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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2화 (2/1,277)

##  2화

눈을 뜨니 모르는 천장이다.

유머감각엔 문제없고.

모르는 천장이지만 여기가 병원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지남력에도 문제없는 듯하다.

정상적인 사리분별이 가능하다는걸 깨달은 후, 몸을 살폈다.

온몸의 뼈가 박살나기라도 했는지 안 아픈 곳이 없었지만 유독 오른손이 붕대와 철사로 칭칭 감겨 있었다.

철사……?

「뭐야, 이게……?」

움직일 수 없도록 고정되어 있는지 살짝 힘을 주니 어마어마한 격통이 밀려왔다.

비명을 지르자 간호사와 의사가 뛰어왔다. 간호사는 밀고 온 카트에서 약병을 꺼내더니 주사기를 이용해 내 팔에 주사했다.

「진통제 주사했습니다. 조금 나아질 겁니다.」

「훅…… 후…… 선생님…… 어떻게, 어떻게 된 거예요? 예?」

고통에 턱을 덜덜 떨며 물었다.

심각하게 차트를 보던 의사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했다. 그의 머릿속에 어떤 단어들이 떠다니고 있을지 불 보듯 뻔했다.

왜냐하면 나도 똑같은 단어들을 떠올리고 있으니까.

잠시 후, 무언가 결단한 듯 의사가 말했다.

「이시윤 씨. 교통사고 당하신 건 기억나시죠.」

「예…… 예.」

「그 상황 전체가 기억나진 않으신가요.」

「잘 모르겠는데요……. 예…… 모르겠어요. 그냥 그 차에 받히고는…….」

정말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의사가 말했다.

「후두부에 충격이 가면서 기절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검사를 조금 더 해 보고 예후를 지켜봐야 알겠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머리는 됐고요. 선생님.」

의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저 없는 평이한 투로 설명했다.

「사고 자체는 경미할 수도 있었는데 하필 운전자가 브레이크가 늦고 핸들을 꺾는 바람에…… 오른손이 차바퀴에 2차 충격을 당했습니다. 환자분 보시기엔 조금 충격적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희 수부외과와 정형외과에서 최선을 다해 치료했습니다.」

「치료……요?」

오른손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내 손은 언젠가 본 철사와 점토로 만든 기괴한 오브제를 닮아 있었다. 언제부터 의사들이 예술가가 되었지?

작은 일은 크게, 큰일은 작게 말하는 것이 의사의 본분이라지만 이건 정도가 좀 심했다.

목소리에 분노가 섞이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며 말했다.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제 손 어떻게 된 겁니까?」

「환자분, 너무 걱정 마시죠. 충분한 재활을 거치신다면…….」

「선생님.」

도중에 말을 자르고 이를 악물었다.

「저 피아니스트니까 확실하게 말씀해 주세요.」

「…….」

「끝난 거죠?」

의사는 적잖이 당혹스러워했다. 이게 부당한 언사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

「알겠습니다.」

「저, 환자분…….」

「됐어요. 상황 파악했으니까……. 수고하셨습니다.」

단호한 내 어투에 의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차트에 무언가 휙휙 갈겨쓰곤 간호사에게 몇 가지 지시했다.

병실을 나가기 전,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환자분, 피아니스트라고 하셨죠?」

「예.」

「그렇다면 슈만에 대해서도 아시겠군요.」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 말입니까?」

「제가 평소 클래식도 즐겨 듣는지라.」

뭔가 더 이어질 이야기가 듣기 싫어졌다.

「슈만 역시 손가락이 병신이 되어서 작곡가로 전향한 사람이죠. 잘 압니다.」

차갑게 잘라 말하자 의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난 저열한 흥분을 느끼며 떠들었다.

「저 역시 그런 전설적인 작곡가가 될 수 있겠죠. 생전 처음 보는 절 믿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미친 사람처럼 쏘아붙이고, 기다렸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제가 의사로 살면서 그렇게 잘 된 환자들을 여럿 봐 왔, 제가 괜한 말을, 재활을 열심히, 간호사 진통제 더 투여해. 등등

수많은 대꾸가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의사는 단 한 마디도 변명하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그는 고개까지 숙여 사과했다. 그러곤 조용히 간호사들을 대동해서 병실을 나갔다.

의사에게 퍼부으려 장전해 두었던 말의 탄환들은 허공에 흩어졌다.

할 말을 잃고 멀거니, 닫히는 병실 문을 보고 있었다.

힘이 쭉 빠져나갔다.

왜 나만 이딴 식이지.

왜.

인생도, 하는 짓도 왜 이딴 식으로밖에 하지 못하지.

복잡한 머릿속 한편에선 손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이성적일 수 있는 게 되레 비정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끓으며 날 몰아세웠다.

부모님과 연까지 끊고 평생을 쏟아부은 피아니스트도 여기서 끝났다. 부모님은 이런 내 삶을 전혀 모르신다.

바로 이번 연주회가 그간 내 인생을 전부 증명할 기회였다. 운이 좋다면 인정받을 수도 있었겠지. 어쩌면 웃을 수 있었을지도.

하지만 아무것도 못 하고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앞으로도 두 분이 날 알아주실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손은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

김종혁.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어 버렸어. 왜 내 앞에서, 내가 끼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거야.

「…….」

멍청한 이시윤. 그렇게 슈퍼맨이 되고 싶으셨나? 기껏 해 봐야 피아노 치는 것밖에 못하는 주제에 왜 끼어들어서 이 꼴이 된 거야? 누굴 탓할 자격도 없어.

「…….」

더 망가져도 돼. 더 소리를 지르고 더 난동을 부려. 그게 정상적인 거야.

지금 난 그래도 돼.

누가 봐도 이해해 줄 거야.

분노든 억울함이든 무엇이든 표출해 버려.

「하…….」

이를 악물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가 모로 쓰러졌다.

거대하고 비극적인 오페라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 기분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하지만 취해선 안 된다.

피상에 취하면 가짜가 된다.

지금 이 순간 박 교수님에게 사사했던 내용들이 떠오르는 이유는 왜일까.

청중에게 정제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숙련된 연주자가 해야 할 일이었다.

희노애락에 집어삼켜져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간 공감 대신 동정과 멸시만이 돌아올 뿐이다.

‘항상 깔끔하게’를 강조하던 교수님이었다. 열정도 깔끔하게, 슬픔도 깔끔하게. 연주도 생활도 모두 깔끔해야만 연주자로서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나 역시 그 가르침에 동의했다. 항상, 추하지 않고, 깔끔하게.

빈말로도 내가 생활을 깔끔하게 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최소한 연주자로서 무대 위에선 깔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연주자로서의 내 역할은 끝났다. 마무리가 추할 순 없는 일이다.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박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들, 김종혁이 떠들었던 잔소리, 자면서도 틀어 놓았던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 왜 이런 것들이 맴도는진 알 수 없었다.

귀중한 가르침을 제멋대로 곡해하지 말라는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누구 목소리인진 잘 모르겠지만, 그게 그 소리든 이 소리든 저 소리든 상관없어.

상관없잖아.

몸을 일으켰다. 옆엔 방금 간호사가 끌고 왔던 카트가 그대로 있었다. 도로 가지고 가는 것을 잊은 모양이었다.

뚫어져라 그것을 바라보았다.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지금 이 순간 역시 운명인 것일까?

“픕…… 크후흡…….”

카트 위에 놓인 정체 모를 약병들을 바라보며 실성한 사람처럼 킥킥거렸다. 도저히 안 웃곤 배길 수가 없었다.

이 또한 누군가의 안배인 거야? 응?

장난이라도 치는 기분이었다. 한 손에 주사기를 들고 대충 아무 약병에나 꽂고 당겨서 주사기를 채웠다.

이것도 조금 저것도 약간, 요거는 뭔진 몰라도 맘에 드니까 좀 많이.

미지의 혼합약물이 가득 든 주사기를 보니 조금 무서워졌다.

「부옇네.」

물론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연주자로서의 생이 끝났다면 내 사람으로서의 생도 끝난 것이었다. 여기서 끝내야만 했다.

작곡가? 그렇게 삶을 이어 나가는 방법도 있겠지.

재활을 하고, 박 교수님을 뵙고 나면 또 어떠한 미련이 생길지 모른다.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교수님은 날 놓지 않으실 테고 비참하고 비루할지언정 살게 만들어 놓으실 것이다.

매사 깔끔하신 교수님도 나에 대해선 깔끔하지 않으신 분이시니까.

교수님이 그런 분이라는 것을 알면서, 잘 알면서도 그런 교수님의 말을 악용해 스스로를 깔끔하게 정리하려는 나는 대체 얼마나 제정신이 아닌 걸까.

「헛소리로 시작해서 헛소리로 가는군.」

떨리는 손으로 링거에 주사를 꽂았다. 아예 꽂으라고 딱 정해진 부분이 있었다.

손에 힘이 없는 건지 힘을 주기 싫은 건지, 손이 부들거렸다.

빌어먹을, 이러지 마.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이를 악물고 주사기를 밀자 희멀건 액체가 링거로 들어갔다. 곧 내 팔에 꽂힌 바늘을 통해 흘러들 것이다.

다 밀어 넣고 나자 마음이 편해졌다.

해냈다.

해낸 것이다.

「개……자식. 곧 만나러 간다.」

최선을 다해 내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남의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을.

하지만 그동안 쌓아 올린 노력과 결과는 딱 1초면 쓸모없어지기에 충분했다.

이 빌어먹을 운명인지 뭔지 모를 게 존재한다면 내 운명을 설계한 놈도 있겠지. 그놈을 걷어차러 간다고 생각하니 의욕이 생겼다.

날 가지고 놀 수 있다고 생각했지?

날 요리도 공부도 못하는데 고집만 세게 만들어서 세상에 던져 놓고, 피아노밖에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이렇게 쉽게 빼앗아 갈 수 있다고 가르쳐 주고 싶었지?

구질구질하게 살면서 우는 걸 지켜보고 싶었지?

이게 내 대답이다, 개자식아.

다시 주사를 들고 약물들을 빨아올렸다. 그리고 링거에 꽂고 눌렀다. 처음이 어려웠지 두 번째는 쉬웠다.

세 번째는 더 쉽겠지?

「으…….」

세 번을 넣고 네 번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 돌았다. 미지의 혼합약물이 효력을 발휘하는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손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웃기지도 않는다. 내가 평생을 손가락 운동만 하고 산 사람이다. 이 정도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기어이 네 번째를 주사하고.

그리고…….

그랬다.

* * *

됐나?

이 정도로 끝났으면 좋겠는데.

미안합니다.

모두들.

* * *

눈꺼풀이 더럽게 무겁다.

그리고 내가 아직 눈꺼풀이라는 걸 가지고 있다는 것에 절망했다.

빌어먹을. 신이라는 건 없어. 그 작자가 양심이 있다면 나랑 대면을 했었어야만 해.

저주와 욕설을 주문처럼 되뇌며 눈을 떴다.

순간 당황했다.

뭐야, 여긴?

살면서 처음 보는 화려한 문양과 장식들이 눈앞을 메웠다. 정말 천국에나 있을 법한 천장이었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눈가와 무기력한 몸은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 주었다.

도저히 가누어지지 않는 목을 힘껏 돌려 옆을 바라보는 것에 성공했다. 폭신한 베개 옆으로 보이는 방과 벽도 만만찮게 화려했다.

창문은 직사각형이 아닌 마치 성문 같은 형태였고, 고풍스러운 가구들은 햇빛을 받아 우아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어딜까, 여긴. 최소한 한국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멍청하게 방을 구경한 지 몇 분이나 흘렀을까? 방 저편에 있는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누군가 들어왔다.

한국인은 아니었다. 서양 여성이었다.

대야와 수건 등을 가지고 들어온 그 여성은 내 쪽을 보더니 그 자리에 굳었다. 입가를 푸들거리며 웃어 주자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타티아나 □□□□□! 아가씨□ □□□□□!”

타티아나. 제보치카.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제보치카라면 러시아 가곡에 나오는지라 간신히 아는 러시아어다.

근데 웬 러시아어?

“□□□ □□□□□□!”

그다음도 전혀 못 알아들을 러시아어만이 이어졌다.

뒤따라 들어온 사람들도 날 보더니 기겁을 해선 저마다 러시아어로 소리쳤다. 개중엔 우는 아저씨도 있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이거 언어 소통에 심각한 문제가 있겠는데?

어쨌건 말이 안 통하면 바디랭귀지를 써서라도 여기가 어디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물어봐야만 했다.

부산한 그녀를 내버려 두고 난 일어나려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오른손으로 몸을 일으키려는 것을 느끼곤 당황했다.

내 손은 티베트에 가서도 못 고칠 상황이었는데……?

기를 쓰고 팔을 들어 올렸다.

이불 안에서 새하얗고 가느다란 팔이 나타났다.

「뭔데, 이거.」

러시아어만이 가득한 방 안에 나 홀로 한국말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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