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진심(心)
* * *
셀레브리아 대륙의 유스타 왕국.
서부 지방─드워프들의 마을이 위치한 불카누스 산봉우리.
대륙의 제일가는 산악지대를 맨손 암벽등반으로 정복한 미친 자가 이곳에 있었다.
“흐음.”
간만에 땅을 디딘 이진우는 찌뿌둥한 몸을 풀며 주위의 광활한 대지를 둘러보았다.
산맥을 오르면 누군가는 만나리라고 기대했건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높고 푸르른 하늘과 지평선까지 늘어진 암석지대밖에 없었다.
또, 여전히 저 멀리서 희끄무레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질 뿐이었다.
‘……내가 원래 이렇게 감지력이 좋았던가.’
이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혜영과 현자의 돌을 연성할 때도, 유한나한테 검술을 교육받을 때도,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이나 응용이 뛰어나다는 칭찬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쩐지 오늘따라 멀리 있는 기운이 잘 느껴졌다.
상태창이나 상점창이 열리지 않는 대신으로 얻은 부가적인 기능이라도 되는 걸까.
‘으음, 그런데 이제 어쩌지.’
제1 목적지로 정한 마력의 기운들은 아직도 먼 지점에 있었다.
저기까지 걷는 건 분명 귀찮은 일이 될 테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파른 절벽을 도로 내려가는 건 절대 하기 싫은 일이었고.
애초에 내려가봤자 할 수 있는 건 뭔가 무서운 것들이 도사리는 밀림을 탐험하는 것뿐이니 결국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진우는 눈매를 좁힌 채로 저 멀리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기운을 노려보았다.
부디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며, 그는 다시 평야를 걷기 시작했다.
아주 오랫동안, 태평하게.
***
불카누스 산맥은 높기도 했지만, 넓었다.
참 오랫동안 걸었다.
이렇게 넓은 게 말이 되나.
슬슬 사람이 보이는 게 맞지 않을까.
사막도 아니고, 지금 오아시스를 쫓고 있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더럽게 머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진우는 계속해서 걸었다. 특유의 끈기를 발휘하며 저 멀리 느껴지는 마력의 기운을 따라갔다.
다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진우는 마침내 성에 이르렀다. 엄청나게 높고 굳건한 성벽이었다.
대한민국의 국군을 데려와도 쉽게 뚫어내지 못할 드워프들의 신비와 마법이 융합한 최강의 성벽.
이진우는 그 성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를 발견한 드워프 마을 [ 불카누스 ]의 경비병 김드워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을 사람들이나 지나치는 후문에 웬 방문자가 찾아온 것일까.
그런 의문도 잠시, 거지꼴과 다름없는 이진우의 행색에 한숨을 내쉬었다.
걸친 옷은 이미 넝마가 된 터라 경비병이 보기에 그는 그냥 거지였다.
‘……그런데 이 거지, 어떻게 여기 온 거지?’
의문도 잠시, 김드워프는 곧 도시에서 개최되는 행사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물’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여행자가 산맥의 경계에 이리저리 휩쓸린 끝에, 이상하게 후문으로 찾아온 듯하다고.
뭐, 괜찮지 않을까.
무기도 없는 인간이 우리 성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그리 생각한 김드워프는 이진우의 입성 허가를 내주었다.
그렇게 이진우는 드워프 성에 성공적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어느덧 이진우는 드워프의 도시 [ 불카누스 ]에 익숙해졌다.
대장장이 신의 축복과 마법이 융합되어 현대의 한국과는 명백히 다르면서도 기술력만큼은 그에 가까운 도시.
최신형 휴대전화도, 전선주도 없었지만, 마력으로 어떻게든 해결하는 세상이었다.
따라서 호텔과 같은 훌륭한 숙소도 존재했지만, 어차피 돈도 없고, 어째서인지 체력도 닳지 않아 그냥 뒷골목이나 벤치에서 몸을 뉘고 잠을 잤다.
그리고 간간이 덤벼오는 부랑자들의 뒷주머니를 강탈하는 식으로 하루를 연명했다.
다른 세련된 방법도 있기는 했다. 모험가 길드에 가입한다거나 도시 부호, 유지한테 능력을 보이고 몸을 의탁한다던가.
이곳이 이세계라면, 새로운 삶을 꾸리는 데 훨씬 좋은 방법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불카누스에 입장하자마자 행인으로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기에 모든 계획을 미루었다.
‘……아이기스의 방패라.’
이진우는 미간을 찌푸리고서 기억을 되짚었다. 흐릿하지만 분명 유한나와 부닥칠 때 마지막으로 소환한 병기였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처음 들린 곳에서 바로 그 이름이 들렸다는 건 보통 우연이 아니었다.
설마 모두가 짜고 치는 ‘이진우쇼’인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그래서 이진우는 기다렸다.
불카누스 제일의 장인이 만들었다는 신물(?物)─‘아이기스의 방패’를 공개하는 그 날을.
그렇게 사흘이 지났고, 대장장이 마을 아니랄까 봐 불카누스는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이진우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북적거리는 거리의 인파를 뚫고 나아갔다.
사람 더럽게 많네.
다만 드워프, 리자드맨, 엘프 등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종족들이 부대끼는 광경은 참으로 신비롭고 신선해 한편으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용건을 처리하고 즐겨도 늦지 않을 일이라 곧 꾸준히 나아가는 데에만 전념했다.
한동안 인파를 헤치면서 꾸역꾸역 나아간 그는 마침내 광장에 이르렀다.
그리고 보았다.
무슨 엑스칼리버마냥 단상에 깊숙이 꽂힌 방패─아이기스의 방패를.
대체 어떤 새기가 방패를 바닥에 꽂아 넣는다는 발상을 한 것일까.
‘아니, 애초에 왜 꽂아넣은 건데.’
이진우는 필연적으로 그런 의문에 다다랐고, 곧 그 의문에 답해줄 어떤 초로의 드워프가 단상에 올라섰다.
자신을 불카누스 최고의 대장장이 ‘에드워프’라 소개한 노인은 이윽고 선언했다.
“대륙 최강의 방패가 이곳에 꽂혀 있다! 모든 걸 막는 이 방패를 원하는 용자가 있다면 직접 뽑아 가져가 보시게! 그래! 어서 덤벼라! 애송이들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불멸의 대장장이 에드워프! 고금제일의 드워프 에드워프! 그냥 최고다! 에드워프!”
광기에 휩싸인 주위 인파에 출렁출렁 휩쓸리면서 이진우는 미간을 짚고 생각했다.
‘음, 아무래도 저걸 뽑아야 할 것 같지?’
그는 어떤 직감을 느꼈다.
아니, 운명을.
*
모두가 잠든 밤.
이진우는 광장을 향해 나아갔다. 뽑는 것 자체는 아침에 해도 별 차이가 없을 테지만, 예상과 다를 수도 있고, 만약 뽑았다가 미친놈의 표적이 되면 귀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결행 시각을 심야로 행한 것이다.
그리고 이진우는 마주쳤다.
단상에 꽂힌 최강의 방패─아이기스의 방패─의 옆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천하제일의 대장장이 드워프─에드워프를.
노인은 온종일 기다리던 도전자의 늦은 방문에 눈을 빛내며 말했다.
“듀얼이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운명을 건 어둠의 듀얼이.
띠링─!
깜찍한 알림음과 함께 단상에 꽂혀 있던 방패가 뾰옹, 하고 튀어나왔다.
마침내 아이기스의 영롱한 표면이 지상에 드러나 세상을 눈부시게 비추었다.
고놈 참 더럽게도 단단해보였다.
이진우는 체육관에서 소꿉친구한테 배웠던 세게 후려치는 법을 떠올리면서 주먹을 매만졌다.
‘진우야, 죽빵은 이렇게 날리는 거란다.’
어떤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반 여자애들과 노래방에 놀러 갔다고 체육관으로 끌려갔을 때였다.
‘더럽게 아팠지.’
이진우는 그때의 기억을 포함해 이때까지 자신이 느꼈던 모든 감정과 고통을 전부 주먹에 담았다.
상태창에 표기된 ‘금화신공’을 인위적으로 발동할 수는 없지만, 이미 몸에 체득된 감각으로 ‘금?’의 기운을 주먹에 발했다.
한때 무협지 독자로서 말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마력으로 권기(??)를 만들어냈다!
“자, 전심전력의 일격을 보여라! 애송이!!!”
최강의 방패를 만들어낸 세계 최강의 대장장이가 외쳤다.
아니…, 이진우는 곧 깨달았다. 자신의 상대는 대장장이가 아니었다.
곧 후려칠 예정인 최강의 방패─아이기스.
반짝반짝 빛나는 표면으로 자신을 마주한 방패는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부딪쳐봐라, 너의 진심을.’
그래, 말하지 않아도 그럴 예정이었어. 이진우는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내뻗었다.
최근 겨우 검만을 다루기 시작한 찐따는 주먹을 휘두르는 법조차 엉성했다.
팅, 하고 청명한 소리만이 방패를 울리고 세상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아이기스의 마음을 울렸다.
‘너의 진심, 닿았다……!’
그렇게 이진우는 레플리카를 넘어 진신(?)의 아이기스와 맞닿았다.
그날, 사무라이는 깨달았다.
방패를 다루는 법을.
[ 금화신공(???)이 발동 중입니다. ]
마침내 이진우는 눈을 떴다.
쨍─쨍그랑─!
‘으음?’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흩날리는 아이기스의 파편이었다.
비록 레플리카였다고는 하나 처참하게 깨져버린 녀석의 모습에, 이진우는 마치 찢어질 듯한 가슴 아픔을 느꼈다.
‘……내 친우가!’
그리고 뒤이어 보이는 유한나의 무표정한 얼굴과 굳게 쥐어진 주먹에 자신의 목숨이 경종에 달했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
이거 조졌을지도.
이진우는 급하게 마력을 운용했다.
“아이기스의 방패를 소환한다!”
이진우의 양손에 황금색 빛무리가 맺히더니 곧 그와 우정─마음으로 연결된 아이기스의 방패가 연성되었다.
……살아 돌아왔구나!
그러나 기뻐할 겨를은 없었다.
소꿉친구의 주먹이 그의 안면으로 살벌하게 날아 들어왔으니까.
‘……유한나의 진심!’
죽음의 듀얼, 제 2페이즈였다.
“와라! 애송이!”
그렇게 외친 이진우는 방금 깨달은 방패 다루는 법을 접목시켜 유한나의 주먹에 맞부딪쳤다! 과연, 소꿉친구의 진심 주먹은 여전히 강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강해졌…!’
와장창창─!
무엇이든 막는 방패 아이기스가 부서졌다.
“……어?”
그리고 곧 이진우의 안면에 진심이 맞부딪쳤다. 기억나는 건 오직 찰나의 고통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