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여한이 없다 했지만 나 또한 사람인데 어찌 미련이 없겠는가.
“헉!”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온몸을 더듬거리며 확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를 쳤던가? 맞지? 분명 이 손으로 쳤었지? 꿈 아니지?
가느다란 손이 내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어…….
내가 일어나서 뺨을 때리고 팔을 꼬집고 난리를 치고 있자 옆에 앉아 있던 여성이 벌떡 일어나더니 우악스럽게 날 움켜쥐고는 다시 자리에 눕혔다.
아주 침대에 파묻어 버리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 □□□□□ □□□□.”
이만 죽어 주시길 바랍니다. 같은 뜻은 아니겠지? 제발 살려 달라는 뜻으로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더니 그제야 손을 놓아주었다.
“□□□□□ 타티아나. □□□ □□□□ □□□□□…….”
뭐라는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처음 이 몸으로 일어났을 땐, 별생각 없었다. 그저 인생막장 보너스 스테이지 같다는 기분을 막연히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두 번째도 이 몸으로 일어나니까 비로소 현실감이 확 짓쳐들었다.
정말 앞으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는 외우기도 어려운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거야? 말 한 마디 통하지 않는 러시아에서? 찬바람 좀 쐬면 독감으로 죽어 버릴 것 같은 여자애로?
다시 벌떡 일어났다. 거울, 거울을 러시아어로 뭐라고 하지?
뭐 어떻게 의사소통을 해야 할지 감도 안 와서 허둥거리고 있자 여자가 빙긋 웃더니 갑자기 내 이불을 확 젖혀서 치워 버리곤 양손으로 날 안아 들었다.
그렇게 달랑 안긴 상태로 방을 나가 복도를 거쳐 어디론가 들어갔다.
도착한 곳엔 현실에 이런 게 존재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화장실이 있었다.
……러시아의 대통령인 푸틴이 사임하고 거기에 베르체노프 왕정이 들어섰단 소리는 못 들은 것 같은데?
날 내려 준 여자는 내 팔을 부축하고 섰다. 그 듬직한 팔에 이끌려 가던 난 문득 세면대 쪽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거울을 쳐다보았다.
잠옷 차림의 희멀건 여자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
키는 160cm 남짓 될 것 같은데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몇 살인지도 잘 모르겠다. 10대 초중반으로 추정될 뿐이었다.
방금 누웠다가 일어났는데도 치렁치렁하게 흐드러지는 백금발과 극히 옅은 하늘색 눈, 그리고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체형이 보기만 해도 불안불안하다.
사람이 아니라 유령이나 인형 같다는 위화감이 들었다.
하지만 난 유령도 인형도 아니었다. 거울을 보고 있으면 현실에서 도피할 수가 없다.
손을 들어 보고 있는데 날 부축하던 여자가 재촉했다. 가차 없이 개인 칸에 밀어 넣어지고 나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도 모르게 가만히 뺨을 쓸어 보았다. 신이라는 작자가 왜 내게 이런 몸을 빌려주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난 중얼거리며 머리를 싸맸다.
현실적이지 않은 일이긴 한데, 현실적으로 보자면 모델 일만 해도 떼돈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에 잘 생각도 않고 살았던 속물적인 생각이 무엇보다 우선할 정도였다.
게다가 이 몸에 따라오는 것은 외양뿐이 아니었다. 고개를 들었다.
화장실 문짝마저도 화려한 문양으로 된 것이, 거의 예술품에 가까웠다. 기가 막혀 헛웃음이 다 나왔다.
일은 무슨 일이야. 아무리 봐도 그냥 일 안 하고 살아도 충분한 집안의 영애임이 분명했다.
가끔 보던 드라마나 영화 같은 게 머릿속에 막 스쳐 지나가면서 꿈 같은 미래도를 그려내고 있었다.
“하아…….”
문제는 내가 그렇게는 못 사는 인간이라는 데에 있었다.
조용히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여태껏 가족도 생활도 없이 피아노만 붙잡고 살아왔다. 몸이 바뀌긴 했지만 이제 와서 다 때려치우고 편하게 살려고 해 봐야 절대 그렇게 못 산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머릿속에 화음들이 떠돌고 손가락이 허공을 더듬는다.
내가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면 얼마 못 가서 정신병에 걸려 어디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들어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애초에 내가 설렁설렁 살 수 있는 인간이었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몸으로 깨어나는 일도 없었겠지.
“□□□ □□□.”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밖에서 무어라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뭐가 어쨌든 여기서 살아야 한다면 일단 러시아어는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것 같다.
고행하는 승려처럼 묵언수행을 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답답해 죽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몸.
불만을 절대 가져선 안 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편하게 사는 데에 만족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난 이대로 살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이 몸은 내게 있어서 상당한 패널티라고 할 수 있었다.
손을 들어 보았다. 이 하늘하늘한 손을 다시 피아노에 맞게 개조하려면 대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
혹자는 피아노를 남성의 악기라고 부른다. 그 정도로 피아노는 신체 조건이 중요한 악기였다.
신체 조건으로는 엄청난 재능을 타고났던 본래 몸으로도 어느 정도 테크닉이 견고해지는 궤도에 오르기까지 수년이 필요했다.
한 번 가 본 길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나는 잘 안다.
난 입술을 내밀며 생각했다. 클래식 세계 최강국인 러시아에서 눈을 뜬 것은 좋지만 피아노를 하려면 되도록 강인한 몸이 필요했다.
기왕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줄 거면 라흐마니노프처럼 키가 2미터쯤 되고 손도 커다란 러시아 남자로 줬으면 좀 좋아?
“□□□□□□?”
한국에서 살던 영혼을 러시아로 보낼 거였으면 알지 못하는 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거라도 주든가.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까?
“□□□□□!”
갑자기 쾅 하고 문이 흔들렸다. 내가 대답이 없자 쓰러졌다고 생각했는지 문을 부수려는 모양이었다.
아니, 이 문짝이 얼마짜린 줄 알고!
놀라서 문을 열자 무언가가 내 쪽으로 날아오려다가 가까스로 멈추었다.
발이었다.
순간 나도, 발을 들어 올렸던 여자도 경악해서 그 자리에 굳었다.
온갖 생각에 시끄럽던 머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거 그대로 맞았으면 한 번 더 죽었겠지? 끔찍한 상상이 들어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여자가 갑자기 달려와 날 붙잡고 덜덜 떨었다.
“아…… □□□□□…… □□ □□□□□ □□□…….”
괜찮다고 그녀를 달래는 데에 한참이나 걸렸다.
하지만 언젠가 느꼈었던 게 분명한, 섬뜩한 감각은 여전히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다시 침실로 돌아온 뒤 생각을 정리했다.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것은 언어 문제와 연주자로서의 몸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
간신히 얻은 또 한 번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 버리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난 이미 한 번 모든 걸 잃어 본 사람이지 않은가.
* * *
아가씨의 상태가 이상하다.
가정교사 마가리타 다닐라 스미르노바는 의구심에 가득 찬 눈으로 그녀의 학생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타티아나가 그녀의 선생을 불렀다. 햇살 같은 머리칼이 한차례 흔들렸다가 내려앉았다.
마가리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티아나는 빈 답안지를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미안함과 창피함이 혼재된 눈동자로 올려다보니 마가리타는 거의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이 애가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가?
마가리타는 당혹스러웠다.
타티아나의 가정교사로 수년간 베르체노프가에 드나들었지만 타티아나는 항상 그녀를 달갑잖아 했다.
대화를 잘 안 받아 주는 것은 물론 그녀를 부를 때도 항상 선생이라고 짧게 부를 뿐이었다.
러시아 최고의 대학 중 하나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을 나와 가정교사를 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진 않았다.
베르체노프가 역시 러시아 최고의 가문 중 하나이니까. 하지만 어린 학생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타티아나가 쓰러지고 상당한 금액을 퇴직금 명목으로 받아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약간 미안하지만 다시는 베르체노프가로 돌아갈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새로 펼 사업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마가리타가 시작한 사업은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기까지 당한 탓에 불과 4개월 만에 굉장한 손해를 보고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크나큰 실패.
그녀가 다시 베르체노프가의 가정교사직을 수락한 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마가리타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다.
외모 하나만큼은 천사처럼 아름답게 생겼지만 항상 건방지고 의욕도 없었던 그녀의 학생을 다시 마주할 생각을 하니 암담했다.
하지만 돈이 필요했다. 직장도 불분명하고 이렇다 할 목돈 없이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마가리타는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는 내 직장이다. 그 어떤 대우도 바라지 말자. 월급만 제때 받아 가면 된다.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타티아나를 마주했을 때, 마가리타는 당황했다.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타티아나가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며 그녀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기겁한 마가리타는 집사에게 당최 어찌 된 일인지 물었다.
집사는 슬픈 얼굴로 타티아나 아가씨께선 병석에 누워 있던 후유증으로 기억상실에 걸렸으니 잘 부탁드린다고 몇 번에 거쳐 거듭 강조했다.
다시 타티아나와 마주한 마가리타는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원래 천성은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아가씨였던가?
그녀는 아직도 타티아나가 차갑게 날을 세우고 폭언을 내뱉던 시절을 똑똑히 기억했다.
지금 모습이 원래의 타티아나라면 대체 그간 어떤 환경에서 무슨 교육을 받으면 사람이 그렇게 바뀔 수 있단 말인가?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 드려야겠네요.”
모두 다.
마가리타는 중얼거렸다. 타티아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도 답답해 죽을 지경인 모양이었다. 마가리타는 그 모습조차 귀엽다고 생각했다.
타티아나는 답답한 만큼 의욕이 넘치는 듯했다. 마가리타 역시 의욕이 생겼다.
말이야 가르치면 된다. 지능에 문제가 없다면 잊어버린 쉬꼴라 과정 역시 금방 가르칠 수 있다. 그런 건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그녀는 타티아나가 지금의 이 성격을 편린이라도 지닌 채 자라 주길 바랄 뿐이었다.
“자, 실력 테스트는 할 필요가 없겠군요.”
타티아나는 러시아 문자인 키릴리차를 전혀 읽거나 쓰지 못했다. 말조차 못 하는데 당연한 일이었다.
내일 초급 교재를 준비해서 차근차근 가르칠 계획이었다.
마가리타가 종이를 걷어 가자 타티아나는 불안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기억을 잃었지만 타티아나는 결코 바보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녀의 선생이 오늘은 수업을 진행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마가리타는 실없이 웃으며 타티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멈칫했다.
1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타티아나는 그저 불안해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타티아나에게 손을 가져다 대자 타티아나는 깜짝 놀랐다가, 곧 그 손길에 머리를 맡겼다.
가늘고 섬세한 머리칼이 느껴졌다. 마가리타는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제가 잘할 테니까…… 정말 이번엔 잘할게요……. 그러니…… 우리 잘해 봐요, 아가씨.”
타티아나는 마치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마가리타의 옷소매를 잡고 당겼다.
엉거주춤 따라가는 사이 타티아나는 방문을 열고 있었다.
침상에서 이제 막 일어난 슬립 차림으로!
“잠깐만요!”
마가리타는 자리에 멈춰 섰다. 타티아나가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다가, 다시 소매를 끌었다. 마가리타는 고개를 저었다.
“그 옷으로는 방 밖으로 못 나갑니다!”
마가리타는 팔랑거리는 슬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런 얇은 옷만 입고 저택을 돌아다니는 것이 허락될 리가 없었다.
마가리타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타티아나에게 어떻게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타티아나는 말은 못 알아들었지만 눈치껏 지금 복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듯했다.
타티아나는 마가리타의 소매를 놓고 물러서더니 방 안을 돌아다니며 서랍처럼 생긴 것들은 모조리 열어 보더니 옷장을 찾아냈다.
그녀는 옷장 가득 걸린 여성복들을 바라보더니 멍하니 그 자리에 굳었다. 그러곤 옷 사이를 헤집기 시작했다.
원피스를 한 벌 집어 들더니 고개를 잘래잘래 저으며 도로 걸어 놓았다.
대낮에 슬립 차림으로 방 밖으로 나서려 했던 아이치고는 상당히 고심하는 듯했다.
“선생님…….”
잠시 후 타티아나가 반 울상으로 돌아섰다.
그저 마가리타를 불렀을 뿐, 다른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의도는 자명했다.
스스로는 도저히 못 고르겠으니 도와 달라는 뜻이었다.
마가리타는 옅게 웃으며 하나부터 끝까지 타티아나와 함께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