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표류
* * *
창가를 통해 새어 들어오는 여명에, 금발 적안의 마녀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났다.
으으, 아침인가.
도무지 좋아하게 될 수 없는 찌뿌둥한 감각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서는 어느 일순간 단번에 몸을 쭉 이완시켰다.
“……아아.”
망할 놈의 아침이다.
그것도 요즘 가장 기대하면서도 두려워했던 그 날이 찾아왔다.
그 사실을 깨달은 신혜영은 잠기운을 털어내고는 곧바로 손님 맞을 준비에 나섰다.
그렇다고 거창한 건 딱히 없었다.
미리 다려둔 활동복을 챙겨입고, 마력이 진탕될 일이 없도록 안정적으로 한 번 온몸에 순환시켜 줄 뿐이었다.
누군가와 싸울 생각은 아직 없었으니까.
“좋은 아침!”
“네, 안녕하세요.”
신혜영은 로비에서 마주친 원정대장 마르쿠스에, 멋쩍게 웃어 보이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최근 몇 주간 본 얼굴이 슬슬 익숙해질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지금은 그나마 비슷한 피난민 신세지만, 이전엔 까마득히 높은 상사님이었으니까.
일반적인 회사로 따지면 과장급이 이사를 만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분명 몇 번 보긴 봤는데, 결코 친숙하게 느낄 수 없는 현대의 절대적인 신분 차이가 있달까.
자신의 인사 결정권자에게 마음 편히 대하기란 아무래도 쉽지 않았다.
“이야, 벌써 한 달이 다 지났네. 이 개판이 돼도 시간은 참 빨리 지나간다니까?”
“……네, 그렇지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도 나름 파란만장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레벨이 다르다니까? 혜영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예, 저도 그래요.”
신혜영은 자본주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답이 반쯤 정해진 것 같았지만, 어느 정도는 동감하는 바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래? 넘어갈래?”
다만 이런 민감한 질문은 참 대답하기 까다로운 것이었다.
마녀는 슬쩍 고개를 돌리고는 마르쿠스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싱글벙글 웃는 상이었고 동시에 묻고 있었다.
너는 전부 버리고 도망갈 거냐고.
배신자냐고.
“…….”
신혜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경매(입찰) 시작까지 2시간.
*
끼룩─끼룩─!
갈매기 소리가 들렸다.
푸르른 하늘이 보였고, 부슬부슬한 모래사장이 등 언저리에 까슬하게 느껴졌다.
차르륵, 차르륵,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발목 젖는 감각까지 더하니 내가 어딘가 해안에 떠밀려 왔구나.
합리적이랄까, 당연한 생각이거늘, 그걸 너무나도 오랜만에 마주한 듯했다.
“…….”
정신이 말끔했다.
다만 그럼에도 이전의 기억을 놓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주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아직도 내가 겪은 게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할 수 없고, 머리가 몽롱한 것을 보니 아주 푹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시발.”
비척거리면서 일어나 모랫바닥을 디뎠다. 속에서 여러 한심함에 대한 욕지기와 울분이 일렁였으나, 마저 정신을 붙잡고 주위를 살폈다.
정면으로는 끝없는 수평선이, 측면으로는 길게 늘어진 해안선과 기암절벽이 보였고,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야자수와 열대 우림이 보였다. 깨알같이 나뭇가지에 달린 코코넛 열매도.
“……원산지에서 볼 거라고 상상도 못 했는데.”
기대도 안 했고.
괜스레 주위를 몇 번 더 살핀 나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마지막 기억이 없어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무인도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
내가 쓰러져 있던 주위에는 내가 챙겨야 할 어떤 물품도 떨어지지 않았다.
불멸의 닌자도도 없고, 파이어 건틀릿도 없고, 뭔지 몰라도 방패를 산 기억이 있는데, 그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인벤토리─아공간도 열리지 않아,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옷들을 제외하면, 내겐 그 어떤 재산도 없었다.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나마 심장의 마력과 기가 느껴지지 않았다면, 지금까지의 기억이 전부 꿈이었던 게 아닐까.
맹렬히 쏟아지는 햇빛을 따라 그대로 산화해버린 게 아닐까.
한참 동안 의심했으리라.
그리고 꿈이 아니라 분명한 현실인 이상, 나는 어떻게든 살 방도를 찾아야 했다.
지금 당장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쓸 수 있는 무기와 주변에 대한 정보.
나는 일단 해변가의 야자수 중 가장 높은 녀석을 골라 그 줄기를 올라탔다.
그 꼭대기까지, 제법 높은 고도에 올라서서 다시 한번 주위의 전경을 훑었다.
“음, 글렀군.”
앞으로는 나무밖에 안 보였고, 뒤로는 바다밖에 안 보였다.
나뭇가지라도 깎아서 무작정 숲으로 돌입해봐야 하나.
……흐음, 그다지 끌리는 선택지는 아니다.
만일 이곳이 평범한 무인도라면, 그걸로 충분할 테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아서.
──끼에에에에에에에엑!!!
마침 고막을 때려 부수는 야성적인 외침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면 숲 어딘가에 살고 계시는 주민님이 굉장한 히스테리를 앓고 계시는 듯했다.
혹은 굉장한 크기라서 한숨만 쉬었는데 이쪽까지 들렸다던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뭐, 꼭 백악기 공룡을 소환한 듯한 울음소리가 아니더라도 섬 곳곳에서 무분별하게 울려 퍼지고 있는 마력 파장이 이곳이 보통의 무인도가 아님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던전에 떨어졌거나.
이세계에 떨어졌거나.
아니면 본래부터 무인도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스파르타식이었던 것일 테지.
표류한 사람들 모두 죽어버려서 원래 무인도는 이런 혹독한 세상입니다.
라고 알릴 수 없게 되었다던가.
개중 무슨 상황이 되었건 그다지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순진하게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는 게 나으리라고.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다가 문득 바로 옆에 열린 코코넛 열매가 보였다.
맞아, 나 이거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어.
파인애플 통조림과 함께 들어 있는 녀석 말고는 실물과 첫 만남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녀석을 따서 입에 가져다 댔다. 와그작, 와그작 씹으면서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랬다.
“……우읍, 이거 생으로 먹는 거 아니네.”
그리고 껍질을 씹어먹을 필요는 없었단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정신이 말끔한 것과는 별개로 나의 지능 수준은 여전하단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이었고.
‘아니, 이거 의외로 맛있을지도?’
또,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코코넛 열매를 다 먹어치운 나는 마침내 나아갈 행로를 정했다. 야자수에서 내려와 옆으로 몸을 틀었다.
그래, 내가 갈 곳은 숲속이 아니었다.
좌측에 있는 높고 가파르게 펼쳐진 기암절벽……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석산이라 부를 만큼 정말 드높은 녀석.
워낙 높은 지대라서 긴가민가했지만, 인간으로 생각되는 생명체가 다수 존재하는 거로 추측되는 지역이었다.
나만 모르는 것인지 오를 수 있는 길은 눈앞의 절벽밖에 보이지 않는 험지이기도 했다.
‘그냥 숲으로 갈까.’
그래도 공룡인지 뭔지 모를 생명체와 부닥치는 것보다는 말을 알아들을 수도 있는 이들과 소통을 시도해보는 게 나쁘지 않지 않을까.
물론 대진이 더욱 안 좋아질 지도 모르지만, 긴 세월 숲속을 헤메고 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방법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시바, 해보자.”
그렇게 나는 맨손으로 암벽 등반을 시작했다.
***
셀레브리아 대륙의 유스타 왕국. 그 서부 지방은 커다란 석산과 그 정상 마을에 드워프들이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불과 대장장이의 화신, 불카누스에게 축복받았다 전해지는 전설의 일족.
그런 희귀종을 구경하기 위해 찾아오는 불청객은 해마다 있었고, 드워프들은 무언가를 만드는 데에 특출난 이들답게 그에 대한 방비로 여러 대책을 세워놓았다.
본인들의 허락 없이는 넘어설 수 없는 관문부터 시작해, 굴러떨어지는 돌덩이 같은 함정. 올라오는 길가에 방목해 기르는 들소류의 괴물들이 그 극히 일부에 속했다.
초월의 경지에 다다른 이들은 못 막아내겠지만, 적어도 시간 끌기는 할 수준.
유스타 왕국의 드워프들은 그 사실에 자부심이 있었다.
자신들을 감히 건들 수 있는 존재는 없으리라는 생각으로.
소드마스터나 대마법사가 오면, 어쩔 수 없지만, 그 아래는 평정할 수 있는 게 우리라고.
본인들이 만든 세계 제일의 무기들도 전력에 큰 보탬이 될 것임은 분명했다.
거기에 드워프들의 육체 자체가 전사와 굉장히 잘 어울리는 몸이었다.
그 둘이 합쳐지니 다른 종족들과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는 강함이 완성되었다.
그런 사실에 또다시 자신감을 얻은 드워프들은 조금 방만하게 살았다.
기본적인 도시의 경계를 어설프게 하진 않지만, 고지식한 편이라 의외의 가능성을 전혀 검토하지 않는 족속들이었다.
그래, 그들은 예상치 못했다.
설마 전쟁 중도 아닌데, 손님이 멀쩡한 대로를 놔두고, 절벽을 통해 올라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사실 아무리 신중한 사람일지라도 절벽 등반은 전혀 고려하지 않을 만큼 그들이 사는 불카누스 산은 무척 험악한 지대.
그러나 그 지대를 기어코 등반한 철혈의 의지와 육체를 지닌 사내가 있었다.
터억…,
마침내 산꼭대기에 닿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