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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3화 (3/1,277)

##  3화

어른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종국엔 서른 명도 넘게 모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 □□ 타티아나. □ □□□□ □□□□?”

“타티아나 □□□□□. □ □ □□.”

뭔 소린지 전혀 못 알아듣겠다. 그 와중 모두가 날 타티아나라고 불렀다. 쌩뚱맞은 이름으로 불리니 기분이 이상했다.

문제는…… 내가 타티아나가 맞는 것 같단 점이다.

새하얀 팔. 눈가로 흘러내리는 긴 백금발. 힘이라곤 하나도 없는 몸에 가느다란 목소리.

현실은 분명하게 피부로 와닿는다.

알아듣지 못하는 목소리들과 걱정스레 바라보는 눈길들이 꽤나 부담스러웠다.

침대에서 일어난 일 가지고 이렇게 난리인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몸은 꽤나 오래 누워 있었던 듯했다.

약간 혼란이 가시고나서, 나는 조용히 양손을 쥐었다 폈다 해 보았다. 잼잼. 잼잼. 저릿했지만 어쨌든 잘 움직였다.

갑자기 목이 메었다. 한순간에 잃어버렸던 것을 이렇게 되찾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멍하니 손만 내려다보고 있자니 누군가 따뜻한 꿀물을 건네주었다. 혹시라도 떨어뜨릴까 반 잔 정도만 채워져 있었다.

떨리는 양손으로 조심스레 받아 마시자 작은 환호가 일었다. 이 사람들은 어지간히도 날 걱정하는 듯했다.

꿀물을 홀짝이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방문에서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걸어 들어왔다.

한눈에도 보통 사람이 아닌 듯 보이는 아저씨였다. 침상에 모여 있던 수십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르르 물러섰다.

“□□ □□□.”

“□□ □ □ □□□ □□□□□.”

“흠.”

무언가 설명을 들은 아저씨는 불쑥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부리부리한 눈에서 불길이 치솟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타티아나.”

「예, 예에…….」

나도 모르게 한국어로 대답했지만 말이 아니라 거의 신음 소리로 들렸다. 아저씨는 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 □□□□ □□□.”

아, 답답해 돌아 버릴 것 같다.

난 손가락을 들어 내 옆머리를 툭툭 치고, 양팔로 엑스 자를 그렸다.

전 아무것도 기억 못 해요.

아저씨는 눈살을 찌푸렸다.

“□□ □□□.”

같은 제스처를 다시 취해 보였지만 아저씨는 여전히 인상만 쓸 뿐이었다. 이 방법으론 안 될 것 같다.

손가락으로 내 볼을 가리키며 말했다.

“타티아나.”

그리고 아저씨에게 삿대질을 했다.

아저씨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날 내려다보다가 내가 재차 손가락을 흔들자 그제야 대답했다.

“유리 알렉세예비치 베르체노프.”

난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 아저씨, 난 당신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고요. 아시겠어요?

그제야 사태 파악이 좀 되었는지 아저씨가 흠, 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곁에 포진한 사람 중 한 사람을 불러 무언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얘 상태가 왜 이러냐 뭐 비슷한 말이겠지. 그나저나…… 베르체노프? 아까 누가 날 베르체노바라고 부른 것 같기도 한데?

짧은 대화를 마친 유리 아저씨가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타티아나.”

이 아저씨 근데 왜 이렇게 무서워? 키는 190도 넘을 것 같고…….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는 와중 아저씨가 이어 말했다.

“□ □□□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 □ □□□.”

「……예?」

“□ □□□ □□□.”

무언가 의아해하기도 전에, 커다란 팔이 다가와 날 덥석 끌어안았다. 억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한 포옹이었다.

“□□□□□ □□□. 타티아나.”

꼼짝도 못 하고 허리가 부러져 죽나 싶었는데 더 이상 강한 압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슬쩍 보니 세상에, 이 살벌한 아저씨가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

나랑 전혀 관계없는 이 아저씨가 이 몸과 무슨 관계인지는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내 쪽을 향해 진하게 느껴지는 애정은 내가 한참이나 잊고 있었던 그것이었다.

한참을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져 버렸다. 엉거주춤하고 있던 나도 팔을 뻗어 마주 안았다.

내 스스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짓고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운명의 신이란 작자는 나랑 만나면 진짜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무슨 수를 쓴 건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로 러시아에서 깨어나게 된 것이다.

근데 성별은 왜 착각한 거야?

주변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 속에서 한참 동안의 포옹이 끝나고 유리 아저씨, 이젠 아버지가 날 놓아주었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걱정스럽게 날 바라보더니 다시 옆의 누군가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오래 누워 있던 딸이 깨어난 것 까진 좋은데 중증의 기억상실처럼 보이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기쁨과 축복도 잠시, 공기가 무거워져 갔다.

“□□□ □□□ □□□□□□□…….”

“□□□ □ □□□□□…….”

뭐라는지 알아들을 순 없지만 갈수록 조금씩 심각해지는 분위기를 느꼈다.

난 진짜 타티아나도 아니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최소한 멀쩡하다는 것을 알려 걱정을 덜어 주고 싶었다.

말도 안 통하는 러시아에서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라곤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난 만국공통어를 할 줄 알지 않은가?

“□□□□ □□!”

“타티아나!”

무리해서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젖히고 다리를 내렸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침대 밑으로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저릿한 양발을 어렵사리 몇 번 움직이자 차츰 몸이 적응하는 듯했다. 기묘한 감각이다.

“윽.”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덜컥 몸이 기울었다. 유리 아버지가 급히 날 부축했다.

“□□□ □□ □□□.”

침대에 날 도로 눕히려는 듯하여 고개를 가로젓고는 내 발로 섰다.

대책 없는 멍청한 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뭐라 형언하기 힘든 희미한 예감이 날 이끌었다.

방만 해도 이렇게 컸다.

냄새가 난다, 냄새가. 이렇게 커다란 저택이라면 최소한 인테리어용 가구로라도 가져다 놓았을 만했다. 없을 리가 없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조심조심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며 방 밖으로 향했다. 유리 아버지가 내 팔을 잡아 주었고 그 뒤로 수십의 사람들이 따라왔다.

얼핏 웃긴 광경이었으나 온몸에 집중하느라 웃음도 나지 않았다.

“후…….”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방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거쳐 거실까지, 간단한 동선이었지만 복도가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난 온몸에 땀을 흘리며 버거워했다. 얇은 잠옷이 기분 나쁘게 피부에 달라붙었다.

그냥 걷는 일이 이렇게나 힘든 일인지 상상도 못 했다. 와, 재활훈련 한번 제대로 한다.

고생이 무의미하진 않았다.

눈앞에 거대한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이런 세상에…….」

기가 막혀서 중얼거렸다. 있기야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저 길이를 보자면 최소한 모델 C등급이다.

2억 가까이 하는 콘서트용 피아노를 거실에 두다니. 대체 얼마나 잘사는 집인지 가늠조차 안 될 지경이다.

난 비틀거리며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희고 검은 건반들을 보니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양손을 들어 내려 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내 손은 도에서 옥타브 파까지 11도가 넘게 닿는 데다가, 피아노라는 이 육중한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거의 모두 끌어내도록 훈련한 손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은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평생 햇빛을 안 받은 듯 희고 마른 손이었다. 너무 작고, 연약하다.

손을 들어 건반을 짚었다. 손에 힘이 하나도 없다. 몇 번을 그렇게 건반을 눌러 보았다.

손목이 꺾일 것 같다. 소리도 엉망이다. 거의 최악에 가까운 상태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불평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제대로 움직이는 두 손과 최고의 피아노가 있다. 거기에 날 기다리는 청중들까지. 연주자로서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연주하기에 앞서 곡을 고르는 일은 연주자가 갖추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 중 하나였다.

지금 내가 연주할 수 있는 곡. 되도록 빠르지 않고 주선율이 뚜렷하며, 무엇보다 주제가 확실한 것으로.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되어 있던 것처럼 한 선율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양손을 크게 들었다가, 곡의 시작을 열었다.

‘모스크바의 종’.

라흐마니노프의 프렐류드 오푸스 3번의 두 번째 곡.

오래전 쳤었고, 이젠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은 곡이지만 그 멜로디는 너무나 직관적이고 뚜렷해서 잊을 수가 없었다.

청중들이 클래식을 전혀 모르더라도 상관없었다. 라흐마니노프가 그려 낸 종소리는 러시아의 서정성 그 자체다.

천천히 선율을 찍어 나갔다. 남의 손으로 치려니 감이 전혀 없었다. 건반을 내려다보면서 차근차근, 또박또박 소리를 만든다.

옆에서 들리던 사람들의 소곤거림, 호흡 소리마저 작아지더니 종국엔 모두 사라졌다.

그야말로 온몸을 던졌다.

이 작고 약한 손으로 평범한 연주란 불가능하다. 어깨로 밀어붙이듯 건반을 짚었다.

도저히 안 닿을 건반은 과감히 생략하고 다른 화음으로 대체한다. 건반과 혈투를 하는 기분이다.

연주자들끼리 자주 말하는 농담이 있다.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해야 한다고……. 내가 지금 딱 그 상황이다.

이 총체적 난국 속에 라흐마니노프께서 보우하사. 조금 작은 종소리가 되었다.

되는대로, 마음대로 친 것이나 다름없지만…….

생각보단 꽤 괜찮지 않은가?

* * *

요리사 드미트리는 숨 쉬는 것도 잊고 피아노 소리에 파묻혔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클래식 강국인 러시아에 태어나 살면서 거기에 대한 자부심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클래식을 재미없고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대체 수백 년 동안 똑같은 음악만을 하는 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저들끼리 잘났니 어쨌니 해도 어차피 그들만의 좁은 세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평가였다.

하지만 오늘, 피아노가 만들어내는 종소리를 들으며 드미트리는 깨달았다.

사람들이 여기에 왜 미치는지 알 것 같다.

드미트리는 지난 나날을 떠올렸다. 타티아나 아가씨가 누워 있는 동안 저택엔 슬픔과 우울밖에 감돌지 않았었다.

몇 번이고 사표를 낼까 생각했지만 요리사로서의 사명이 그를 지금까지 붙잡아두었다.

그렇게 반년을 버텼다.

혼수상태였던 아가씨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드미트리는 다듬고 있던 재료들을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불행하게도 아가씨는 온전하지 못했다. 사고에 의한 후유증인지 심각한 기억상실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말도 전혀 하지 못했고, 고용인들을 알아보긴커녕 아버지인 유리 님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신 것이 어딘가, 하고 안도하는 한편 앞으로 괜찮을 것인가에 대한 우려와 불안이 다시 고용인들 사이에 스멀거릴 때였다.

몸도 성치 않은 아가씨가 침상에서 내려와선 다짜고짜 방 밖으로 나섰다.

그 태도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의지를 그 누구도 말리지 못하고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타티아나 아가씨는 바로 이 자리가 내가 있어야 하는 자리라고 주장하는 듯 피아노 의자에 가서 앉았다.

모두가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아가씨는 굽어 있던 허리를 펴고, 보란 듯이 당당하게 연주를 시작했다.

드미트리는 이 곡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어두운 음색이 결코 우울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간의 모든 걸 한 번에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드미트리의 옆에 있던 경호원 빅토르가 멍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카메라를 작동시키기 직전, 드미트리가 빅토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 장엄한 부활의 서막을 영상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욕망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드미트리는 무대 에티켓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지금 동영상을 찍는 것이 엄청난 무례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음악이란 연주자의 손에서 태어나 그 자리에서 소멸해 버리는 시간예술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시간을 담아 둘 수 있는 방법은 많아졌지만, 때로는 200년 전의 고전적인 방법으로 간직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바로 머리와 가슴으로.

* * *

종이 멎고, 정적이 흘렀다.

프렐류드를 마무리 짓자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4분 남짓의 느릿한 곡이었지만 4시간을 연달아 친 것처럼 피로가 쏟아져 내린다.

등 뒤로 흐른 식은땀이 식으면서 으슬으슬 추워졌다. 자꾸 목을 가누기 힘들다.

아무래도 이 몸으론 이 정도가 한계치였던 모양이다.

“□□□…….”

누군가 중얼거렸다.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칭찬이겠죠? 고맙습니다. 땡큐. 아, 러시아지. 스파시바.

곧이어 환호와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건넸다. 음, 무슨 말인진 모르겠어요. 어쨌든 고맙습니다.

클래식 연주자로서 이렇게 될 대로 되라 식의 연주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사람들 반응이 나쁘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유리 아버지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그 얼굴 안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나는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흠칫 놀라더니, 이윽고 미소를 지어 주셨다.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한차례 웃음이 번졌다.

모두가 행복해한다. 나 역시 그렇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친애하는 여러분, 전주곡만 쳐 놓고 죄송합니다만…… 전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그대로 건반 위에 머리를 박았다.

쾅 하며 천둥 우는 소리가 들리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주변이 삽시간에 시끄러워져 간다.

아득히 정신이 멀어져 가는 가운데에 홀로 웃었다.

이 모든 게 꿈이라도 좋았다.

날 걱정하는 아버지와 사람들, 그리고 그 모두에게 들려줄 한 곡.

이게 내 인생을 보상하는 마지막 선물이라면, 꽤 괜찮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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