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당신을 위해
* * *
참격은 고작 시체 하나 베었다고 멈추지 않았다. 군대를 반으로 토막 내고, 저 멀리 관문에 닿을 기세로 나아갔다.
서걱─!
시체가 썰렸다.
대지 위에 수없이 반복되는 일이었다.
일정 경지에 이른 자만이 겨우 막거나 피했을 뿐, 대다수의 잡졸은 몸을 허물어뜨렸다.
사자(死者)의 머리와 몸통이 잘리자, 그들은 그대로 세상과의 재회를 마무리했다.
썩은 살점과 백골로 된 사토가 흩날렸다.
가히 대군이라 불릴 숫자가 일순에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군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은 그에 어떤 놀라움도 내비치지 않았다.
곧 자신의 목을 덮쳐올 칼날을 직시하며, 그저 손짓했을 뿐이다.
참격이─죽은 자를 흙으로 되돌려보내는 순리가 착실히 나아가 마법사들에 닿기 직전.
후위에 남겨둔 정예 무인들이 일제히 달려나가 몸을 내던졌다.
그 숫자가 일백여 개체.
단 하나로 맞서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것을 쏟아부으면 된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방식.
기꺼이 버림말을 자처한 병사들은 각기 생전의 병기를 놀렸다.
세상에 궤적을 그려냈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익!!
전장에 울려 퍼지는 새된 마찰음.
강철의 병기가 부서지고, 장기간 단련된 근골이 바스러지는 소리.
적(赤)과 흑(?)의 선혈이 창공에 흩날렸다.
이전의 쭉정이들과 달리 값어치가 높은 것들이 흙으로 돌아가는 광경이었다.
다만, 그 희생 덕에 군대를 반쯤 횡단한 참격이 이윽고 멈추었다.
그래, 그거면 된 거라고.
샤오팡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
고작 참격 한 번 막았다 일희일비하기엔 상대가 너무나도 벅찼으나, 충분히 시간을 끌었다.
병졸의 숫자가 아직 많이 남았다.
개중에는 자신을 무인이라 자칭하는 백정뿐만이 아닌, 마탑의 마법사들이 존재했다.
그녀는 손 끝에 느껴지는 막대한 마력의 파도를 느끼며 주문을 외웠다.
콰드드득─!
창을 내지른다.
머리가 꿰뚫렸다.
낫을 휘두른다.
몸통이 사선으로 갈렸다.
주먹을 갈겼다.
형체가 산산이 조각났다.
인간 파괴의 현장.
삽시간에, 가없이 반복되고 있는, 그 무자비한 과정.
순백의 법복을 입은 백정이 시체를 썰어 넘기며 전진해왔다.
일인군단(一人??), 전쟁의 사도.
누구보다 전쟁에 일가견이 있는 괴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린 다이만과 같이 고수가 필사적으로 발길을 붙들었지만, 무리가 있었다.
유한나는 시간 끌기에 불과한 상대를 상대해주지 않았고, 무리해서 몸을 내던지는 이는 가차 없이 베어 죽였다.
언젠가 전부 베어 죽일 추세.
하지만 무인만이 그녀가 상대하는 군대의 전부가 아니었다.
콰앙! 콰앙!
마침내 군단의 마법이 발사되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유성우.
그 숫자는 수천에 다다랐고, 모든 게 한 사람을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오직 그녀를 향해 빗발처럼 쏟아져 내렸다.
유한나는 혀를 차고는 도끼를 어깨 위로 올렸다. 시답잖은 요격 마법으로는 턱도 없는 숫자와 수준의 폭격이었다.
“귀찮게 하기는.”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도끼를 높이 들어 올렸다.
전쟁의 사도.
마탑의 최대 전력.
그런 낯간지러운 이름이 여럿 붙었지만, 그녀는 결국 두들겨 패는 게 특기였다.
또, 그게 취향이었고.
그런고로 유한나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 하나의 파훼법을 선택했다.
마법이건,
무인이건,
군단이건,
자신의 연적이건,
전부 부수면 되는 것이었다.
***
여인은 군대를 뚫고 계속 나아갔다.
그 자그만 손에 들린 병기가 휘둘러지자 운석이 부서졌고, 군대가 홍해처럼 갈라졌다.
수가 많아 시간이 걸릴 뿐이지, 허망할 정도로 간단하게 길이 뚫렸다.
‘너도 나를 죽이러 오는구나.’
노벨피아 유
노벨피아 소설 총 400,000화 유
자신을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그 간단한 이치를 실현하기 위해 올곧게 달려오고 있었다.
저 폭력적인 연적을 바라보면서, 샤오팡은 새삼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이전에도 저랬었다.
저 여자는 개의 우리에 들어간 맹수 마냥 모든 걸 찢어발겼다.
제 실력과 의지로 모든 역경을 압도했다.
기어이 삶의 이유를 지켜내고, 유유히 빠져나간 괴물.
반대로 혼자가 아님에도 무력하게 패배한 것이 자신의 과거.
물론 그때와 지금은 많은 게 달랐다.
마법적 역량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일보했고, 누군가와 함께하는 행복을 배웠으며, 사랑에 대한 집념이 태어났다.
무언가를 위해 기꺼이 무언가를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하나쯤 포기하는 것은 참으로 간단한 것이었다.
『천칭이여, 기울어져라.』
흑색의 마력이 끓어올랐다. 역류한 검은 피가 턱밑까지 치솟았다.
주문이 완성되었다. 그 대가로 양손 모든 마디가 으스러졌다. 온몸의 장기가 진탕되었다. 피눈물이 흘렀다.
그럼에도 그녀는 기쁘게 미소 지었다.
준비를 마쳤다. 사랑을 제외하고, 모든 인륜을 저버릴 시간이 마침내 찾아왔다.
역전의 용사를 맞이할 단두대를 모셔보았다.
그를 사랑하기 위해.
그리고 그녀를 죽이기 위해.
당신을 위해.
이 세상을 준비했다.
주문을 외웠다.
──역천세계(??世?)
“세상아, 접혀라.”
그러자 세상이 접혔다.
***
쿠웅,
하늘이 무너져 내려 압사당하는 꿈을 꿨다.
이건 무슨 개꿈일까.
그녀는 반개한 눈으로 평소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제 방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뭐, 그냥 꿈이니까.”
그래, 별 의미 있을 리가 있겠냐.
그리 치부한 유한나는 눈을 비비며 자신의 몸을 붙드는 간악한 침대에서 벗어났다.
늦게까지 망할 소꿉친구와 게임을 한 탓에 잠이 부족했으나, 철혈의 의지는 수면욕 따위 단번에 물리쳐내었다.
정확히는,
“오늘은 언년이 붙으려나.”
곧 학교에서 소꿉친구를 만날 생각에 도저히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 바보 같은 언변과 능청스러운 태도를 볼 생각에 심장이 설렜다.
또, 혹시라도 달라붙을 여자들을 견제할 생각도 넘쳐났고.
떡하니 내가 있는데 감히 옆을 넘봐?
건방진 녀석들.
유한나는 생긋 웃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교복 차림을 감상했다.
음, 오늘도 완벽하다.
이런 소꿉친구가 있는데, 다른 여자를 생각하는 고자는 누구일까.
‘누구긴 누구야, 웬수 같은 이진우지.’
그녀는 혀를 차면서 등에 가방을 메었다.
현재 시각 7시. 등교 시간에는 여유가 있었지만, 이진우의 집에 들를 예정이었으니 그리 이른 것도 아니었다.
이따금 귀찮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얼굴을 마주할 때만큼은 행복하니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 떨 가치는 충분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매일 아침상을 차려서 입맛을 길들여야겠다는, 음흉한 계획도 존재했다.
‘어제 남은 제육이랑 미역국이면 충분하려나.’
유한나는 이진우의 냉장고 사정을 떠올리면서, 가볍게 현관문을 열었다.
그렇게 문을 열자마자 푸르른 하늘이 보였다.
온 세상이 새파랬다.
“……어.”
평소와 다르게 청색 물감이라도 탔는지 푸르게 물든 세상을 바라보며, 유한나는 이마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뭐지, 머리에 문제가 생겼나.
그런 의심과 별개로 천재적인 감응력을 지닌 그녀의 직감이 외쳤다.
이건 ‘마력’이라고.
망할 소꿉친구가 허구한 날 상태창과 함께 갖고 싶다 외친 바로 그거라고.
다만 그 낌새를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이진우의 집에 이르기도 전에 마법사가 찾아왔다.
“유한나, 17세. 168cm. 48kg. 현재 솔빛중학교에 재학 중이며……가장 친한 지인으로는 같은 반의 이진우가 있지.”
순식간에 신체·신상정보가 읊어졌다.
장난스럽게 씨익 웃는 마법사의 표정이 역겹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쾌했던 것은 제 소꿉친구의 이름이 그 입에 오른 것이다.
……지금 협박하는 건가?
“너 따위가 감히.”
아무래도 개같은 호구와트에 걸린 모양이라고.
유한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제 손을 세게 쥐었다.
어느덧 허파와 심장에 넘실거리기 시작한 마력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근육의 탄성, 뼈의 강도 등을 강화하고도 남은 마력은 그녀에게 이능을 선사했다.
무엇이든 부술 수 있는 재능.
어쩌면 권능.
[ 운명 1단계가 발동합니다. ]
“그러니 친구가 어떤 취향인지 알고 싶으면……어, 어라라……?”
콰아아앙─!
각성 첫날, 유한나는 이능 3대 단체라는 마탑의 스카우트를 무찌르는 업적을 달성했다.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다고 할지언정 황(?), 진작 일반인에서 벗어난 마법사를 상대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해냈다.
어떤 무기도 없이 맨주먹으로 부숴버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에는 항상 초월적인 의지가 개입해 있기 마련이다.
띵동─!
평소보다 늦은 시각에 도착한 탓인지 아리송한 얼굴로 문을 연 이진우.
휴대전화가 박살이 난 터라 늦어진다는 연락도, 무사하냐는 물음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애타게 달려왔을 뿐이다.
“……아니, 너 무슨.”
전쟁터라도 다녀온 듯 넝마투성이인 소꿉친구를 보고 경악하는 이진우에, 유한나는 헤프게 웃었다.
“아아, 이 나이에 신나서 달려오다가 길바닥을 세 번이나 굴러버렸네! 아하하하!”
그 작위적인 유쾌함에, 이진우는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나야. 내가 반드시 도와줄 테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우야.”
이내 유한나는 차분한 눈빛으로 눈앞의 사내를 직시했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소꿉친구에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고작 길바닥을 구른 정도로 옷차림이 넝마가 될 리가 없다.
하지만, 구른 것 자체는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뛰어난 운동신경으로도 심장이 터질 듯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기엔 무리가 있었으니.
곧 죽을 것처럼, 필사적으로 달려왔다.
“사랑해.”
당신을 위해.
***
주먹을 쥐었다.
뻗었다.
무너져 내리는 하늘을 향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