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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72화 (71/87)

〈 72화 〉 동침

* * *

죽음은 아득하면서도 필연적이다.

언젠가 반드시 닥쳐오는 일이며, 갑자기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불상사.

또, 결코 반길 수 없는 불행이기도 했다.

뭐든 즐기고자 하는 나조차 죽음을 좋아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우선 나부터가 죽는 게 싫었으니까.

꽃다운 이십 대 초반.

세상에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수많은 여행지와 음식점이 나를 기다렸다.

고전 명작과 미래에 출시될 게임들을 차근차근 플레이할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여자친구는 사귀어보고 뒤져야지.

모태솔로인 채로 땅에 묻히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를 죽이는 일 또한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죽거나, 죽이거나.

일반적으로, 내가 죽기 싫다고 다른 이를 무조건 죽여야 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나는 그 망할 놈의 이지선다를, 전쟁을 마주한 상태.

이렇게 곤란할 수가 있나.

게다가 나는 의외로 우유부단한 편이었다.

던전의 닌자나 성기사들을 죽이지 못해 제압으로 그쳤다.

나의 영원한 철천지원수일 이리엔조차 그 면상에 주먹을 날리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정기적으로 달에 한 대씩 때릴 수 있다면 소원이 따로 없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진짜로 죽일 만큼 밉지는 않았다.

어쨌든 나는 누군가를 죽인다는 각오가 전혀 돼 있지 않았고, 지금 꼬라지로 사람이 죽어 나가는 전쟁에 참여하는 건 우습고도 미친 짓이었다.

집에 박혀 있다가 한나와 함께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

그 사실을 나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나락행 비행기에 탑승한 까닭은 간단했다.

나의 소꿉친구 유한나가 되었건.

부모님을 모시려 전쟁터에 가는 효녀 신혜영이 되었건.

이따금 일하다가 옷깃 스쳤던 망할 직장 동료가 되었건.

내가 아는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 곱절로 좆같았으니까.

그래서 마침내 다짐했다.

만약 좆되는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옆의 멍청이 하나 정도는 빼내서 튀어보자는 참 안이한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 미련한 이유로 함께한 것이었다.

“야, 인마. 일어나.”

긴 비행시간에 걸쳐 목적지에 도착한 비행정.

안내 방송에 따라 이동하는 승객들을 곁눈질하며 옆자리의 신혜영을 흔들어 깨웠다.

“……흐에, 5분만 더.”

하지만 금발 적안의 마녀는 바로 일어나기는커녕 내 손을 쳐내더니 취침을 이어갔다.

“……이진우, 멍청이…말미잘…….”

영문 모를 잠꼬대.

내 어깨에 고갤 기댄 채로 침을 질질 흘려대는 건 덤이었다.

‘이거 오늘 처음 꺼낸 셔츠인데…….’

인터넷 배송으로 싼 맛에 시켰다지만, 첫날부터 화려하게 보물 지도가 그려졌다.

허허,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금은 또 행복한 꿈을 꾸는지 헤헤, 웃어대는 신혜영을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오랜만에 보는 녀석의 해맑은 얼굴과 점점 번지는 신상 셔츠의 얼룩.

만감이 교차하는 두 풍경.

나는 긴 고민 끝에 신혜영의 이마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손가락을 장전했다.

따악─!

발사했다.

“으헤에에에엑?!”

신혜영은 별안간 느껴지는 격통에 놀랐는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제 눈동자처럼 붉어진 이마를 부여잡고는 비명을 질러대며 허우적거렸다.

아아아아아악──!

그 상상 이상의 성량에 나는 화들짝 놀라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도 모든 승객이 빠져나간 뒤.

다른 사람한테 민폐 끼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다만, 그 말인즉슨 신혜영에게 멱살 잡힌 나를 구원해줄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

나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적안(赤?)을 마주했다.

***

셀베르크 마탑 본단.

영국 런던에 자리한 본부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새까만 탑이었다.

무언가 특별한 걸 원했던 내겐 식상한 비쥬얼.

하지만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 워낙 많은 탓에 그 감상을 온전히 느낄 틈이 없었다.

신혜영과 나도 그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인원에 속했으니까.

무작정 전쟁터로 쏘아 보내는 건 지성인으로서, 마법사로서 할 도리가 아니라나 뭐라나.

소속 확인.

제복 증정.

견장 부착.

유서 작성.

그 외 등등.

본격적으로 펼쳐질 난전에 앞서 아군이 서로를 분간하고, 각자가 어떤 각오를 다잡을 수 있도록 하는 과정.

마탑에 처음 들어왔을 때가 떠오르는, 그 바쁜 일정을 수천 명이 함께했다.

그렇다 보니 훨씬 정신이 사납고, 대기 시간이 길었다.

막 도착했을 때 점심이었던 게 숙소에 도착하니 심야가 되어 있었다.

“…….”

“…….”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는 이때까지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본부에 도착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너 짜증난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모두 꾹꾹 눌러 담은 채로 12시간째 묵언 수행을 이어간 것이다.

이게 정녕 장성한 성인의 모습이란 말인가?

저절로 고개를 갸웃거릴 만큼 대단한 인내심과 쪼잔함의 대결.

아아, 가슴이 웅장해진다.

처음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자신이 있던 나도 이 정도로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니 슬슬 질리기 시작했다.

슬쩍, 신혜영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양쪽 뺨이 잔뜩 부풀어 오른, 누가 봐도 마음에 드는 일이 있었던 듯한 부루퉁한 표정,

아, 이거 무조건 삐졌다.

그런 확신의 시선을 느꼈는지 신혜영도 고개를 돌리고는 샐쭉 가늘게 뜬 눈으로 마주 보았다.

우리는 서로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나는 장장 12시간 동안 참아왔던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너 삐졌냐?”

신혜영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한쪽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다시 집어삼키는 듯 자꾸만 입을 뻐끔거렸다.

그렇게 수많은 표정의 변화를 내보인 마녀는 곧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더니 내뱉었다.

“미쳤어요?”

“아니, 내가 왜 미쳐.”

“파이어펀치니 뭐니 죽빵 날려놓고 화 안 났으면 내가 마법사가 아니라 부처지.”

“네가 먼저 급소에 니킥 날렸잖아.”

가볍게 딱밤 한번 날렸을 뿐인데 그대로 고자가 될뻔했다.

물론 내가 가볍게 막을 만한 공격이었고, 설령 막지 못했더라도 알아서 멈췄겠지만.

“어차피 쓸 일도 없잖아요.”

“……쓸 일이 없기는 왜 없어. 반드시 쓸 건데 이상한 소리 마셈.”

“그런 헛된 기대하지 말라고 일부러 거기로 날린 거였는데 아쉽네.”

“……농담이지?”

“진심인데요?”

얼핏 봐도 짜증난 표정으로 지껄이는 신혜영.

그 모습에 갑자기 소름이 돋은 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저것도 농담이겠지?’

분명 그럴 것임에도 두렵다.

지금 내 하체를 노려보는 마녀가 새삼 미심쩍게 느껴졌다.

설마 자는 사이 짓밟는다든가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나 그런 취향은 없는데.

돌연 샘솟아나는 불안감을 느낄 무렵, 신혜영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시끄럽게 하지 말고 그냥 좀 자요.”

“무슨 속셈으로 그런 말을 내뱉는 것이냐! 내가 자는 사이 무슨 짓을 하려고!”

“……아니, 속셈은 무슨. 그냥 좀 자라고! 여기 당신 혼자서 쓰는 방 아니거든요?!”

그랬다.

마탑 본부라는 곳은 수천 명의 마법사를 한 번에 수용할 여력이 안 되는지 우리를 2인 1실에 밀어 넣은 것이다.

2층 침대도 아니고 트윈룸이라 바로 옆 침대에 누운 상대를 노려보면서 티격태격 싸울 수 있는, 애매하게 쾌적하고 넓은 방.

‘인프라 개구려.’

그래도 비록 신혜영이지만, 금발 적안 미소녀와 같은 방을 쓴다는 게 유일한 장점일까.

‘……잠깐. 한나 말고 다른 여자랑 한 방에 있는 것 자체가 처음 아닌가?’

어라, 갑자기 심장이 진짜 두근대는 것 같기도 하고?

나 지금 미소녀와 침대는 다르지만, 같은 방에 누워 있어?!

두근─두근─

슬며시 눈을 감고서 온몸을 울려대는 심장박동을 느꼈다.

***

‘……뭐지?’

금발 적안의 마녀는 순식간에 조용해진 방 안에 극도의 긴장감을 느꼈다.

먼저 조용히 좀 있자고 말했다지만 그 이진우가 정말로 조용해지다니.

내일 해가 북쪽에서 뜨는 것일까.

아니면 무슨 불행이 닥치는 플래그가 꽂히고 만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신혜영은 문득 가슴에 손을 올렸다. 쿵쾅쿵쾅, 심장이 격렬히 날뛰고 있었다.

비행기 딱밤부터 시작해 방금 말싸움까지 정신이 없던 터라 뒤늦게 깨닫고 만 것이다.

‘……지금 나, 최대 위기……아니, 최대의 기회를 맞이한 건가?’

알코올을 들이마셔서 제정신이 아니게 된 것도 아니고, 업무 중도 아니다.

심지어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밀실인 지금.

개멍청이 이진우와 진솔한 대담을 나눌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쾅! 쾅! 쾅! 쾅! 쾅쾅!

그 사실을 깨달은 심장은 점차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났다.

신혜영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서 아주 조심스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시야에 목욕 가운만 입고서 침대에 누운 이진우가 들어왔다.

“……크그그커겅! 퓌유우…크그그거겅! 퓌유우…”

아주 태평하게 자고 있었다.

“으음.”

그래, 그럼 그렇지.

신혜영은 긴장감이 확 가시는 걸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침대에 가지런히 몸을 눕혔다.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렸다.

내일을 위해 자야 하는 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아.”

그 사실을 알았음에도 자꾸만 한숨이 나오는 건 어째서일까.

어째서 저 남자는…….

궁시렁대던 신혜영은 옆으로 몸을 돌려 반대편 침대에 대자로 뻗은 이진우를 눈에 담았다.

참 태평히도 잤다.

저 사람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불현듯 떠오른 의문에 신혜영은 피식 웃었다.

그야 둘 다 바보니까.

“…….”

신혜영은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내뱉고 두 눈을 감았다.

새까만 어둠이 그녀를 맞이했다.

마녀는 빌어먹을 이진우를 머리에서 지워버리고 오직 잠만을 탐했다.

마침내 잠이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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