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데스매치(Death match)
* * *
……이리엔과 데스매치가 약속된 6월 10일의 아침.
닌자스러운 근육질의 사내는 수증기가 가득한 욕실에 입장했다.
그는 흐뭇한 얼굴로 일렁이는 욕조를 바라보고는 발을 들이밀었다.
차르르륵──. 곧 목욕물이 넘쳐흘러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으음.”
닌자는 욕조에 몸을 맡긴 채, 뜨끈한 욕탕을 만끽했다.
아로마의 향기가 쉴 새 없이 그의 비강을 파고들었다.
목욕물의 온기는 혹여나 화상을 입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후끈했다.
‘……분명 50℃였던가.’
그것은 정말 인간적으로, 어쩌면 닌자적으로까지 파멸적인 열기였다. 그리고, 그는 그런 파괴적인 감각으로 오늘따라 경직됐던 몸과 마음을 녹여냈다.
“……후우.”
평소였다면, 목욕에 시간을 쏟지 않고, 빠르게 찬물로 씻었으리라.
하지만, 오늘은, 오늘만큼은 결코 평범한 날이 아니었다.
이진우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무려 연차를 내고, 욕조에 미리 목욕물을 받아 아로마 입욕제까지 푼 데에는 어떤 이유가 존재했다.
──이리엔을 만난다.
사랑스러운 그녀를 멋진 모습으로 만나기 위해 목욕재계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진우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서 지난날 사축의 기억을 떠올렸다.
몇 번을 떠올려도 질리지 않는 박해의, 핍박의, 과로의 기억.
“……하하.”
부서를 옮기고,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치는 것이 아니었다.
무려 데스매치(Death Match).
드디어 서로의 명운을 건 운명의 전쟁이 도래한 것이다.
만약 다른 날이라면, 그녀를 마주하자마자 이를 박박 갈 것이 뻔했다.
어쩌면 면상에 파이어 펀치를 날릴 구실을 호시탐탐 노렸으리라.
온갖 악의(??)로 육체와 정신을 무장하는 것은 덤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목욕을 즐겼다.
이진우의 오늘은 평소의 일정과 확연히 달랐고, 다를 예정이었다.
매일 근면·성실하게 출석했던 주식·코인 거래소에 들어가지 않았다.
소꿉친구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수천수만 번의 살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온몸에 충만하게 차오른 마력을 연공하지도 않았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오로지 마음속 실낱같이 남은 평화를 유지하는 것도 벅찼다.
죽이고자 하는 바람이 너무나도 강한 나머지, 그 말밖에 나오지 않게 된 것이다.
“죽인다.”
이진우의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저주의 말이 욕실을 울렸다.
이대로라면 오늘 내내 죽인다. 라는 말을 내뱉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은 분명 재화나 검법, 마력보다도 마음의 수양이 필요한 때였다.
그래서 이진우는 목욕을 마치고, 개인 수련실로 이동했다.
다다미방 한가운데 정좌하고서 눈을 감고, 정신을 한데 모았다.
무념무상(無?無?)의 마음으로 평화를 찾아 나갔다.
혹시라도 분노에 사로잡혀 이리엔에게 패배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진우는 절망감에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할 것이었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 이리엔과의 데스매치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진우는 대계(大?)를 위해 마음을 다잡고 명심했다.
마음은 열정적으로, 그러나 머리는 냉정하고 인텔리하게.
결코 감정에 사로잡혀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온종일 평화를 찾아나갔다.
그 덕분일까.
이진우는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침착한 상태로 이리엔을 마주할 수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이를 박박 갈지 않고, 태연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콜로세움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분명 멀쩡했다.
콰아아앙──!
아무런 전조 없이 바닥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이진우는 허공을 날았다.
……그는 시야가 쳇바퀴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상황에서도 굳센 다짐처럼 인텔리하고, 신속하게 머리를 굴렸다.
‘뭐지? 왜 폭발했지?’
전투 직전, 이리엔이 마력을 갈무리하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 마법을 찰나에 발동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설마 경기장 바닥에 부비트랩을 미리 박아놓은 것은 아닐 테고…….
……그 순간 이진우는 깨달아버렸다.
본래 닌자란 암살과 은신의 대가.
깨달음을 얻은 그가 시선을 돌리자 비로소 콜로세움 곳곳에 숨겨져 있던 공격과 은폐(??)의 술식이 보였다.
“……하하.”
모든 것을 깨달은 이진우는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몸에 두른 아티팩트 덕분에 발이 저린 것을 빼고 어떤 상처도 입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머리가, 가슴이 불타오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흙먼지로 가려진 시야.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저 멀리 이리엔의 얼굴만큼은 잘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놀라울 정도로 재수 없고, 음흉한 미소.
그것을 본 순간, 머릿속 어딘가가 툭 끊어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이진우는 상대방의 패를 하나씩 파훼해나가겠다는 전략을 폐기했다.
……당장 저 면상에 파이어 펀치를 날리지 않으면,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이 쌍년이──.”
닌자는 닌자도를 뽑아 들었다.
* * *
쾅. 쾅. 쾅.
연달아 폭발이 일어났다.
어젯밤 이리엔이 열심히 설치한 마법 중의 하나로 어지간한 구조물이나 생명체는 산산이 조각낼 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일시에 터져나가니 필연적으로 경기장 바닥에 크레이터가 여럿 생겨났다.
또, 흙먼지의 안개가 일어나 시계(??)가 흐려졌다.
이리엔은 그 모습에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죽진 않았겠지?”
적당히 화풀이할 생각이었건만, 진짜로 죽어버린다면 뒤처리가 곤란했다. 마력의 계약을 이용해 인질로 삼지 않으면, 그놈의 뒷배에게 큰일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향후 일의 전개를 상상한 이리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상황을 서둘러 파악하기 위해 안구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단순히 안력이 좋아질 뿐만 아니라 미세한 마력의 유동조차 포착해내는 기예였다.
“…….”
그렇게 안개 속의 광경을 꿰뚫어 보던 이리엔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봤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눈가를 찌푸렸다. 이윽고 입을 크게 벌린 채 경악했다.
분명 폭발로 인해 사지 정도는 날아갔을 확률이 농후하리라 생각했었다.
‘뭐, 나중에 붙이면 되지.’
그렇게도 생각했었다. 솔직히 의수를 달아주면 그저 그만인 문제였으니까. 그냥 어떻게든 숨통만 붙어있기를 바랐다.
이리엔의 예상보다 중첩시킨 ‘폭렬’의 화력이 제법 강했으므로.
얼마 전까지 민간인이었던 이한테는 특히나 가혹했을 터였다.
……그러나 주제넘은 걱정이었을까.
그 걱정의 대상인 이진우는 사지가 날아가기는커녕 어떤 상처도 없는 모습으로 생생하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악귀처럼.
“……미친놈.”
이리엔은 불현듯 두려움을 느꼈다. 몸이 달달 떨려왔다.
내가 저딴 놈한테 겁을 먹다니!
그런 수치심을 느끼기도 했지만,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존본능은 체면보다도 강했다.
그 본능에 그녀의 마력은 알아서 벽에 새겨놓았던 마법을 발동시켰다.
“……아.”
어쩌면 잠시나마 이성을 잃었던 그녀가 무심코 저지른 일일지도 몰랐다.
────끼리리릭.
술식은 시전자가 멈출 새도 없이 마력 신호에 반응했다.
쿵쿵쿵, 경기장을 둘러싼 벽에서 용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석재로 이뤄진, 고풍스럽게 뿔과 비늘이 양각된 용의 머리가 총 열둘.
그것들은 곧 콜로세움 중앙에 있는 목표물을 포착했다.
본래 이리엔이 상황을 봐가면서 하나씩 사용하려 했던 상급 마법 용포(??).
그 마법은 압도적인 마력을 집약시켜 일시에, 한 지점을 향하여 쏘아진다.
이리엔은 화들짝 놀라더니 서둘러 실드를 몇 겹으로 펼쳐냈다.
용들은 무심한 표정의 이진우를 향하여 아가리를 벌렸다.
브레스를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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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르르. 콜로세움이 터져나가는 굉음 대신 돌덩이가 무너지고 모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무렵,
이리엔은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그 앞의 손을 치워내었다.
“……허어.”
콜로세움 한복판에 생긴 구멍은 구덩이 수준 정도가 아니었다.
싱크홀과 비견될 정도로 아득하게 깊은, 육안으로는 결코 밑바닥을 바라볼 수 없는 구렁텅이가 생겨났다.
그 구멍의 깊이를 확인한 이리엔은 낮게 침음하며, 확신했다.
“……하하.”
죽였다.
죽여버렸다.
브레스로 흔적도 없이 없애버렸다.
“……저질렀네.”
그렇게 지껄인 이리엔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아마도 그의 소꿉친구인 혈사자가 자신의 앞에 저승사자처럼 찾아올 테지.
그렇다면, 그 이후의 일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할 것이 뻔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때문에 그녀는 광소했다.
시발.
저질러버렸어.
정말로 저질러 버렸다고!
“……흐흐.”
그렇게 슬피 웃던 이리엔은 어떻게 할까, 중국으로 망명이라도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심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불현 듯 어떤 발소리를 듣게 되었다.
타다다닥,
타다다닥,
타다다닥.
어디선가 들려오는 경쾌한 발소리에 이리엔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눈앞의 구렁텅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곧 빠르게 다가오는 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그녀는 마주할 수 있었다.
“……어? 아아아아──?”
──쏜살같이 눈앞에 다가온, 무려 과학의 정수가 집약되어 발화한, 그 순정의 불꽃을 머금은, 건담 의수를 장착한 닌자 이진우와 시선이 마주쳤다.
운명의 순간.
“……아이에에에에에엑!!!”
이리엔은 그 놀랍고도 두려운 광경에 질색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이진우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면상에 화권(火?)을 내질렀다.
데스매치 2차전의 시작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