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발악
* * *
분홍색 벽지로 도배된 방. 과연 침실로 쓰겠다 작정한 것인지 방 안에는 침대 외 다른 가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으로 독신 여성 혼자서 눕는 것치고는 커다란 침대가 방 중앙에서부터 우측 벽면까지 자리를 차지했다.
그 커다란 침대 위로는 귀여운 캐릭터 이불이 깔려 있고, 봉제 인형이 여럿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
신혜영은 그 인형들 사이에서 멍하니 분홍색 천장만 바라보았다.
한 시간째 지속된 상태였다.
“…….”
그녀가 넋을 놓은 까닭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는 조금 지쳤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아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지난날의 기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였다.
일종의 발악.
그러나 별안간 떠오르는 기억을 완전히 틀어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쪽─.
의문의 소리와 문득 떠오르는 기억.
“……아.”
신혜영은 침음하더니 돌연 자신의 머리를 잡아 쥐어뜯었다.
우드드득─. 두피에서 알싸하게 느껴지는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손아귀의 힘은 도무지 빠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겨우 모발 몇 가닥 빠지는 것으로 굴하기에는 그녀의 관록이 제법 쌓였고, 현재 그 망할 놈의 기억이 너무 끔찍했다.
“……으극, 흐흐, 으으으으.”
빠드득빠드득─. 신혜영은 뇌리를 스치는 어떤 기억에 이를 갈았다.
또, 헤프게 웃었다. 아니, 정확히는 미친 듯한 표정으로 실성했다.
그리고, 가끔은 흉신악살처럼 만면을 분노로 일그러뜨렸다.
그녀가 자의로, 일부러 그런 행동은 딱히 아니었다.
그저 던전에서 며칠간 고생한 기억을 떠올리자니 실소가 알아서 나왔을 뿐이고, 인상이 찌푸려졌을 뿐이다.
──목숨을 걸고 죽이겠습니다.
이진우와의 재회한 뒤로, 흑역사(?史)가 끈질기게 마녀를 괴롭혔다.
“시발.”
신혜영은 어느덧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익숙해져버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수치스러웠다.
죽지도 않은 인간의 복수를 하겠다고 개고생한 것은 둘째치고, 오만가지 대사를 뱉어댄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으으으으.”
그러나 다른 기억들은 의외로 금방 이겨낼 만한 것들이었다.
그래, 착각한 게 뭐 어때서. 동료의 복수를 위해 개고생을 하고, 더럽게 아프고, 그 동료를 죽여버리고 싶단 생각이 가끔 들기도 했지만, 뭐 어때?
그때 신혜영이 가슴에 품었던 것은 분명 숭고한 의지와 우정이었다.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래, 결코 그런 것이 아니어야만 할 터인데…….
그녀는 다시금 떠올렸다.
쪽─.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러나 적어도, 솔직히 인간적으로 이 기억만큼은 버텨내기가 어려웠다.
생애 첫 입맞춤.
부모님을 제외하면 동성을 포함하더라도 아무에게도 시도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 어째서 자신은 이진우에게 그런 짓을 했을까.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얼간이. 바보. 멍청이. 말미잘. 이진우급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년.
신혜영은 온갖 심한 욕을 자기 자신에게 내뱉었다.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니.
“……키스를, 아니, 키스를 도대체….”
그녀는 아예 엎어진 채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서 중얼거렸다.
정확히 따지자면, 볼 뽀뽀. 키스까지는 아니었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스킨십의 단계보다 다른 것이 훨씬 더 신경 쓰이고, 부끄러웠다.
“……눈치챘겠지? 이진우가 아무리 바보라도 당연히 눈치채겠지?”
자신조차 얼마 전에 깨달은 그 마음을 그도 눈치챘을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입을 맞췄는데 그게 연심(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설마 욕정, 육욕(??)인가?
“……나, 멍청아! 제발 망상 멈춰어어어!”
신혜영은 눈을 질끈 감고, 절규했다. 격정적으로 침대 위를 데굴데굴 뒹굴었다.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그럼에도 수치스러움을 전부 덜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계속 괴성을 질러댔다.
마탑에서 직원 특혜로 싸게 제공한 단독주택은 마법으로 축조되어 그 방음이 무척이나 뛰어났기에 오로지 그녀만이 자신의 괴성을 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신혜영은 다른 이를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흑역사에 괴로워할 수 있었다. 그녀는 몸을 비틀었다.
두두두두─.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이불이 강력한 연속 발차기에 의해 공중을 부양하기 시작했다.
깜찍하던 캐릭터의 얼굴이 곧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체공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밤을 지나, 새벽을 넘어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렇게 도달한 이튿날 아침……. 이불은 필연적으로 폐기처분에 이르렀다.
장렬한 최후였다.
* * *
태양이 하늘에 걸쳐 미소를 보일 무렵, 이리엔은 곧바로 잠에서 깨어났다. 수년간 몸에 밴 기상시각이었다.
그녀는 눈을 한 번 비비고는 숙직실 침대에서 일어났다. 간단하게 세안을 하고, 연구복이라는 이름의 전투복을 입었다.
그리고, 바로 아래층에 자리한 사무실로 출근했다.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특별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사각사각─. 여느 때처럼 그녀는 책상 위의 서류들을 하나둘 해치워나갔다.
한 달 넘게 숙직을 한 덕분에 서류작업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드디어 서류산을 전부 다른 부서에 퍼 나르기 직전이었다.
‘……이런 경우를 우공이산(???山)이라 부르던가?’
어느덧 한국 지부에 근속한 지 7년.
거의 반 정도는 한국인이 된 이리엔은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한 사자성어의 용법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개고생인 건 비슷할지도.”
결국 그녀는 퉁명스럽게 자문자답하고는 성실히 서류작업을 이어갔다. 웬일로 중간중간 쉬는 시간을 갖기도 했지만, 산을 이루던 서류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 하루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이리엔은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오늘 업무의 고단함을 치하했다.
일부러 느리게 처리한 것도 있었지만, 온종일 서류작업에 몰두하는 것은 육체노동과는 다른 피로감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퇴사하고픈 생각을 억누르면서 새롭게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다.
‘역시 인간처럼 살려면 서류 노예가 필요해.’
어라? 그러고 보니 이번에 노예가 되겠다고 자처한 애가 있네?
“……후후후후.”
이리엔은 퀵으로 배달시킨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답지 않은 여유를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패배의 리스크를 생각하느라 조급했던 그녀였건만 자존심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이기면 그만 아니겠는가.
그래, 그냥 이기면 돼.
붉은 머리의 악덕 상사는 눈을 감고, 체내의 마력 회로를 점검했다.
오늘 아침만 해도 동이 났던 마력은 어느새 넘실거리고 있었다.
대결 장소에 도착할 쯤에는 완전히 차 있으리라.
다행히도 늦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리엔은 문득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사무실 출입문에 서 있는 익숙한 인물이 보였다.
웬 고글에, 왼팔의 기계장치에, 별것을 아주 덕지덕지 붙여놨지만, 저것은 분명한 자신의 전직 서류 노예였다.
“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감? 이제 약속한 파이널 데스매치 시간이 됐는데 슬슬 가야지? 사랑스러운 상사님?”
오랜만에 마주한 이진우는 여유가 늘어나 있었다.
아니, 역겨움이 하늘을 뚫는 것을 넘어 우주에 닿고 있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은 상냥한 미소로 반갑게 손을 흔들어대는 꼴이 참 별로였다.
‘……서류 작업만 마음에 드는 녀석.’
그러나 이리엔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면서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경험상 저 녀석은 농담이라도 자신에게 친절함을 베풀 녀석이 아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저러는 것인지…….
그녀는 싸늘한 감각을 느꼈지만, 애써 차분함을 가장한 채 아메리카노를 마저 들이켰다. 툭, 책상 위에 빈 껍데기를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명의 데스매치 시간이었다.
* * *
……마탑 옆에 자리한 마법사 콜로세움. 그것은 원본보다 광활한 크기였으며, 전투 마법의 여파를 안정적으로 버티기 위해 블록마다 ‘안정화’ 마법이 담긴 마법 사치의 정수가 집약된 구조물이었다.
그 콜로세움의 관객석에는 막고라가 이뤄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몇 명의 마법사들이 자리해 있었다.
엄청난 숫자의 관객석에 비해 무척이나 적은 관객 수였으나 그 안타까운 사실에 이리엔은 안도감을 느꼈다. 앞으로의 광경을 바라볼 인원은 적을수록 좋았다.
“후우.”
이리엔은 깊게 숨을 내뱉는 것으로 잡념을 지워버렸다. 눈을 감고, 오직 마력을 가다듬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집중하고 있으려니 띠익─. 띠익─. 신호음이 들려왔다. 그녀는 조급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 차분히 마력을 정제해나갔다. 곧바로 마법을 발동할 준비를 마쳐야 했다.
띠이이익────.
곧 데스매치의 서막을 알리는 긴 신호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이리엔은 눈을 부릅뜨고서 마법을 발동했다.
그러자 빛처럼 달려오던 이진우의 발밑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여차하면 죽이겠다는 마인드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