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기아(??)
* * *
주먹은 무너지는 하늘을 뚫었다.
미친 과학자는 물리학적으로 신체에 깃든 거력을 설명하려 들 것이다.
마법사는 제 상식을 뛰어넘은 이적을 알아보고 비명을 지를 것이다.
전사와 마법사와 사제와 한 인간으로서의 재능이 모여 빛을 발했다.
어떤 태양보다도 눈부신 그 휘광은 제 앞에 놓인 먹구름을 헤치고 나아갔다.
땅바닥을 거니는 망자들 또한 녹여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냈다.
내뻗는 주먹과 발걸음에 순리(?理)가 뒤따랐다.
어그러진 세계의 법칙이 그에 굴종하여 순리대로 흘러간다.
이제 남은 건 수괴뿐이다.
제멋대로 세상을 주무르려던 망할 여우만이 앞에 놓인 것이다.
주먹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담담하게 미소 지은 채 무릎 꿇고 피눈물 흘리는 가련한 여성.
그리고 그 앞에 단단히 선 낯익은 남성에게.
팅,
싱거운 소리와 함께 유한나는 오랜만에 주먹이 아프다 생각했다.
*
아마도 봄이었다.
후덥지근하지도, 싸늘하지도 않던 그 날은 분명 낭만이 살아 숨쉬던 계절이었다.
동시에 그녀의 소꿉친구 옷차림이 간소해지고, 소매가 반으로 줄어든 시기이기도 했다.
“아, 게임하고 싶다.”
그렇게 말한 이진우의 표정이 퍽 지루했다. 그는 책상에 몸을 기댔다.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언제 집에 갈 수 있으려나. 수업 제발 좀 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무슨 아포칼립스라도 마주한 것마냥 절망스러운 얼굴이 보는 맛이 있었다.
그 꼴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유한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책상에 고개를 박았다.
그리고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진우와 시선이 마주쳤다.
동공이 공허했다.
아마도 그의 영혼과 의지는 교실 책상을 탈출해 컴퓨터 앞 의자로 향한 것이라고.
그리 추측한 유한나는 왠지 모르게 심통이 나는 것을 느꼈다.
“어젯밤에 그렇게 많이 해놓고 또 하고 싶어?”
사실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녀는 이진우와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몇 번이나 게임을 함께했지만, 뭐가 재밌다고 이 야단법석을 피우는지.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취향까지 전부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유한나는 문득 생각했다.
백번 생각해도 실제 던전이 인터넷 창작물보다 훨씬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다고.
‘……그 던전 때문에 진우랑 노는 시간이 준 게 문제지만……. 스읍, 얘도 마법사 되면 좋을 텐데, 무슨 방법 따로 없나?’
한동안 입맛을 다시던 그녀는 고민 끝에 현명한 처신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라는 핑계를 대고, 던전을 가야 할 참이다.
함께 놀기는 힘들겠지.
그러니 지금 실컷 봐놔야 하는 것이다……!
유한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로 눈앞에 놓인 이진우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널브러진 모양새가 임종을 맞이한 생선 대가리와 다름없었지만, 그런 광경에서조차 충족감을 찾는 경지에 오른 그녀였다.
‘으음, 역시 잘생겼어. 멍청하지만, 온종일 봐도 지겹지 않은 얼굴이야.’
그런데 그 얼굴값을 하는 걸까.
십년지기 소꿉친구는 나 몰라라 하고, 계속 다른 년을 꾀어오는 게 참 문제였다.
어떻게 거르고 걸러봐도 무작정 들이대는 년들이 꼭 한 번씩은 있었다.
“진우야, 점심시간인데 밥 먹으러 가자.”
별안간 들려온 개소리에, 유한나는 부릅뜨고서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감히 신성한 학교에서 고데기를 했는지 웨이브가 진 머리에 화장까지 떡칠한 갸루년이 이진우에게 꼬리를 치고 있었다.
심지어는 몸을 슬쩍 기울이며, 그리 크지도 않은 가슴을 부각시킨다. 어린 노무새기가 어디서 저딴 걸 배워온 건지.
‘개새기가?’
유한나는 단잠을 취하느라 미리 접근을 차단하지 못한 자신과 앞의 여우년에게 크게 분노했다.
양손의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당장 뻗어 나갈 일은 없었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주먹이었다.
마법사는 일반인에게 마법을 써서는 안 됐지만, 주먹으로 신명나게 두들길 수는 있었다.
이 여우년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조지면 좋을까, 그녀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음, 진우한테 미움받으면 안 되니까 체육관에서 스파링하는 방향으로 가자.’
좋아, 어디 한 번 죽여볼까.
우리 잠깐 오붓한 대화를 나눠보자며 좋게좋게 데려가야겠다고.
그렇게 목과 손목의 관절을 풀면서 일어나려던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른 사람들한테 싫은 소리 못하기로 탁월한 그 이진우가 헤헤 웃으며 거절의 말을 뱉었다.
뭐라 싫은 표현을 내비치기도 전에 알아서 거부 의사를 표한 것이었다.
그 놀라운 광경에 그녀는 입을 틀어막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지난번에 함께 본 애니메이션의 점심 도시락을 먹어보고 싶단 소리에 직접 수제로 만들어온 게 오늘 아침.
돈까스, 소세지, 떡갈비, 볶음밥 등등 이진우가 좋아하는 메뉴로 꽉꽉 눌러 담았다.
그걸 먹지 않고, 굳이 학교 식당으로 행하는 건 상식적으로 죽어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평소 속을 썩이던 멍청이가 기특한 일을 하면 가산점을 주고픈 것도 사실.
유한나는 홀린 듯이 손을 뻗어 이진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교칙 때문에 짧게 친 머리가 까칠했다. 손바닥이 기분 좋게 간지러웠다.
“……너 뭐하냐?”
“요즘 많이 컸구나 싶어서.”
“아니, 너보다는 항상 컸거든?!”
“응, 아니야~ 초등학교까지는 내가 더 컸어~”
바로 앞에 다른 사람이 있는데도, 아이 다루듯이 하는 게 불만이었는지 투덜대는 이진우의 얼굴이 그녀에겐 귀엽게 느껴졌다.
그에 맞춰 그녀를 더욱 놀리던 와중, 유한나의 머릿속으로 희망찬 전망이 떠올랐다.
앞으로도 이렇게 놀면서 세뇌 교육을 잘한다면, 이 눈치 없는 놈도 잘 길들일 수 있지 않을까.
친구가 아니라 연인으로서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하고, 입을 맞추는 관계가 되지 않을까.
어쩌면 결혼까지도.
‘아이는 시선이 너무 분산되면 안 되니까 딱 둘 정도만 낳자.’
그렇게 자녀계획마저 세운 적이 있었다.
“개같은 놈.”
그런 꿈을 꿨었다.
고자새기.
도대체 몇 번을 유혹했는데, 이거 넘어가긴 하는 나무인가?
게다가 말이야.
맨날 집에 처박혀 있는 놈이 잠깐 돌아다닌다고 다른 년들 홀리는 게 말이나 되냐고.
유한나는 어느덧 이진우와 함께하며, 익숙해진 불평불만을 속으로 되뇌었다.
“……진짜 얼굴만 잘생긴 놈.”
순식간에 나락에 도달한 기분으로 지껄였다.
그러자 커다란 방패 뒤의 이진우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 아이기스의 방패 ]
모든 마법을 파훼해낼 수 있는 그녀의 주먹마저 기어이 한 방 버텨낸 신물.
그러나 역시 레플리카에 불과해 완전히 충격을 막아내진 못한 모양이다.
입에서 피를 주룩주룩 흘리면서도 싱글벙글 웃고 있는 이진우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그녀의 화를 불러일으켰다.
어쩌면 그 옆에 망할 푸른 여우년이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외간 여자를 홀리는 것을 넘어 역으로 홀려버린 참극이라니.
“다시 교육시켜야겠네.”
그리 뇌까린 유한나는 눈앞의 연놈들에게 빙긋 웃어 보이다가 깨달았다.
입맛이 쓰디쓰다.
또, 자신이 사랑하는 얼굴이 오늘 찌그러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흐아아아아.”
신혜영은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세상의 공기는 정말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본래 기억과는 다른 국면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불길함 투성이인 검붉은 하늘에, 온몸의 기력을 뺏어가는 지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락인 게 바로 현실 세계였다.
“……한 달이나 걸릴 줄은 몰랐는데.”
그리 중얼거린 신혜영은 오랜만에 두 발로 땅에 선 감각을 만끽하며 기지개를 켰다.
으음, 좋다. 온종일 이것만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감각.
그러나 인간은 야비하기가 극에 다른 종인지라 본래 지닌 숨을 되찾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또 다른 권리를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문득 굶주림을 깨달은 신혜영은 구호소에 배정된 자신의 침실을 빠져나와 식료품 창고로 향했다.
수많은 난민이 담배와 콜라 같은 기호품은커녕 즉석밥 하나를 찾는 국면이다.
하지만 그녀 같은 마법사들은 직접 식량을 고를 수 있는 특권을 지니게 되었다.
사실 신혜영은 특권까진 모르겠고, 물을 마음껏 들이켤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할 수 있었다.
검붉은 세상에서의 배고프고, 기운 없는 감각도 끔찍하긴 했다.
하지만 목과 장기가 메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질 것 같던 감각은 감히 죽음을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자기 의지를 박탈당한 채 장시간 이어지는 기아(??)는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헤엑, 헤엑.”
이윽고 쉘터를 빠져나온 신혜영은 창고 앞에 네 발로 서 있는 이리엔이라는 이름을 지녔었던 개를 마주쳤다.
언제나 이 자를 지키는 경비… 아니, 그보다는 경비견 느낌이었다.
처음엔 그 대단하던 팀장님이 무슨 일로 이리된 것일까.
참담한 심정뿐이었지만, 사람은 뭐든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신혜영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짓고서 주저앉아 그녀의 턱을 어루만졌다.
이리엔은 헥헥거리며, 제법 기분 좋은 표정으로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언제까지 계속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신혜영은 곧 몸을 일으켰다.
길게 늘어선 창고의 줄에 합류했다. 그 면면이 화려했다.
원정대장, 수석 원정대 소속의 마법사, 사제와 전사.
임시 쉘터인 걸 감안해도 모두 고작 쌀밥 하나에 곁들일 반찬을 위해 선 것이었다.
한두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금발 적안의 마법사는 작게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계속 밝게 유지할 순 없었는지 어두운 표정으로 끝없이 펼쳐진 폐허와 광야를 바라보았다.
이전에 서울이라 불리던 동네였다.
전부 사라졌다.
무려 반년이나 일찍 세상이 망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