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83화 (82/87)

〈 83화 〉 죽이자

* * *

솨아아아─

물줄기가 떨어진다.

뜨거움과 미지근함, 그 사이의 따뜻함이 이마를 타고 온몸에 흘러내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빈다. 미약하게나마 남았던 졸음과 피로를 지웠다.

“……아.”

이제 좀 살겠네.

이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침실에서의 일이 불행과 고난이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심장에 좋지 못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살갗이 스칠 때마다 심장이 떨어지는 듯했으니까.

순간 어떤 기억이랄까.

침실에 있을 그녀를 떠올리려던 그는 이마를 탁, 치고서 눈을 감았다.

“……돌겠네.”

세상에, 알몸이라니.

21세기 경건한 시대에 성인 남녀 둘이서 껴안고 자다니, 정녕 말이 되는 일인가.

아니, 말이야 되겠지만, 그게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불의의 사고라 변명할 수도 없었다.

잠이 깨고 나서도 한참을 붙어 있었으니 여지가 없었다.

……어쩌면 최근 그녀가 너무 편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그들의 일과를 보면 ‘동거’라 해도 무방할 만큼 온종일 함께 있었다.

단둘이 오랫동안 한 공간에 생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족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이라 할 수 있을 십년지기 유한나와도 이런 적은 없었다.

이건 베스트 프렌드 같은 ‘친구’의 범주 내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나는 그녀를 연인으로서 바라볼 수 있는가.

과연 사랑하는가?

이진우는 흔들리는 마음속의 마지막 심적 장벽을 마주했다.

[ ‘금화신공’이 발동 중입니다. ]

이윽고 결론이 떨어졌다.

“……뭐, 문제될 거 있나?”

이진우는 기나긴 고뇌 끝에 아집과 본능의 극적 타협을 이뤄냈다.

그래, 문제될 건 없었다.

어느덧 그는 성인이 되었고, 이성을 불건전하게 만날 자격이 있었다.

게다가 소신껏 밀어붙이던 자만추가 마침내 찾아온 상황 아닌가.

넙죽 받아들이면 그만.

‘……얼굴도 내 스타일이고.’

이진우는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아.

외모는 꿈에 그리던 것 이상이고, 자신만 바라보는 참된 성격까지 완벽하지 않은가.

심지어 현시대 결혼의 최대 장벽인 주택 문제까지 해결되어 있었다.

이따금 중세풍의 성을 볼 때면 인지 부조화가 일어나곤 했지만, 충분히 감당할 만했다.

왠지 몰라도 그녀와 노닥거리는 것 외에는 할 일 없이 하루를 보내는 최근이었으니까, 청소 정도는 하루에 1시간 정도 투자할 의향이 있었다.

“나, 정말 어른의 계단에 올라서는 건가.”

결혼……연애를 뛰어넘어 바로 그 단계에 이르는 것인가.

그래, 일찍이 한 사람만 일편단심으로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자식은 몇 명을 낳으면 좋지?

“혼자는 외로울 테니까 남매……형제나 자매도 괜찮겠는데.”

아니, 그냥 대가족을 만들어버려?!

그렇게 새로운 난제를 맞닥뜨린 이진우의 샤워 시간은 필연적으로 길어졌다.

솨아아아……

비가 내렸다.

그럼에도 초월적인 육체의 인지력은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았다.

유한나는 보았다.

언젠가 보았던 것과 비슷한 성과 관문.

새하얀 색상에서 살짝 잿빛에 가까운 것을 보니 주인의 심상이 어떨지 짐작되었다.

눈앞의 요새는 그 주인의 심상 세계를 고스란히 나타낸 일종의 영역이었으니.

“……썩어 문드러진 칠흑의 성인가.”

맨 처음 보았을 때의 우유부단함이나 인자함은 진작 없어졌을 터다.

독기가 잔뜩 차올라겠지.

온갖 부정적 감정으로 뇌수가 잔뜩 차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유한나는 굳이 성벽을 부수고 쳐들어갈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지금에 이르러선, 상대가 이진우를 인질로 잡지 않으리란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형태는 달라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마찬가지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니 남은 건 기다림 뿐.

각자의 목숨을 판돈 삼고서 누가 그의 옆자리를 차지할지 정당하게 겨룰 뿐이다.

끼이이익─

이내 성문이 열렸다.

유한나는 보았다.

저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여인을.

그사이 더욱 강해졌는지 위풍당당하게 다가오는 연적을 바라보았다.

망할 꼬리를 살랑거려 자신의 소꿉친구를 채간 여우년이 꼴보기 싫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의 사랑이 저년과 연결되어 버린걸.

그나마 정조보호마법이 유지되어 있지 않았다면 진작 찢어 죽였을 것이다.

‘……그와는 별개로 둘이서 한 달간 잘도 꽁냥거렸겠지.’

그것만으로 죽을 죄였다.

갖가지 불쾌한 시츄에이션을 떠올린 유한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지금 다시 보니 하얗고 윤기가 흐르는 상대방의 얼굴이 더욱 재수 없었다.

그렇게 오만상을 짓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샤오팡 또한 기분이 좋지 못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마주한 가증스러운 얼굴에 툭 내뱉었다.

“어떻게 왔어?”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

당장 마법을 난사하려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었다.

“네 아비와 이어진 실을 타고.”

하지만 의외로 친절하게 대답이 돌아왔다.

‘아버지라…….’

샤오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둘만의 공간을 만들기 직전, 자신의 아비인 린 다이만과 마주한 기억을 떠올렸다.

과연, 그 짧은 만남에 발목을 잡혀버렸나.

그 순간이 아니었더라도 어떻게든 들어왔겠지만, 막상 보니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강하던 혈사자가, 연적이 뭘 먹고 왔는지 더욱 강해졌다.

자신은 그 이상으로 강해졌으니 예전과 다르게 지금은 비슷해지지 않았을까.

그런 낙관적인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지금이 아니라면 영영 잡지 못하겠구나.

혈사자 유한나는 예전에 한계를 맞이한 자신과 달리 삽시간에 성장한 이였다.

어떤 시련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 위로 올라갈 인간.

천재(??).

지금이 지나면 자신이 더욱 편법을 동원하더라도 이기지 못할 부류의 존재라고.

그런 탄식 가득한 전망을 내놓으면서도 샤오팡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기에 답은 더욱 명확해졌으니까.

‘지금 죽이자.’

그러면 모든 게 해결되었다.

샤오팡은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상대가 신이건 악마이건 상관없었다. 소원을 이뤄 준다면, 그가 곧 메시아였다.

그렇기에 택한 길이었다.

주문을 외웠다.

“역천세계??世?.”

그 한 마디에 세상이 호응했다.

순리가 거꾸로 흐른다.

죽은 자는 살아나고, 산 자는 죽을지어다.

세계의 역행(?行).

그 권능과 다름없는 이적에 대가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주르륵,

샤오팡의 왼쪽 눈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붉은 안광을 얼마 발하지 못하고 곧 감겼다. 영영 눈을 뜨지 못하리라.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았다.

한 발만 내디디면 진실로 온 세상이 제 손안에 들어올 것이므로.

앞으로 만끽할 행복을 위해서라면 눈 한 알쯤은 망가져도 괜찮았다.

대지에 고인 빗방울이 하늘로 역행했다.

떨어질 때와 달리, 아무런 소리 없이 기이하게 솟아올랐다.

잿빛의 하늘이 눈물을 머금었다. 내뱉지 못하고, 꾸역꾸역 삼켜냈다.

하늘에 올라간 영(?)에 대지에 꽂혔다.

드드드득─백골 혹은 살점이 채 떨어지지 않은 시체가 지층을 부수고 땅 위에 올라섰다.

그녀가 이제껏 손수 매장했던, 지옥으로 향할 때 함께할 길동무.

일반인, 무인, 마법사.

각자의 정체성을 잊지 않은 망령들이 각자의 수단으로 제 의지를 표출했다.

진작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간 일반 시민의 백골이 느린 속도로 달려 나갔다.

거무튀튀한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들의 시체는 마력을 끌어올리며 주문을 외웠다.

넝마의 무인들은 순식간에 달려나갔다.

혹여 한쪽 다리가 잘려나갔다면,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기어나갔다.

생전의 경지에 따라 그 나아가는 속도가 달랐고, 첫째로 먼저 도착한 이는 필연적으로 가장 강했던 이였다.

콰앙!

도끼와 손이 부딪쳤다.

필시 피륙이 잘려나가는 게 정상이건만, 어떠한 것도 흠집이 나지 않았다.

금속과 금속이 마찰하는 불쾌한 소리만이 귓전에 울릴 따름이다.

유한나는 눈을 좁혀 제 병기를 막은 시체를 노려보았다.

무신 사후 이래 최강의 무인(?人).

궁주, 린 다이만.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일까. 비교적 멀쩡한 외관의 시체는 조금씩 밀릴지언정 끈질기게 병기를 맞대왔다.

생전의 경지가 온전한 것은 아니지만, 뒤따르는 수많은 무인과 마법을 장전하고 있는 마법사까지 생각하면 곤란하기 그지없는 상대였다.

“……기껏 제사까지 지어줬더니만.”

세상에, 앞길을 막아버리네.

마무리는 내가 했는데 이게 말이 되는 건가.

한숨을 푹 내쉰 유한나는 비어 있는 나머지 손에 창을 빚어냈다.

이내 양단할 기세로 공간을 그었다. 그에 무인은 생전의 기억을 잊지 못했는지 반사적으로 자리를 피했고, 여유가 생겼다.

금방 만들어낸 왼손의 창을 없앴다.

그 대신 도끼의 손잡이 부분을 양손으로 쥐고서 허리를 비틀었다.

도끼는 곧 야구공을 맞이할 방망이처럼 누구보다 뒤에 서서 적군을 바라보았다.

수없이 늘어진 시체의 군대. 분명 많지만, 이겨내지 못할 숫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유한나는 심장에 고인 샘물을 끌어 올렸다.

바다처럼 드넓은 공간에 안치된 마력은 세상을 반가워하는 듯 빠르게 무기 위로 발현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붉고 거대한 도끼가 더욱 살벌한 기운을 내뿜었다.

핏빛 광채가 세상을 비추었다.

신에게 하사받은 무기가 곧 부서질 것처럼 웅웅 울렸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도끼.

[ 운명(??)을 발동합니다. ]

세상에서 가장 전쟁에 특화된 여인은 그 도끼를 힘껏 휘둘렀다.

그러자 마치 당연하다는 듯──

군대가 반으로 갈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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