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종말의 과정
* * *
세상은 멸망했다.
본래 예정보다 일찍 종말을 맞이해 버렸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전 대륙이 초토화되었다.
그것은 초월적인 경지의 마법사과 신위에 이른 전사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두 거대 세력 간의 전쟁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인세가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은 맞지만, 그에 대한 판결은 하늘에서 이뤄졌다.
──천상 거래 위원회.
인간과 신의 거래, 초월적인 무언가와의 거래는 전부 이곳을 중간 지점으로 두고,
인과를 무너뜨리는 부당거래 또한 바로 이곳에서 재판이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천상의 천사─재무 관리원은 일찍부터 이진우를 지켜보았다.
“허어, 황금의 신이 눈여겨보는 인간인가.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줬군. 아직은 새싹에 불과하지만, 이건 세계의 규칙을 뛰어넘는 불합리한 능력이다. 인과를 어지러뜨려. 유죄다.”
땅! 땅! 땅!
그렇게 세계가 버틸 수 있는 인과율이 감소했다. 그가 각종 시장에서 미친 마진율을 보일 때마다 그 마모가 반복되었다.
“다음 안건은 문제가 더 심각하군.”
물론 이진우만이 세상의 규율을 어그러뜨린 것은 아니었다.
“최근 신들의 편애가 도를 넘었어.”
“곧 손에 닿을 자들이라 더 그런 거겠지. 옥석의 격차는 날이 갈수록 커질 테니.”
“이제껏 오래 살았고, 앞으로도 길게 살 놈들이 욕심은 더하는군.”
신들과 거래를 일삼는 사도.
자신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 한도 이상의 공양을 바치고, 인과율마저 비트는 이레귤러.
그들 하나하나가 천상 거래의 우량 고객이었고, 큰 골칫덩이였다.
“……신들은 말이라도 전할 수 있다. 최소한의 정도가 있고.”
“확실히 그에 반해 밑바닥 것들은…….”
“끔찍하군.”
그러나 천상의 신만이 초월적인 것은 아니었다. 과거 지상에도 자신의 운명을 새로 개척한 이가 존재했고, 그 지하에도 누군가의 운명을 희롱하는 이들이 있었다.
소위 ‘악마’라 불리는 존재였다.
천상의 신이 사도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더욱 많은 공양물을 받아들인다 치면, 이들은 애초부터 계약서에 장난질을 쳐놓았다.
고작 ‘10’의 공양물로 이룰 수 있는 소원을 ‘20’, 혹은 그 곱절을 받아 행하는 부당거래.
대부분의 악마는 사도를 위한 것이 아닌, 철저히 자신의 이윤을 위해 거래하는 족속들이었다.
그리고, 그 악마들의 사도는 신의 사도보다 더욱 인과율을 파괴시키고는 했다.
세계의 이면을 삼분지계…아니, 사실상 양분하고 있는 두 거대 세력.
무신궁과 마탑의 대전쟁.
각각 그 내부와 외부에서 자신들의 손익을 위해 신과 거래하는 사도.
무엇보다 중요한 숙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는 악마의 사도.
그 방점을 찍은 것이 새장에서 탈출한 마법사, 린 샤오팡의 불가침 조약 위반이었다.
그녀는 한계 이상의 공물을 모으기 위해 민간에 능력을 사용했고, 법칙을 벗어났다.
사도에 의해 가공할 속도로 마모되어간 인과율이 마침내 그 한계에 다다랐다.
“끝났군.”
인세─그 처우를 결정하는 천상 거래 위원회는 감당하지 못할 만큼 불어난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아주 간단한 방법을 택했다.
어차피 신들과 악마, 그 외의 초월자들에 넘어갈 운명이던 곳이다.
그렇다면 저들이 알아서 자신들의 채무를 갚도록 하면 될 뿐이다.
따라서 위원회는 동의했다.
본래 예정보다 반년 일찍 지구를 매각했다.
천상 거래 위원회의 관할이 아닌, 중립 구역으로 처분했다.
그 판결이 지구에 미친 영향은 간단했다.
모든 인류가 마력을 느낄 수 있게 됐고, 권외의 생명체들로부터 표적이 되었다.
신과 악마가 난입했다.
이계의 이종족과 괴물이 제멋대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던전과 같은 너그러운 유예는 없었다.
별안간 맨땅에 오우거가 떨어졌고, 하늘에 열린 통로로 드래곤이 나타났다.
하수구에서 솟아오른 고블린은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었다.
몇몇 오크 무리는 날뛰었고, 몇몇은 숲에 몸을 숨기고서 시시각각 종족을 불려 나갔다.
세계의 모든 첨단이 무의미해졌다.
모든 시설의 전기가 끊겼고, 모든 화기가 먹통이 되었다.
그나마 유지되는 것은 연금술이나 마력이 부여된 물품들뿐이었다.
그래서 인류는 바퀴벌레처럼 수를 불려 나가는 괴물들을 찾을 여유와 방법이 없었다.
그 와중에 능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내부의 적도 감당해야 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그렇게 사회는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아포칼립스가 도래했다.
미리 그를 준비했던 이능력자들은 다른 세계로 넘어가 생존을 도모했고, 애매한 급의 능력자들과 민간인들이 인세에 방치됐다.
수많은 목숨이 스러졌으나, 자신들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 또한 많았다.
괴물과의 전쟁, 인류 내부 미친놈들과의 항쟁이 며칠간 계속되었다.
전 세계 어디에도 낙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유독 빛을 발하는 이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고대라면 영웅이라 불릴 이들이었고, 곧 그들은 집단의 구심점이 되었다.
몇 없는 인류의 희망으로서 자리했다.
신과 악마, 외계의 초월체들은 그 빛나는 이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멸망의 시작으로부터 보름이 지나 입찰 기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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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링!
[ 네, 구매가 완료되었습니다. ]
인류를 겨우 지탱하던 기둥들은 전량 초월체에 간택되어 팔려나갔다.
곧바로 그들에 의지하던 집단이 무너졌다.
진작 기능을 상실했던 국가가 이젠 흔적도 없이 증발했고.
전 세계는 어느 곳도 예외 없이 멸망의 문턱에 다가서게 되었다.
“…….”
무신궁과 셀베르크 마탑의 정예가 인세로 돌아온 것도 그쯤이었다.
“……이게 뭐꼬.”
“우라질.”
“지랄하네.”
그들이 마주한 건 폐허였다.
오직 폐허였다.
*
그로부터 다시 시간은 흘러, 임시로나마 머무를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이세계로 도망치는 이와 모두와 함께 살아남으려 현세에서 발버둥 치는 이로 나뉘었고.
여러 가지의 이유로 인해, 맨 처음보다 원정대의 인원은 현저히 줄어든 상태였다.
그래도 그들은 주변의 생존자들을 끌어모아 겨우 쉘터를 만들어냈다.
보잘것없는 임시 쉘터였지만, 주위의 몬스터들을 몰아내고 자리 잡은 기반이었다.
어쩌면 전세계 유일의 쉘터일지도 몰랐다.
다만 그런 타이틀은 생존자들에게 어떤 위로도 되지 못했다.
신들에게 총애받는 누군가 혹은 그의 지인들은 모든 가족 구성원이 살아 있는 행운을 겪었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못했다.
극소수의 인원을 제외하고, 종말은 공평했다.
인류는 절멸했다.
이전의 지위, 재산, 연령, 국가 같은 건 무의미한 사항이었다.
그런 시대에 가족과 지인이 모두 생존한 경우는, 아니, 애초에 살아 있는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식사 가져왔어요.”
그리고 적급 마법사 신혜영은 그 기적을 똑똑히 누리게 된 행운아였다.
그토록 살리고 싶었던 부모님─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이 난리통에서 생을 부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다행이다.
신혜영의 눈과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녀는 삼 인분의 식량을 담아온 쟁반을 탁자에 올려놓고 그들의 몫을 따로 들어 올렸다.
쉘터 내에서도 가장 인기가 없는 [ 밍밍한 죽 ]이라는 품목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만든 건지 물에 불린 쌀의 감촉 말고는 전혀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너무 불평하진 말고. 그나마 죽이라서 3인분 받아온 거 알지? 그래, 그래, 혼자였으면 이런 거 안 먹었지. 며칠에 한 번이지만 치킨이나 피자도 얻어먹었을걸?”
그러면 훨씬 맛있게 먹었을 텐데…….
하지만 말이야.
나는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자, 다 먹었지?”
신혜영은 밝게 웃으며 침상에 죽은 듯 누워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전쟁과 종말의 여파로 누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저주로 인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아직 살아 있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당장은 살아 있었다.
비록 반송장의 형태일지라도 그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은 큰 위안이었다.
무슨 대가를 주더라도 영원히 이어졌으면 하는 그녀만의 희망이었다.
또, 불확실한 미래였다.
“있잖아, 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
금발 적안의 마녀는 침대맡에 기대어 제 가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 선택의 날이, 입찰 시기가 왔다.
어떤 물품을 구매하고, 이세계로 이주할 기회의 날이었지만, 절망의 날이기도 했다.
신혜영은 새삼 떠올렸다.
내일, 신이 내려온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