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진짜 조졌네
* * *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샤오팡은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봤다. 언제부터 자신의 삶이 어그러졌을까.
무술의 재능이 제 아비의 기대에 못 미쳤을 때?
별궁을 제멋대로 탈출한 게 잘못이었나?
아니면 곧이어 들어간 마탑을 때려친 것이?
어쩌면 꼴에 잘살겠다고 빌런 우두머리를 맡았던 게 잘못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애초에 잘못된 건 없는 게 아닐까. 과거 따위 사실 상관없는 게 아닐까.
곧 만날 수 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행복하지 않은가.
나는 행복해.
그래, 지금 나는 행복했다.
당장 앞길을 가로막는 악마만 처리하면 해결될 문제였다.
그래, 그러면 될 뿐이었다.
샤오팡은 미소를 머금고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에 검을 만들어 쥐었다. 마력으로 빚어진 검은 투박하지 않았다. 튼튼하고, 예리했으며, 오랜만에 마주했음에도 친우처럼 느껴졌다.
“좋다.”
왜 진작 이러지 못했을까.
그랬다면 이렇게 멀리 돌아올 필요도 없었을 텐데.
샤오팡은 새삼 아쉬움을 느끼면서 고개와 검을 들어 올렸다.
정면을 응시했다.
온통 핏물로 붉게 물든 세상.
자신의 마력으로 장악한 영역을 멋대로 덧씌우는 현세대 최강의 마법사.
혈사자가 살기를 내뿜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넌 뒤졌어.”
그 악귀는 오랜만에 보아도 입이 험했다.
“……하하.”
샤오팡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꼈다.
살기에 압도된 것은 아니었다. 오래도록 바랐던 만남이 성사된 것에 만족감과 희열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서 냉막한 시선으로 자신의 적을 바라보았다.
“너야말로.”
죽게 될 거야.
***
일반인에게 이능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 절대적인 법칙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능력자는 결계를 펼쳤다.
심지어 운신할 때도 간이 결계를 펼쳐 모습을 숨겼다.
다만 완벽하게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투명해졌을 뿐이지 냄새나 발자국 같은 흔적이 남았다.
문도 함부로 열 수 없었다. 혼자서 끼이익, 열리는 꼴이 될 테니까.
아주 뛰어난 마법사는 그런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간이 결계 수준에 그친 무인들로서는 별도리가 없었다.
자신들의 몸에 덧씌워진 간이 결계를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수단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일반인이 있는 자리에서 발각되어야 한다던가, 발동하기 번거롭다는 단점에도, 예전부터 간간이 사용되던 방식은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므로 무인들이 그 대처에 신경을 쏟은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느새 무인이 공격하고, 마법사가 막는 구도가 당연하다고 여겼기에 그 공격을 어떻게 잘 해낼 수 있을 지가 최대 관심사였다.
“어? 뭔가 이상한데.”
“뭐가.”
“아니, 저기 하늘이…….”
고위 마법사라도 간이 결계를 무력화하는 것이 아니라 드넓은 지역의 결계를 걷어내는 일은 매우 어렵다.
심지어 부수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의 구역에 자연스레 들어가는 것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랬기에 방심했으리라.
설마 수천에 달하는 마법사가 제 앞마당에 나타나리라곤 감히 상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것도 텔레포트로.
한순간에,
쩌저저적─!
하늘이 갈라졌다.
[ 매스 텔레포트 ]
그렇게 반으로 갈라진 하늘이 수천의 마법사를 대지에 뱉어냈다.
몇몇은 유성우처럼 무신궁 곳곳에 날아갔으나, 대다수는 관문 앞에 떨어졌다.
궁 내부의, 중첩하여 펼쳐진 결계까진 완벽하게 뚫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성공적이었고, 위협적이었다.
단 한 명이 공성 병기로 자리할 수 있는 적급의 마법사.
그런 정예 인원이 적어도 수천. 어쩌면 일만을 넘길지도 모르는 대군이 눈 깜짝할 사이 관문에 나타난 것이다.
그 관문 뒤가 바로 무인의 성지이자 주요 거점인 무신궁의 내부였다.
“……이런, 미친!”
초병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서는 경고등을 곧바로 누르려 했다.
그것만이 살길이라는 듯 온몸을 던져 내리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역부족이었다.
“……커억!”
단 한 번도 침입을 허락하지 않은 무신궁.
중원 넓은 반경에 걸쳐 경계를 확실히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제 앞마당에 적군이 나타난 지금, 마침내 취약점을 드러냈다.
애초부터 마법사의 출입을 엄격히 규제하였기에 결계를 제외하고, 억제력 높은 수단이 강구되지 않은 관문의 성벽.
도저히 인간의 몸으로서는 넘을 수 없는, 드높은 성벽과 적급 인원의 감시 체계가 존재했으나 상대가 좋지 못했다.
탑주가 잠적하고, 대원로는 탑 내부 행정에 힘을 쏟는 가운데──
마법사 중 최강으로 손꼽히는 혈사자 유한나와 흑룡 마르쿠스.
원정대장 마르쿠스는 순식간에 거인의 키보다도 높은 성벽을 뛰어넘었다.
어떤 마력 방해의 수단도 잠깐의 움직임을 막지 못했다.
그렇게 성 위에 올라선 마법사의 대장은 초병을 일수에 격살했다.
서걱─
모든 인간이 단칼에 잘려 나갔다.
무신궁에 돌입한 지 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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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의 모든 인원이 경고등조차 누르지 못하고 몸을 허물어뜨리는 시점이었다.
이후 마르쿠스는 파괴 행위를 자제하고 정상적으로 성문을 열어젖혔다.
수직선상으로 바닥을 부수고 내려갔다면, 훨씬 빨랐겠지만 되도록 마력과 소음이 새어나가지 않기 위함이었다.
높은 놈들은 이미 눈치챘겠지만 어디 뒤늦게라도 대응해보라지.
앞으로 수십 초면 마법 세례가 궁 내부를 휩쓸 예정이었다.
“좋아, 다 쓸어버리자.”
흥분, 희열, 긴장감, 침착함.
그렇게 마법사 군단은 갖가지 감정을 지닌 채로 무인의 본거지에 발을 들이밀었다.
손안에 ‘마법’이라는 폭탄을 하나씩 제조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마찬가지로 수뇌부를 치기 위해 나아가려던 원정대장 마르쿠스는 문득 당부받은 사항을 떠올리고 전체적으로 일동을 둘러보았다.
‘아, 이진우, 이진우, 이진우.’
그 유한나가 자신의 소꿉친구를 잘 좀 봐달라고 부탁했다.
귀하신 원정대 길잡이님의 부탁이다.
웬일로 정상적인 부탁이기도 하고, 격전지에서 빼는 것 정도는 가능했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다 같이 몰살당하는 지경에 이르면 어쩔 도리가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신경 쓸 생각이었다.
그래, 그랬건만…….
‘……으음, 왜 없지?’
제대로 돌입하기도 전인데 왜 벌써부터 없을까.
마르쿠스는 불현듯 하늘에서 튕겨 나간 소수의 유성우를 떠올렸다.
아, 설마……
어떤 불길한 예감에, 마르쿠스는 침울한 표정을 짓고서 한숨을 내뱉었다.
조졌네.
***
“이런 시발.”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그렇게 강하다는 원정대장과 마법사들의 군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의 가이드, 신혜영조차도 곁에 없었다.
보이는 건 오직 기다란 성벽과 곳곳에 걸린 채로 타오르는 횃불들.
아무래도 내부에 먼저 들어오게 된 모양이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다 터뜨리면서 와 주지 않을까, 잠깐 기대했지만 생각해보니 궁 내부가 더럽게도 넓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초토화시키며 나아가는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잡혀 뒤지는 게 빠르겠지.
그렇다면 내가 당장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2가지였다.
어디 외진 곳에 숨어서 존나 버티던가.
아니면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개같이 돌격해서 심부에 숨어들던가.
절대 무쌍할 자신은 없었기에, 아무튼 어딘가에 숨어야만 했다.
콰가가가강──!!
저 멀리서 섬광과 굉음이 일어났다. 본격적으로 공세가 시작된 것일 터다. 그래, 저렇게 크게 한 방 먹이고 가는 건 좋은데…….
“조졌네.”
나는 조졌다.
일단 폭발인지 뭔지, 무슨 마법이 펼쳐졌는지도 모를 만큼 거리가 멀었다.
아군과 나의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확실시되는 순간이었고.
위이이잉─! 사방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상대가 본격적으로 대응하는 시작이었다.
‘나 숨게 10분만 늦게 쏴주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샤사삭 은밀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건물 바깥에서 발각되면 바퀴벌레처럼 몰려오는 애들한테 쌈싸먹힐 게 분명했으니 어디라도 숨어 들어가야만 했다.
소리 없이 움직이면서 들어갈 만한 건물이 어디 없을까 빠르게 물색했다.
[ 특성 ‘탈주닌자’가 움직임을 보조합니다. ]
지금 이 순간, 내가 탈주닌자라는 사실이 이토록 자랑스럽고 감사할 수가 없었다.
어둠에 휩싸인 채로 움직이는 재주가 없었더라면 진작 잡혔을 테니까.
곳곳에 피어오르는 횃불이 점차 주위를 옥죄어 오고 있었다.
진짜 좆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쯤, 어떤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부가 밝고, 급하게 움직이는 인영이 보이는 타 건물과 다르게 어둡고 마력 유동도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미묘하게 오래된 듯 허름하고, 크기도 큰 것이 숨기 딱 적당해 보이는 건물.
‘완벽해.’
그 운명처럼 다가온 도피처에, 나는 반색하면서 뛰어 들어갔다.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와중에도, 문득 현판의 글자가 보였다.
[ 대망大? ]
이무기의 궁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