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연적(??)
* * *
녹(?)황(?)적(赤)흑(?).
무인과 마법사를 불문하고 상태창을 지닌 이라면 반드시 구분되는 위계.
높은 경지로 나아갈 때 마주하는 커다란 벽이라 해도 좋았다.
그 벽을 넘어서면 다른 세상인 것 마냥 극명한 차이가 있었으므로.
땅을 기는 이와 하늘에 닿은 이 사이의 격차를 고작 4개로 나누었으니 그 간격에 어마한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하위의 등급이 상위 등급을 이기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같은 위계라고 동등한 것은 아니었다.
비단 하늘은 높고 넓다 보니 각 위계의 간격만 큰 게 아니라 동 위계 내에서도 ‘격’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세계에서 한 손안에 드는 마법사 샤오팡과, 신의 사도이자 제일가는 마법사이자 무인인 유한나의 격차가 그러했다.
──────────────────
< 유한나 >
[ 등급 : 흑(?) ]
[ 직업 : 성녀(??), 사도(??) ]
[ 특성 : 초월체(???), 전신(戰?), 신력(?力), 대제사장(大???)…… ]
[ 능력 : 초월(??), 운명(??), 인연(??), 즉결심판(???)…… ]
[ 성향 : 중도(中?), 철혈(?血) ]
[ 근력 : 99 ] [ 체력 : 99 ]
[ 민첩 : 99 ] [ 지혜 : 99 ]
[ 마력 : 99 ] [ 행운 : 57 ]
──────────────────
──────────────────
< 린 샤오팡 >
[ 등급 : 흑(?) ]
[ 직업 : 흑마법사(????), 사도(??) ]
[ 특성 : 계약자(??者), 신력(?力), 환상(??), 대붕(大?)…… ]
[ 능력 : 위장(?), 계약(??), 흑마법(???), 즉결심판(???)…… ]
[ 성향 : 악(?) ]
[ 근력 : 82 ] [ 체력 : 84 ]
[ 민첩 : 78 ] [ 지혜 : 99 ]
[ 마력 : 99 ] [ 행운 : 28 ]
──────────────────
‘……흑마법사에, 사도, 계약자라.’
유한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푸른색으로 변한 그녀의 눈이 오롯이 연적과 그 상태를 주시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도끼와 낫은 착실히 빙글빙글 돌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어쩐지.”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손을 몇 번 섞어보니 알 수 있었다.
못 본 지 얼마 되었다고,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실력이 늘었다.
그녀가 한 걸음을 나아갔을 때, 거의 세 걸음을 내디딘 격으로 성장했다.
높은 경지일수록 성장이 어렵다는 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성장 폭이다.
단지 그 성장의 원천이 편법인 게 문제일까.
‘뭐, 유물 연구도 제 역량이니 편법도 아닌가.’
분명 ‘영옥’이라 했던가.
당시 스치듯이 보았던 녹색 보주를 떠올리면서, 유한나는 혀를 찼다.
그 유물의 잔향이 은은히 느껴지는 걸 보면 그게 성장의 매개일 터다.
귀속된 유물로 보이길래 굳이 빼앗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까 파괴하는 게 옳았다.
편법은 아니라도 병신 같은 길을 선택한 건 맞는 듯했으니까.
‘흑마법사’
이능력자는 각성 시 어떤 직업이건 부여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흑마법사라는 직업을 얻었더라도 딱히 멸시받거나 하진 않는다.
모든 흑마법사가 사람 시체를 가지고 장난치는 건 아니었으니까.
마탑에 소속돼 건전한 활동을 펼치는 흑마법사는 많았다.
하물며 유한나의 원정대에도 2명이나 속해 있을 만큼 인기가 많은, 이른바 메이저 직군이었다.
……하지만 마법사가 각성 이후 선택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거기에 사도와 계약자라는 옵션까지 달려 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이계의 악마와 계약을 맺고, 그 사도가 되었다는 뜻이었기에.
“곤란하네.”
유한나는 피식 웃었다.
눈앞의 연적은 영혼을 팔았다. 어떤 소원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
도대체 얼마나 간절했기에 그런 것일까.
어째서인지 짐작이 되어서, 참으로 유쾌하면서도 불쾌했다.
“미친년은 나 하나로 족하거든!”
그리 외치며, 유한나는 빙글빙글 돌리던 도끼를 툭, 하고 던졌다.
부웅! 부웅! 도끼는 관성에 따라 정면 방향으로 세차게 날아갔다.
그 경로상에 고인 핏물을 머금으며 이미 성인만 하던 몸집과 기세를 더욱 키워나갔다.
목표는 연적의 머리통이었다.
‘투척.’
그에 대응하기 위해, 샤오팡은 곧바로 두 손을 모으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제물 공양을 위해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터라 재료는 차고 넘쳤다.
주문을 외웠다.
─대장벽(Grand Wall)
삽시간에 해일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거대한 피의 파도가 솟아올랐다.
높이 솟아오른 피의 파도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바닥에 쏟아지지도 않았다.
마력에 의해 경화(?化), 또다시 강화되어 피의 장벽이 되었다.
이내 도끼가 부닥쳐 콰앙! 둔중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벽에는 자그만 금조차 나지 않았다.
상대가 그 혈사자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쉽게 막아낸 상황.
그 말인즉슨 후속 공격이 온다는 것이었다.
콰드드득, 대지가 울렸다.
불현듯 느껴지는 막대한 마력과 불길한 기운에, 샤오팡은 데자뷰를 느꼈다.
그때는 팔이 베였었던가.
그녀는 은연중에 떠오른 기억에 슬며시 미소를 짓고는 수인을 맺었다.
바람이 불었다.
샤오팡은 어느덧 자신의 머리 위의, 거대한 낫을 내리치려는 유한나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거센 바람과 여러 굉음과 장벽 부서지는 광경이 뒤늦게 감각에 잡혔다.
탕! 탕! 탕! 탕!
핏물 고인 바닥이 쏟아내는 투사체가 잠깐이나마 그녀를 엄호해주었다.
자동요격시스템.
주인의 위험을 깨달은 마법이 알아서 침입자를 막아낸 것이었다.
하지만 도망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
악귀는 태연하게 탄환을 모두 쳐내고, 다시 낫을 내리치려 하고 있었다.
그에 샤오팡은 환하게 웃으며, 기꺼이 제 목을 내주었다.
핏물이 흩날렸다.
너무 쉽사리 떨어지는 머리를 보면서 유한나는 깨달았다.
“디코이(Decoy).”
그게 옳다는 듯 그녀의 발밑에 그려진 오망성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시가지에 고여 있는 모든 핏물이 끓어 올랐다.
유한나는 인상을 구겼다.
쾅!
터졌다.
***
쾅!
콰앙!
콰아아아아아앙!
“…….”
어느덧 17번째.
디코이폭발도주의 연계가 언제쯤 끝날까 슬슬 지겨워지는 시기였다.
유한나는 떫은 표정으로 핏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할 건데, 미친년아…….”
본래 유한나는 정면 승부에서 질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상대가 전혀 응해주질 않는다.
정확히는 싸울 것처럼 살랑거리다가 튀고 덤비고 하는 것을 반복 중.
압도적인 육체·마법 능력을 지닌 그녀가 이제껏 잡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분명 수준 차는 있었으나, 상대는 정상급의 인원이었고, 그런 이가 공격을 막고 도망치는 데에만 온 정성을 쏟으니 영 잡기가 힘들었다.
‘영역’을 펼치고, 디코이로 도주, 함정을 발동해 눈을 가린 뒤, 거리를 벌리고 다시 응전 태세에 임한다.
그 과정을 반복하는 것으로 힘을 빼려는 수작도 아니었다.
그야 디코이를 부수고 따라가는 과정에서 드는 마력보다 곱절은 되는 마력이 도주 과정에서 쓰이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봐도 상대만 손해였다. 게다가 그 손해가 17번이나 반복된 지금.
이쯤 되니까 뭔가 속셈이 있을 거라는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었다.
정확히 무슨 속셈인지를 몰라 기다릴 뿐이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자유의 날개(The Wings Of Freedom).”
샤라락, 유한나의 등에서 하얀 날개가 펼쳐져 나왔다.
박쥐와 같은 피막보다는 조류처럼 깃털이 달린 부류의 날개.
굳이 따지자면, 은은한 휘광을 품고 있는 것이 천사에 가장 가까웠다.
[ 운명(??) 3단계를 발동합니다. ]
그렇게 디버프 관련 대책으로 2가지의 절대적인 수단을 펼친 유한나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변수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환상이나, 정신적인 트랩은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위협적인 징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마력 감지와 ‘운명’을 통해 저 건물 너머 샤오팡이 숨 죽여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이 또한 17번은 경험한 일이라 대수롭지 않았다. 유한나는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긴장은 풀지 않고서.
환상계 마법사 중 수위를 차지한 마법사가 굳이 자신의 주류 마법인 혈마법(血??)만 사용하는, 어떤 이유가 있을 테니까.
전쟁의 사도가 신에게 허락받는 권리이자 영역, ‘즉결심판’을 굳이 모방한 까닭도.
‘귀찮네.’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 느껴졌다.
어떤 노림수가 있으니 이런 개짓거리를 수없이 반복하는 것일 터다.
유한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저 멀리 넝마가 된 샤오팡을 노려보았다.
……디코이는 아니다.
분명한 실체. 자신이 다가가면 그제야 디코이로 도망치고, 함정 마법을 뿌리려는 속셈인 게지.
그래서 유한나는 이번에도 녀석의 머리를 깨부수려 천천히 걸어갔다.
이윽고 거의 다다랐을 때, 망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내려찍으려는 찰나였다.
“……어?”
유한나는 갸웃거렸다.
파각! 하고 박살나는 샤오팡의 머리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번에도 디코이다.
단지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뭐야, 시발, 어디 있어.”
본체가 어디 있는지 아예 느껴지지 않았다.
노벨피아 유
도망친 것이다.
유한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얼굴을 찌푸리고서 곧바로 추적하려 했다.
끼기기긱─!
그러나 막혔다.
“……?”
‘즉결심판’ 영역 자체를 공물로 하여금 만들어진 결계에 의해서.
뭐야, 시발. 이거 언제 했어.
고작 몇 분만 투자하면 뚫릴 만큼 급조된 결계. 하지만 그 잠깐의 시간이 문제였다.
“이런, 시발.”
어째서 ‘운명’이 이걸 감지 못했는지 당황스러운 것도 있었고, 이진우와 연결된 인연의 실이 살살 흔들려 왔다.
유한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결계 파훼에 온 힘을 쏟기 시작했다.
***
투욱,
마침내 고향에 내려앉았다.
샤오팡은 회한이 담긴 눈빛으로, 죽음의 음성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궁전을 둘러보았다.
종류는 다르지만, 예전처럼 삭막하구나.
그녀는 쓰게 웃으며, 불길하게 발광하던 옥석을 세상에 풀어 놓았다.
툭,
대지에 재앙이 떨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