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아무 말 없이
* * *
태양은 오롯이 하늘에 자리했다. 오연하게 제 아래 성대하게 쌓인 제단을 내려보았다.
언젠가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는, 분명 등선했다고 알려진 무인의 신을 기리는 제단.
그 앞에 정좌한 사내는 어떤 예도 취하지 않고서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한동안 제사상의 음식과 재물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내는 돌연 입을 열었다.
“지랄 났구나.”
백 명의 정예 무인이 한 놈을 잡지 못해 전부 별천지에 묻히고 말았단 어처구니없는 비보(??).
그 소식을 전달한 수하는 징벌을 두려워하여 몸을 벌벌 떨면서 부복했다.
사내는 그 볼품없는 모습에 눈가를 찌푸리고는 술을 마저 들이켰다. 탄식을 내뱉었다.
“대호(大虎)는 황충(??)으로 잡을 수 없는가.”
그리 중얼거린 사내는 수중의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빙그르르, 술잔이 매끄럽게 돌아갔다. 제 마음대로.
“……아니, 수가 부족한 게지.”
온몸이 구더기로 뒤덮이면 호랑이라고 해봤자 별다른 수가 있겠는가.
용이라면 모를까.
……탁.
궁주는 씁쓸한 표정으로 제단 앞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제대로 지켜보아라.”
원수를 갚는 친우의 모습을.
공멸(??)이 두려워 오랫동안 미뤄왔던 주술쟁이의 박멸을.
이윽고 멸망을 앞두고서 치르는 것이다.
추모(??).
대망(大?)은 흑색 바탕의 시야에서 누군가의 모습을 그려냈다. 자신은 결코 되지 못했던 인세를 벗어난 괴물이자 무의 화신. 이젠 아무래도 좋을 미련. 증오. 그것을 청산할 시간이다.
서걱.
칼을 뽑아 들어 제단을 베었다.
하늘을 베었다.
들끓는 야욕을 막아 세우던 마지막 둑을 무너뜨렸다.
그렇게 모든 것을 베어낸 궁(?)의 주인은 비로소 제단을 등지고, 제 앞에 도열한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지평선에 이를 정도로 셀 수 없이 늘어선 마(?)를 척결하기 위한 군대.
오랫동안 육성한 자신의 군대를 바라본 대륙의 황제는 기어이 선언했다.
진격하라.
그 군령을 따라─.
수만의 무인이 일보(一?)를 내디뎠다.
전쟁이었다.
* * *
“급보입니다! 급보!!!”
전령은 막무가내로 취조실에 들어오더니 아주 야단법석을 피웠다.
창의적이라 자부하는 내가 보기에도 테이블을 빙글빙글 돌면서 “우효! 우효!”거리는 모습이 영 정상적이지 못했다.
그런 정신없는 상황에 감찰관이 인상을 찌푸릴 때쯤, 전령은 다시 한번 큰 목소리로 외쳤다.
“짱개 새끼들이 온답니다! 미친놈들이 육해공으로 싹 다 쳐들어오고 있다고요! 전쟁이에요!”
별안간 들리는 흉보에 페페는 눈을 끔벅였다.
“……뭐?”
오랫동안 눈을 깜빡이며 고사한 것치고는 얼간이처럼 답할 뿐이었으나 그만큼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적(赤)급 이상의 인원은 모두 저녁 6시까지 로비로 모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두 분 다 서두르십시오!”
전령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왔을 때처럼 정신없이 취조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
“…….”
때아닌 정적이 흘렀다.
감찰관 페페는 멍한 표정으로 취조실 문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별안간 탁자를 쾅! 내리쳤다.
“젠장! 거의 다 된 건데!”
그렇게 외치며 부들부들 몸을 떨더니 번뜩 고개를 들고서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 ‘금화신공(???)’이 발동 중입니다. ]
‘뭘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참 유감스럽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간악한 녀석!”
감찰관은 울부짖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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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우 >
[ 등급 : 적(赤) ]
[ 직업 : 거상(巨?), 닌자(?者) ]
[ 특성 : 금화신공(???) 4성(成), 탈주닌자(???者) ]
[ 능력 : 거래(??), 매수(??), 매각(?) ]
[ 성향 : 중도(中?), 열혈(?血) ]
[ 근력 : 51(+16) ] [ 체력 : 52(+19) ]
[ 민첩 : 55(+24) ] [ 지혜 : 50(+5) ]
[ 마력 : 60(+10) ] [ 행운 : 80(+3) ]
[ 소지금 : 19, 420, 715, 836, 000 Go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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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에 표시된 나의 능력치는 던전에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진일보했다.
수많은 시련과 역경을 이겨낸 나의 자랑스러운 결과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거참, 닌자가 직업이라 해도 왜 그리 안 믿는지.”
내 진심과 열정에 세상과 상태창이 호응했거늘, 도무지 믿어주지를 않는다.
모든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도 사술을 부린다고 억지를 부리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특성이 탈주 닌자라고 왜 믿지를 못해!”
나는 마탑이 싫은데, 언제든지 퇴사할 준비가 돼 있는데, 그런데 무슨 스파이 같은 개소리를 하는지…….
행운이 80을 찍은 것치고는 참 재수가 없다.
나는 짜게 식은 눈초리로 인생의 걸림돌인 마탑을 스윽, 훑어보고는 그 앞에 침을 뱉었다.
혹시 경비가 보더라도 뭐라 하기에는 모호한, 정문에서 멀리 떨어진 흙바닥.
자존심과 귀차니즘의 화신인 마법사들이라면 쪼잔뱅이처럼 따지지는 못할…
“……님, 지금 여기서 뭐해요?”
“……허억!”
나는 닌자 방어 태세를 재빨리 취함과 동시에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것을 보면 분명 베테랑 암살자…!
는 아니고, 언제나처럼 마녀 정복 차림의, 금발 적안의 마녀 신혜영이었다.
“뭐야, 혜영이잖아.”
“뭐지, 뭔가 굉장히 기분 나쁜 말투네.”
신혜영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휘휘 젓는다. 한숨을 쉬는 꼴이 마치 못 볼 것을 본듯한 모습이다.
유한나의 비슷한 모습을 많이 봐왔던 나는 태연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신혜영은 그런 내가 얄밉다는 듯이 노려보았고,
“…….”
“…….”
한동안 아이컨택이 이루어졌다.
점차 시간이 흐르자 마녀의 경직된 얼굴이 흐물흐물해지더니 급기야 붉어지기 시작했다.
“…하, 내가 등신이지.”
신혜영은 돌연 눈을 질끈 감고서 뇌까렸다. 새빨개진 얼굴이 감기라도 걸린 듯해 걱정스럽다.
무어라 말을 걸려던 찰나, 한숨을 푹푹 내뱉던 신혜영이 흠칫거리더니 갑작스럽게 뒷걸음쳤다.
“혹시 몸이 안 좋”
“말 걸지 마세요!”
“…아니.”
“따라오지도 말고!”
신혜영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나운 표정으로 씩씩대고는 빠르게 발을 놀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신속화’라도 썼는지 순식간에 신형이 멀어진다.
그리고, 누구보다 말을 잘 듣는다고 자부하는 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흔들며 그 뒷모습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왜 화났지.”
다만 눈치가 조금 떨어지는 게 흠이었다.
*
내가 취조실에 갇힌 사이, 안내방송이 있던 것일까. 거리는 평소보다 부산스러웠다.
카페, 청과점, 미용실을 가리지 않고, 대낮부터 장사를 접으려는 듯 하나둘 셔터를 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짐을 잔뜩 싸 들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마치 피난민의 모습.
그 모습을 보니 전쟁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 체감됐다.
스마트폰의 SNS나 뉴스, 커뮤니티에서는 별다를 것 없이 일상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계 안의 사람들은 발 빠르게 도망치는 중이었고, 하늘에서는 전보가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해리포터가 이런 기분이었나.”
그러면 이곳은 호트와그의 포지션이 되는 걸까. 오, 그건 제법 마음에 드는데.
일반인들은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하지만, 정의를 추구하는 마법사들은 꿋꿋이 남아 악(?)에 맞서 평화를 얻어내는 것이다.
‘……운명인가?’
갑자기 가슴이 벅차올랐다.
비전투 직군이라면 뒤에 빠져도 될 테지만, 마침 닌자로 각성했다고 입을 털고 나오는 길이다.
이것은 닌자가 누구보다 정의롭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릴 절호의 기회──!!
“…는 개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서 피난 가는 어린아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마탑이 세워진 방향으로 달려가는 로브 차림의 마법사.
죄다 셔터를 내린, 그 어느 때보다 황량한 거리.
행복 혹은 활달함과 거리가 먼 광경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가라앉는 것은 필연이었다.
나는 오만상을 짓고서 아까 전 마녀처럼 발걸음의 템포를 올렸다.
보기 싫은 꼴을 외면하기 위해.
어느덧 내려앉은 입꼬리와 달리 주인을 닮은 심장만 눈치 없게 쿵쿵, 나대고 있을 뿐이다.
“…….”
나는 아직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었다.
***
“요, 왔어?”
아침까지만 해도 없던 소꿉친구는 더없이 밝은 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분명 출장을 다녀온 터라 피곤할 텐데도 그러했다.
그녀의 뒤쪽에 쌓인 짐들만 없더라면 평상시처럼 현관까지 나와 인사를 해주는구나 넘겼을 터다.
“…….”
내 눈길이 뒤쪽으로 가자 유한나는 슬쩍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뺨을 긁적였다.
나름 고위 인사니까 미리 지침이라도 전달받은 것일까.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하기 전, 혹여나 메테오 공습이라도 떨어지는 걸 감안해 미리 짐을 옮겨두라고.
아니, 그런 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있잖아, 진우야.”
유한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시선을 마주쳐왔다.
이따금 의견 차이로 말다툼할 때도 있지만, 언제나 나의 마음을 헤아려주던 친구.
그런 그녀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 머릿속을 꿰뚫는 듯했다.
“우리 도망갈래?”
소꿉친구의 고요한 눈동자 속에서,
흔들리는 동공이 보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