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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화 (1/1,277)

##  1화

중증외상센터에 근무하는 의사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문득 이런 이야기가 오간 적이 있었다.

「와…… 우리 같은 인종들은 저런 사고 당하면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냐?」

「자살해야지 뭐.」

「1초도 생각을 안 하고 척수반사로 말하네. 뇌를 좀 거쳐서 말해.」

「생각한 건데.」

술김에 반쯤 농담 삼아 한 대답이었다.

농담을 해선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잘 몰랐다.

* * *

「컨디션은 어떠냐?」

맞은편에 앉은 친구 녀석이 물어 왔다. 뜨거운 순댓국을 입에 문 채 대답했다.

「하후호하.」

「다 처먹고 말해라.」

김종혁 이 자식이 진짜.

일부러 입안에 든 것들을 천천히 씹으며 노려보자 녀석이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너 원래 신용이란 게 없는 놈이잖아. 맨날 입으론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막상 전날 한숨도 못 잔다든가, 밥도 한 끼 제대로 못 먹었다든가. 별 지지리 궁상을 다 떨어서 사람 환장하게 만들고.」

「뭘 또 환장까지 하냐?」

퉁명스레 말하자 녀석이 인상을 썼다.

「허 참, 오늘 할 말 다 해 볼까? 내가 안 돌게 생겼냐? 니가 그렇게 궁상떨고 다니면 박성재 교수님이 니가 아니라 나한테 뭐라고 하신다고.」

거기서 교수님이 왜 나와?

「뭐?」

「진짜 아무것도 모르네. 지나가다 박 교수님이랑 눈 마주치면 목소리 촥 깔고 김종혁 군, 하고 부르시는데 나한테 무슨 문제 있나 해서 가 보면 짜잔, 오로지 이시윤 씨 일상생활은 잘 하고 사시는지 물어보신다니까?」

「아니, 뭐?」

「이시윤 군은 기본 의식주가 안 되는 사람이니까, 같이 다니는 내가 좀 신경 써서 챙겨 달라고 아주 신신당부시다. 이거 학생 편애 아니냐, 솔직히?」

기본 의식주가 안 된다니 살다 살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본다.

비록 내가 기숙사에 대충 박스 쌓아 놓고 라면을 주식으로 하며 체육복 입고 강의에 들어가는 일이 잦다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저렇게 김종혁을 따로 불러 부탁을 하시면 내 쪽팔림은 대체 누구 탓을 해야 한단 말인가?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고 있자 녀석은 버릇없게 숟가락으로 상을 탁탁 때리며 말했다.

「어쨌든 간에, 냅뒀으면 그대로 오후 4시까지 퍼져 잤을 놈을 모닝콜로 깨워 줘, 옷 입혀서 여기까지 데려와 줘, 지갑 안 들고 나왔다고 국밥까지 사 줘, 세상에 이런 친구가 어디 있냐? 안 그러냐? 캬.」

「그건 그렇네.」

그냥 생각하고 있던 말들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더 이상 팔 쪽도 없었다. 이왕 뱉기 시작한 것을 마저 마무리하기로 했다.

「고맙다. 아무리 교수님 부탁이라지만 귀찮았을 건데.」

「야, 그딴 식으로 반응하면 내, 내가 뭐가 되냐?」

녀석은 드물게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난 씩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아니, 이 미친놈이?」

「출세하면 갚을게.」

「됐으니까 지금부터 좀 잘하라고!」

「생각해 보고.」

김종혁과 투닥거리며 식사를 마쳤다. 시간을 확인하니 여유는 약 3시간. 아직 꽤나 시간이 있었다.

먼저 나와서 한 대 피우고 있자 김종혁이 따라 나왔다. 담배를 안 피우는지라 내 옆에서 멀뚱거리며 서 있던 녀석이 불쑥 말했다.

「너 이번에도 티켓은 보냈지?」

누구한테인지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다.

「응.」

「오신다냐?」

「모르지.」

아무도 모르지.

기대도 하지 않는다.

부모님 두 분은 아주 평범하신 분들이다.

성적과 시험 결과만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내 신분 상승이 곧 부모님 당신의 그것으로 이어지리라고 믿으시는, 그러한 분들이시다. 전형적이며, 평범하다.

내가 평범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중학생 때 이미 난 스스로 진로를 정했었다. 그 어린 머리로 생각해 보아도 내가 가야 할 길은 명명백백했다.

내가 탈선하자 부모님은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날 그분들이 원하는 레일에 올려놓으려 애쓰셨다.

하지만 난 고집을 꺾지 않았다. 부모님 역시 그러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내 부모 되시는 두 분껜 해당사항 없는 말이었다.

당시 제자도 아니었던 날 위해 박 교수님이 직접 찾아와 설득에 나섰지만 어림없었다.

결국 내가 집을 나와 버린 이후 7년간 내 보호자 역할을 해 주신 것은 박 교수님이었다.

스물한 살이 된 지금까지 부모님은 단 한 번도 날 응원해 주신 적이 없었다.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이쯤 되면 본래 부모님에게 무언가 기대를 품는다는 것이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박 교수님은 내가 이미 놓아 버린 기대를 계속 붙들어 쥐고 계셨다.

항상 이상적인 아버지처럼 날 대해 주시는 분이었지만, 콩쿠르나 연주회 때마다 본가에 티켓을 두 장 보내는 일은 절대 그만두지 않으셨다.

내가 몇 번이고 의미 없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이것이 교수님에게 있어 어떠한 죄책감의 발로인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몇 번이고 보낸 티켓이 빈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매번 확인할 때마다, 난 교수님에게 옅은 원망을 느꼈다.

「야, 전화 왔다. 박 교수님 아니냐?」

아뇨. 거짓말입니다, 교수님. 전 결코 그런 불경한 생각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발신자를 보니 진짜로 박 교수님이었다. 피우다 만 담배를 서둘러 비벼 끄고 전화를 받았다.

「예, 교수님. 시윤입니다.」

- 밥은 먹었나.

다짜고짜 묻는 게 식사 여부다. 대체 평소 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 만했다.

「예. 종혁이가 챙겨 줘서 먹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 의식주가 안 되는 놈이니깐요.」

- 자각은 있었는가?

「자각이 아니라……. 교수님. 제가 그렇게 못 미더우십니까?」

- 당연하지. 내가 이시윤 군만 보면 아주 물가에 내놓은 애 보는 것 같아서 불안해 미칠 지경이네.

너무하시네, 정말.

「제 의식주 말고 다른 건 걱정 안 되십니까? 3시간 후 있을 연주회라든가.」

- 그걸 왜 내가 걱정해야 하나? 하하하.

음대 교수가 연주회를 앞둔 제자에게 할 말로는 상당히 부적절하게 들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교수님은 호탕하게 웃었다.

- 본 교수가 세상에서 가장 걱정하지 않는 일이 딱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아파트 집값이고 하나는 이시윤 군, 자네 연주회일세.

「절 강남 아파트만큼이나 믿어 주시다니, 감격스럽습니다, 교수님.」

- 내가 언제 자넬 믿는다고 그랬나? 자네 연주회 말일세.

「아 예…… 제 연주회요……. 그렇죠…….」

- 자네는 본 교수의 머리카락과 더불어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일세. 모르는 사이 언제 어디 가서 동사, 아사, 객사하지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네.

「지금 창피해서 죽을 것 같으니 제발 그만해 주세요…….」

조만간 요리를 배우든지 해야지……. 이 불신 속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을 지경이다.

- 어쨌든.

교수님은 장난스럽던 어투를 거두고 차분히 말씀하셨다.

- 오늘 연주회에는 자네 부모님도 온다고 하셨지. 들었나?

「예?」

- 역시, 자네에게 직접 연락은 안 하셨나 보군. 본 교수에게 전화가 왔네. 오늘만큼은 자네를 보러 오겠다고 말이지.

허…… 하…….

「정말입니까?」

- 정말일세.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후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 홀에서의 기념 연주회인데 이런 중요한 날에 부모님이 빠진다면 말이 안 되지.

「…….」

교수님은 당연하다는 듯 말씀하셨지만, 저 당연함 뒤에 얼마나 많은 교수님의 성의와 노력이 들어갔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진심을 담아 말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 무얼, 본 교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네.

이 또한 박 교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리라. 교수님에겐 피아노 말고도 배울 것이 산더미같이 많았다.

난 언제쯤이면 저런 식으로 타인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호의를 베풀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은 시크하게 말을 맺었다.

- 무대에서 보세.

「예. 교수님.」

전화를 끊고 잠시간 서 있었다.

김종혁이 옆에 다가와 물었다.

「교수님이 뭐래?」

「밥 먹었냬.」

「그것 참 음대 교수님이 걱정하실 만한 일이네. 대단하셔. 그리고?」

「엄마 아빠가 오늘 연주회 보러 오신대.」

「뭐?」

녀석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너네 부모님 오신다고?」

「어.」

「와우…… 와…….」

멍청한 감탄사만을 흘리던 녀석이 난데없이 내 어깨를 퍽 쳤다.

「야, 잘됐네! 뭐 하고 있어!」

「아파, 이 자식아.」

「지금 아픈 게 문제냐? 아니, 이럴 게 아니지. 야, 당장 가서 공연 기획자님 만나 봐야겠다. 네 부모님도 무대로 좀 모실 수 있냐고. 프로그램 끝나고 앙코르 사이에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냐?」

「그건 좀…….」

「뭐가 그건 좀이야. 똑바로 생각해. 이게 대체 몇 년 만에 온 기회인지. 이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참에 부모님이랑 관계 정상화시키라는 하늘의 뜻이라고. 알겠냐?」

흥분해서 마구 떠들던 녀석은 폰을 꺼내서 무언가를 마구 검색하면서 중얼거렸다.

「가만있어 봐. 원래 학교 애들이랑 놀려고 했는데…….」

「야, 그거 싫다고 했잖아.」

「알았어, 알았어. 어차피 다 캔슬 놓을 거야. 연주회 끝나고 디너는 어디로 하지. 야, 내가 진짜 좋은 곳으로 예약해 둘 테니까 연주회 끝나고 무조건 부모님 모시고 그리로 가라. 장소는 문자로 보내 둘게.」

「아니, 잠깐만…….」

「너 한 번만 더 잠깐이란 소리 하면 죽여 버린다.」

「아니, 진짜 잠깐만.」

차마 욕은 섞지 못하고 녀석을 진정시켰다.

「내가 일단 전화를 해 볼게. 우리 쪽에서 일방적으로 그래 봐야 불쾌해하실 분들이야.」

「뭐……? 그런가?」

김종혁은 진정제를 맞은 코뿔소처럼 순식간에 얌전해졌다.

난 폰을 꺼내서 주소록을 열었다. ‘아버지’라고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가 보였다. 대체 언제 전화를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통화 내역을 보니 0건이었다. 이 폰으로 바꾼 지 3년 가까이 되었으니 최소 그만큼은 연락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음……. 어색한데.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김종혁이 인상을 썼다.

「뭐 해, 전화 안 걸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니까 좀 닥쳐 줄래?」

「아이고, 화상아.」

나와 내 부모님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김종혁은 그 이상으로 뭐라고 하진 않았다.

하지만 약간 답답해하는 얼굴로 날 쳐다보더니 돌연 말했다.

「여튼, 일단 콘서트홀로 가자.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빨리 해 둬야 준비가 될 테니까.」

「좀 기다려 보라니까.」

「전화는 가서 해. 가면서 마음의 준비 하면 되겠네.」

김종혁은 제멋대로 말하며 앞장섰다. 엉거주춤 따라가던 나는 순간적으로 등골에 섬뜩한 번개가 내리꽂히는 기분을 느꼈다.

「야……!」

소리를 지르는 것도 늦었다. 이미 검은색 차는 김종혁의 지척까지 다다라 있었다.

그 찰나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난 불과 3시간 후에 가장 중요한 무대를 앞두고 있다.

지금 끼어들어 봐야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차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도 않다.

저 정도면 치여도…….

생각보다 빠르게 몸은 움직였고, 정신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듯한 격통과 함께 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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