔다.
“마르스 가르커니카. 그 악독한 녀석은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제멋대로 코인 가격을 좌지우지했고, 또, 막대한 재화로 도시의 처녀들을…….”
어느새 노파가 제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그 엄숙한 목소리는 점점 아득해질 뿐이었다. 나는 돌연 머릿속에 떠오른 문구에 집중하기에 바빴다.
[ 당신이 지정한 운명(??), ‘나와 신혜영은 현자의 시련에서 멀쩡히 생환한다.’의 결과가 곧 확정될 예정입니다. ]
모든 것이 결착에 다다르기 직전이었다.
* * *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차갑다.
얼굴과 맞부딪힌 빗물은 그대로 턱선을 타고서 온몸으로 흘러내렸다.
그 덕분에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의 옷가지가 공평하게 흠뻑 젖었으니 서늘함을 완벽하게 체험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로 인해 온몸이 타오르는 듯한 환상통이 아주 약간이지만 가라앉았기에 그리 나쁜 일도, 불쾌한 기분도 아니었다.
그저 마녀는 새까맣고, 우중충한 먹구름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할 뿐이었다.
별로 아름답지 않은 하늘. 하지만, 누군가 죽기엔 참 어울리는 날씨라고. 아, 전에도 그렇게 생각했던가?
신혜영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주문을 읊었다.
이윽고 마법이 형성되었다.
──폭렬(??).
파괴력으로 따지면, 상급 마법 중에서도 으뜸인 공격 마법.
그러나 이번에 한해서 단 하나만으로는 유효한 데미지를 주기에 부족하다.
그러니 그녀는 표적이 서운하지 않게 한 번에 여러 개를 준비했다.
띠릭─.
[ 악명 : 93 ]
교황(?) 마르스 가르커니카가 첫 폭발에서 수십 초를 넘기지 않고, 신체를 복원 혹은 완벽하게 방어하리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화마에서 금방 벗어나지 못했다.
설마 오랜 세월 누적된 노쇠(?)로 인한 판단력 또는 능력의 미달일까.
아니면, 그가 강자로서 오만(??)을 지닌 채 싸움에 임했던 것일까.
뭐, 아무래도 좋다.
교황은 처음 폭발지점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고, 덕분에 그녀는 도시 전체를 불태울 필요 없이, 더 이상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특정 지점에다만 마법을 때려 박으면 됐으니까.
그것도 인텔리하게 원격으로.
콰아아아아앙───! 저 멀리 도시 외곽에 화마가 솟아오르는 광경이 보였다.
굉음도, 폭발의 크기도 처음 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한 사람의 형체를 지워버리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콰앙! 콰앙! 콰앙! 그것을 사정없이 연거푸 때려박는다.
“…….”
하지만, 여전히 화마 속에서 맹렬하게 뿜어나오는 광휘는 망할 놈의 교황이 명백히 살아 있음을 나타냈다.
그랬기에 신혜영은 눈을 감고, 곧바로 그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바닥에 미리 깔아놓은 마법진을 따라 몸에 마력이 흘러들어왔다.
그녀가 굳이 지하조직까지 들러서 마법사들을 징발한 이유가 있었다.
미리 준비해둔 대규모 술식을 보조하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한정된 마력(?力)을 채우기 위함이었다.
본인들도 동의한 일이었으니 당장 죄책감 따위를 가지진 않았다.
띠릭─.
[ 악명 : 94 ]
다만 이번 마법으로 한계에 달한 이들이 몇 명 더 죽은 모양이었다.
최대한 민간인을 죽이지 않았는데도 악명이 점차 ‘100’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신혜영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입술을 짓씹었다.
나름 일이 잘 풀렸는데도 아직도 죽지 않은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바퀴벌레 같으니.”
어느덧 그렇게 폭렬 마법을 십수 번씩 때려 박은 것이 17회차째였다.
슬슬 때리는 쪽이 지쳐가는 시점이었다.
마력 회로가 망가졌느니, 머리가 터질 것 같다느니, 피를 토할 것 같다느니. 몸의 이상 현상을 일일이 나열할 필요 없이──. 이대로라면 그냥 제 죽음부터가 확실했다.
“……뭐, 이쯤 되면 어떻게든 죽이는 건 자신 있지만.”
기왕 죽을 거라면 이진우의 시체를 들고 귀환해 현실에서 죽고 싶었다.
빗물인지, 핏물인지.
신혜영은 마력 거부 반응으로 무언가 흘러나오는 눈을 감고서, 주문을 읊어야 하는 입만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어차피 기운이 없어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일 테지만, 아무튼 그러했다.
악명도, 몸의 상황도, 마력도, 지레짐작이지만, 근위병의 접근을 막기 위한 교란책도 슬슬 한계에 이른 상황이다.
이번 마법으로도 죽지 않는다면 목숨을 담보로, 고서를 제물로 바쳐서라도 길동무를 데려가야겠다.
마녀는 무거운 머리로 간신히 그런 계산을 하며, 계속해서 주문을 읊었다.
* * *
……고목(古?)처럼 갈라진 손이 방금까지 길가를 이루었던 돌조각을 움켜쥐었다.
노인은 그까짓 고통에 연연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격통을 겪고 있었기에 있는 힘껏 파편을 움켜쥐었다.
자신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는 악력에 돌조각은 손바닥의 화상 자국을 째고 선혈을 흘러나오게 했다.
마르스는 그를 먹으로 삼아 천천히 땅에 문자를 새겼다.
목구멍이 익어버려 신께 어떤 말도 전할 수 없었으므로 그 대신이었다.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자신의 상황을 되돌아보았기 때문이다.
폭발에 의해서라고는 하나 구덩이에 몸을 눕히고 있다니. 이 얼마나 굴욕적인 상황이란 말인가.
그랬기에 노인은 필사적으로 바랐다.
‘주여, 제게 은총을 내리시어 죄인을 벌하게 하소서.’
교황은 자신이 느낀 격통을 마녀가 가감 없이 느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그의 신인 ‘모지 코인’은 그 바람에 걸맞은 재화를 계좌에서 꺼내고, 그 소원을 이루어주려 몸을 일으켰다.
* * *
끔벅끔벅.
운명의 신은 갑작스러운 부름에 눈을 떴다.
저울을 들었다.
한쪽에는 생명을, 다른 한쪽에는 재화를.
그리고, 곧 한쪽이 기울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