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주인님의 뜻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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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리엔입니다.
저도 한때 지원본부 팀장이라는 직함과 남부럽지 않을 재산이 있었습니다.
워라밸? 퇴근? 그런 시답잖은 걸 걱정하던 평화로운 시절이었지요.
물론 지금은 질겅질겅 가죽 재질의 개목줄을 찬 노예가 되었답니다.
딸랑딸랑 울리는 방울도 달려 있어요.
처음에는 혐오스럽기만 했는데, 이제는 없으면 어색할 만큼 익숙해져 버렸답니다.
뜀박질할 때마다 경쾌하게 울리는 방울 소리가 아름답기 그지없네요.
미친 주인 덕에 사족보행을 기본 옵션으로 깔고 다니는지라 제가 인간인지, 아니면 정말로 개가 된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인간인가, 개인가.
소크라테스, 플라톤.
고대의 철학자들도 전혀 파고들지 않았을 법한 주제를 요즘 제가 달고 산답니다.
하지만 그런 고뇌조차 사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쌍년, 딱 기다려.”
그 영문 모를 말과 함께 주인은 사라졌고, 저는 며칠간 폐허에 유기당했습니다.
개목걸이(봉쇄구)로 인해 제자리에 꼼짝없이 묶여 있어야 했지요.
자유의지 없이 아사 직전까지 다다랐던 처량한 제 신세를 이해하실는지요.
죽기 직전, 주인이 돌아온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제멋대로 떠났다가 돌아온 주인은 당연하다는 듯 제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멍멍아, 당장 우리 자기 못 찾으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알겠어?”
“멍멍!”
시발, 짐승은 제 목숨이 자기 게 아니구나.
새삼 불합리한 현실을 깨달았지만 어쩌겠어요. 까라면 까는 거지.
개소리를 왕왕, 지껄이면서 미친년의 짝사랑인 미친놈을 찾으면 되는 겁니다.
그래요, 뭐 어쩌겠어요.
원래도 강자존이던 세상이 좆되면서 더 좆같이 변해버렸는데.
개는 그냥 개처럼 살면 됩니다.
주인님의 뜻대로 짖으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왈왈!”
이리엔은 짖었다.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네 발로 땅바닥을 딛고서 개처럼 짖었다.
몸뚱이와 옷을 걸친 행색만 인간일 뿐이지, 거의 개가 빙의한 모습이었다.
“…….”
그 비인도적이고 살벌한 광경에 원정대장 마르쿠스는 침묵했다.
일단 이 미친 공간에서 나가게 해줄 수 있겠느냔 이야기를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안전사고가 발생하거나 전투 과정에 손실이 있었다고 해서, 원정대의 톱인 그가 개가 되는 일은 없을 터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자신도 저런 꼴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는 살짝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내 자기 어디 있냐니까?”
어쩌면 굉장히 많이.
“……어.”
마르쿠스는 뻐금거리며 대답을 신중히 골랐다.
곧 내뱉을 몇 마디에 자신의 운명이 달려 있단 것을 직감했기에.
과연, 원정대의 동료이자 현 시국에 얼마 남지 않은 고위 마법사를 개처럼 굴릴 것인가.
그런 의문을 기꺼이 파괴할 수 있는 이가 눈앞의 여성이었다.
전쟁의 사도, 유한나.
순백의 사제복을 걸친 그녀에게는 여러 별명이 존재했다.
이를테면, 동방에서는 피로써 제사를 지낸다고 하여 혈사자(血?者).
서방에서는 그녀가 전쟁에 특화된 사도라는 점을 주목해 발키리(Valkyrie)라 불렀다.
그 별명으로부터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우선 그녀의 강함이 하늘에 닿았다는 것.
사람을 죽어라 잘 팬다는 것.
거기에 사도라는 점까지 더해 죽은 사람 묻는 데 굉장한 일가견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짱구 굴리지 말고 그냥 말하라니까?”
강제 제사의 스페셜리스트 유한나.
그 여인이 인상을 구기자 장내의 모든 이가 침을 꿀꺽 삼켰다.
특히 원정대장이자 안전사고의 주범 마르쿠스는 등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생존의 위험을 알리는 경종이 그의 머릿속에서 세차게 울렸다.
‘……어쩌지, 어쩌면 좋지?’
유한나에겐 진위를 확인하는 능력도 있는 터라 거짓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저 진실을 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아, 네 친구는 처음부터 안전사고에 휘말려서 저편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영 모르겠네?
‘……라고 대답하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두렵다, 어떤 개 같은 짓을 당할는지 너무나도 두렵다.
설마 동료한테 죽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마르쿠스가 새롭게 찾아온 위기에 떨고 있을 무렵,
“……왔구나, 계집.”
별안간 메마른 음성이 울려 퍼졌다. 미약한 소리였음에도 너무도 선명히 들려왔다.
유한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 경로에 있던 까닭으로,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육마(??)는 몸을 흠칫 떨었다.
이전 기습 작전 때, 육마의 일원인 색마(色?)가 그대로 반토막이 난 것은 그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것도 일수(一手)에.
여자가 상대라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리라 공언했던 색마.
눈앞의 여인은 상성도 나쁜 무신궁 최대전력을 단번에 격살시킨 괴물이었다.
본래도 위명이 자자했으나, 최근 위험도가 더욱 올라간 요주의 인물.
하물며 모든 무인의 기력이 바닥친 현 상황에는 더욱 그러했다.
무인들은 각자 자세를 잡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녀를 경계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바로 달려들 수 있도록.
반면 전쟁의 사도는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병기를 겨눈 이들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잡아보라는 듯 찰랑거리는 인연의 실을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그녀의 발길은 이윽고 자신을 경계하며 기립한 무인들 가운데, 홀로 힘없이 드러누운 노인 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멈추었다.
마법사들의 최대전력은 그 반송장을 조용히 훑어보았다.
외팔이, 온몸에 상처투성이. 거기에 선천 진기는 진작 바닥난 지 오래. 이제껏 살아 있는 게 용할 만큼 엉망인 몸뚱어리였다.
유한나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뇌까렸다.
“이게 누구야, 마법사도 아니면서 골방에 틀어박힌 노친네잖아. 혹시 내가 죽이러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거야?”
“……말뽄새하고는, 노인공경도 없는 게냐.”
“적장끼리 만났는데 무슨 공경이 있겠어, 그냥 싸우면 되는 거지.”
“……그래, 옳다, 그게 맞는 게지.”
“맞긴 뭐가 맞아. 며칠 사이에 중성화 수술이라도 하셨나. 왜 이리 패기가 없어졌어.”
그 말에 대망(大?)은 허허, 너털웃음을 짓고는 손을 내저어 주위를 물렸다.
혹시 참사가 벌어질까.
금방이라도 달려들 태세이던 무인들은 어쩔 수 없이 지존의 명에 따라 거리를 벌렸다.
그 멀어지는 이들에는 궁주의 최측근인 육마도 포함되어 있었다.
최소한의 호위조차 거둔 것이다.
유한나는 눈가를 꿈틀이고는 주위에 간이 결계를 펼쳤다.
그러자 누구도 내부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초월에 닿은 두 괴물의 대담은 제법 오랜 시간 이어졌다.
안면도 없는 사이면서 무슨 이야기를 그리 오래 나누는지 쉴 새 없이 입이 움직였다.
그렇게 수 시간에 걸쳐 대화가 이뤄지니, 소리 없이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결국 끝에 다다르기 마련이다.
멍하니 보고 있던 무인은 별안간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한나가 돌연 창을 빚어냈다. 그 핏물처럼 붉은 창을 붙들고 어깨를 당겼다. 그대로 아래에 내리꽂을 것처럼.
“……저, 저 미친!”
마찬가지로 그 상황을 인식한 무인들이 경악하며 헐레벌떡 달려들었다.
지존을 구하려 몸을 던졌다.
턱없이 모자랐다.
드드드득!
늑골과 심장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붉은 선혈이 튀었다.
뚝뚝, 피가 떨어졌다.
제사장은 두 눈을 감고 기도했다.
“아버지, 어린양을 돌보소서.”
공물을 받으시옵소서.
*
“있잖아, 혹시 다음 생에도 나랑 만나면 친구 할 거야?”
“갑자기?”
“그냥 궁금해서. 기억을 잃어도, 다른 상황에서 만나도 우리가 친해질 수 있을까 싶어서.”
“으음, 만나면 무조건 친해질 것 같은데.”
“어째서?”
“……그렇게 꼭 이유를 물으면 말이지.”
이진우는 쓰게 웃으면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뇌야, 어서 적당한 이유를 떠올리렴.
속으로 그리 되뇌며,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모여 있는 제 친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일단 외모에서 상당한 가산점이 붙었다고 말하면 너무 속물로 보일까.
혹시 화내려나?
그런 걱정으로 비슷한 이유를 전부 폐기한 끝에, 그는 기어코 그럴듯한 이유를 떠올렸다.
급하게 꾸민 변명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러리라 생각하며 이야기했다.
“너는 상냥하니까, 우린 분명 친해질 거야.”
그 말에 여인은 순간 경직된 표정을 지었다가 곧 배시시 웃어 보였다.
“입 발린 소리 하기는. 나, 아무한테나 상냥하게 안 해.”
“적어도 나한테는 잘 해줬잖아.”
“……다음 생에는 너 큰코다칠 거야. 반드시 그럴걸?”
“무섭구만.”
남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뭐가 그리도 유쾌한지 시선을 마주치면서 실실 웃어댔다.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오직 둘만이 서로를 마주했다.
“…….”
“…….”
어느덧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남녀는 여전히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 사이의 간격이 줄어들었다.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툭,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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