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몇 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
첫 번째로 내 가정교사 마가리타는 굉장히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러시아어를 하나도 하지 못하는 날 처음 마주하고 몇 가지를 테스트하는 듯하더니 곧 내 지능엔 문제가 없다는 것을 바로 파악했다.
그리곤 단순히 월급 받고 지식을 전달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진심을 다해 날 가르쳤다. 내가 새롭게 배워야 할 것들은 정말 많았다.
언어는 물론이고 러시아인으로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문화와 관습들, 그리고 조금 더 깊게는 내가 여성으로서 알아야 할 것들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차근차근 배워 나갔다.
잠시 쉬면서 방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엔 피곤해 보이는 표정의 소녀가 있었다. 의식적으로 웃자 거울 속 소녀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웃고 있는 소녀와 남색 원피스는 너무나 잘 어울렸다.
현실은 여기에 있었다. 도망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현실을 통째로 차지한 셈이다.
내가 넘겨준 것 또한 분명히 있었고, 마음 어딘가 한구석이 계속 닳고 닳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 모든 것들을 마음속 깊은 곳에 밀쳐 놓고 현실에 집중했다.
마가리타가 가르치는 대로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들었다.
그것이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진 타티아나의 몸을 빌리고 있는 내가 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의무였다.
내가 요즈음 배우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 두 번째로, 나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는 러시아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부유한 가문인 베르체노프의 막내딸이었다.
세계정세에 대해 무식하기 짝이 없는 나로선 레닌의 나라 러시아에서 부르주아라니 이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린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상상과 러시아는 상당히 달랐다. 푸틴 대통령은 자본주의자였고 사유재산을 존중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여전히 소련 시절의 향수가 남아 있긴 하지만 현대 러시아는 분명한 자본주의 국가였다.
부호가 된 상공업자나 신흥 재벌들은 많았다. 그중에서도 베르체노프 가문은 괴물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거대한 재벌이었다.
석유와 가스 산업에서 시작해 제조업, 유통산업, 심지어는 무슨 타이어 회사까지 자회사로 두고 있었다.
말 그대로 손이 안 닿는 곳이 없었다. 몇 년 전부터는 무기 및 보안산업에까지 뛰어들면서 그 위세는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 되었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내가 이런 정보들을 알아낸 방법은 간단했다.
내 손에 태블릿 컴퓨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재활과 공부 말고는 할 게 없어 온종일 침대에서 요양이나 해야 하는 내 신세가 딱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아저씨 중 한 분이 태블릿 컴퓨터를 가져다주었다.
글은 몰라도 유튜브 영상을 보는 건 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신 모양인데.
나에게 있어선 사막 한가운데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새벽 내내 가지고 놀다가 다음 날 축 늘어졌던 일도 있었다.
단지 졸렸을 뿐인데 날 돕는 사람들이 다들 기겁을 해서 혼비백산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는 늦게까지 깨어 있지 않았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베르체노프 가문에 대해 검색했을 때였다. 쏟아지는 사진과 기사가 수백 수천이 넘었다.
한국에서 살 땐 관심이 없어 잘 몰랐지만 막상 찾아보니 어마어마했다.
재계에선 물론이고 정계에서도 힘깨나 쓰는 모양이었다. 아버지인 유리가 러시아 고관들과 악수하는 사진이 수백 장씩 있었다.
그리고 한 기사는 약간 사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었다.
베르체노프가에서 가족끼리 이탈리아로 여행을 갔을 때 찍힌 사진이 화제가 되어 기사화된 것이었다.
기사에선 유리 베르체노프와 그의 아들딸의 사진을 싣고 있었다.
우습게도 난 이 기사를 보고서야 내 가족 현황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손위에 오빠가 하나 있고, 어머니는 사별하고 없다는 것을.
이 몸을 낳은 어머니였지만 뭔가 다른 감흥이 일진 않았다.
그저…… 여태껏 한 번도 날 찾아오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어서 그냥 그렇구나, 하고 납득했을 뿐이다.
그 사진엔 본래 타티아나의 모습도 찍혀 있었다.
지금 내 머리칼은 백금발에 가깝지만 원래는 훨씬 더 진한 금발이었던 모양이다.
화려한 금발의 그녀는 지금 나보다 열 배는 더 건강한 모습으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녀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지만 아마 나보단 훨씬 더 귀족적이고 빛나는 사람이었으리라.
할 수 있다면 타티아나와 베르체노프가의 명예도, 나 자신도 모두 지켜 내고 싶다.
잃을 것이 많은 내게 있어서 그것이 현실적으로 요원한 꿈에 불과할지라도…….
어디까지 포기하게 될까.
“타티아나.”
세 번째가 등장했다.
내 새로운 형……이 아닌 오빠, 루슬란 유리예비치 베르체노프다.
나는 갑자기 생긴 혈육을 꽤나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막연하게 불안했던 거부감이나 위화감은 별로 들지 않았다.
루슬란이 금발에 훤칠하게 생긴 미남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남매 사이라는 것이 좋았다. 그와 가급적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스스로도 잘 몰랐지만 꽤 예전부터 형제자매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환하게 웃으며 돌아보니 그는 곧바로 송충이 액기스를 원샷한 듯한 얼굴로 질색했다.
유감스럽게도 루슬란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 □□□□.”
그는 인상을 쓰며 방 밖을 가리켰다.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버지의 명령 때문에 직접 날 부르러 온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난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일어섰다.
루슬란을 따라 걷는 동안 그는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찬바람이 쌩쌩 부는 태도였다.
나처럼 몸이 약한 여자애는 얼어 죽어 버릴지도 모르는데 아랑곳하지 않는 듯 했다.
분명 내 잘못은 아니다. 난 루슬란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가 마음에 들었다.
형제라면 얼마든지 오케이였다. 그래서 언제나 웃는 낯으로 살갑게 그를 마주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루슬란은 대경실색하며 날 피했다.
자꾸 피하니까 짜증이 나서 언제는 한 번 눈 딱 감고 팔에 달라붙어 봤더니 그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쯤 되면 거의 트라우마 환자나 다름없었다.
대체 네 오빠에게 무슨 짓을 했던 거니, 타티아나?
남매는 본래 서로를 죽이도록 설계되었다던데 루슬란을 죽이려 들기라도 했던 거야?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불편한 관계로 남는다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되도록 안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타티아나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난 새 가족들과 잘 지내고 싶었다.
다시는 후회하고 싶지 않다.
이런 내 심정도 모르는 루슬란은 말없이 거실까지 날 데려다주곤 어색함을 느꼈는지 곧장 도망쳐 버렸다. 아쉬워도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거실엔 유리 아버지와 처음 보는 아저씨가 있었다. 난 배운 대로 살며시 인사했다. 처음 보는 아저씨가 고개를 숙여 답했다.
병석에서 일어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날 보러 왔었다. 그리고 그간 난 본의 아니게 공평했다.
날 찾아온 누군가는 과한 친밀감을, 누군가는 정중한 축하를 보냈지만 내가 돌려줄 수 있는 것은 미소뿐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뭘 알아야 적당한 대응을 하지 않겠는가? 기껏 생각해 낸 것은 공평하게 연주로 감사를 보내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 유리 아버지는 어마어마한 호응을 보여 주었다. 날이면 날마다 처음 보는 양반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이 또한 하나하나가 모두 작은 연주회라 할 수 있기 때문에 허투루 할 생각은 없었다.
연주자로서 청중이 있다면 대충 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가 옆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타티아나. 이 □□ □□□□□□□□ 선생님□□ □□ □□□□.”
음……?
커다란 안경을 쓴 이 아저씨는 어딘가의 선생님인 모양이다.
선생님이 슥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미하일 표도로비치 볼콘스키.”
오…… 무지 쿨하시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하일 표도로비치.”
악수를 받으며 러시아어로 대답했다. 난 다른 건 몰라도 인사말 하나는 반듯하게 외웠다.
호칭에 대해선 진짜 너무 헷갈렸는데 러시아에서는 이름과 부칭을 함께 부르는 것이 상대를 존칭하는 방법이었다.
무슨무슨 씨라는 뜻의 미스터 미스 같은 개념도 없다. 그냥 이름과 부칭을 부르는 것으로 끝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영어권처럼 볼콘스키라고 성을 불렀다면 아주 이상한 여자 취급을 당했을 것이다.
다행히 마가리타 선생님과 네이버 선생님 덕에 예의에 어긋나는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악수한 손을 힘 있게 두어 번 흔든 미하일 선생님은 마치 길을 터 주듯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 길 앞엔 피아노가 있었다.
“네□ □□ □□□□□□□ 한 □ 연주□□□□.”
뭔진 몰라도 한 곡 쳐 봐라 하는 듯했다. 이렇게 노골적인 양반은 처음인데…….
슬쩍 유리 아버지를 보니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를 얼굴이었다.
가끔 웃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버지는 저런 무표정인 경우가 많았다.
어쨌건 한 곡 쳐 달라는데 거부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 누가 부탁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피아노 앞에 앉았다. 여전히 난 이 몸을 완전하게 다루지 못했다.
훈련되지 않은 손은 건반을 조금만 만져도 금세 뻣뻣해지고 저려 왔다. 끔찍하게 힘들었다.
때문에 유려한 스케일이나 거대한 아르페지오, 빠른 도약 등이 요구되는 곡들은 칠 수가 없었다.
자연스레 요즘 치게 되는 곡들은 왈츠나 녹턴같이 느긋하고 멜로디의 표현력으로 승부하는 곡들이 많았다.
태블릿 컴퓨터를 피아노 보면대 위에 올려놓고 음소거 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어젯밤 미리 즐겨찾기해 둔 유튜브 영상을 전체화면으로 재생시켰다.
시간에 따라 자동으로 넘어가는 자동 악보가 완성되었다. 화면은 조금 작지만 이 정도면 훌륭했다.
오늘 한번 쳐 볼까 싶어 준비한 곡은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소품 OP.51의 여섯 번째 곡. 감성적인 왈츠였다.
왈츠의 기본 박자에 살짝 느끼한 리듬. 기교적으로 크게 어렵지 않지만 그만큼 표현을 잘 하지 못하면 재미없어지는 곡이라 끈적끈적함을 잘 이어 나가야 하는 곡이다.
천연덕스럽게 곡의 시작을 열었다.
별 흥미 없다는 듯 대충 오른손을 던졌다가, 곧 빠르게 따라붙였다.
원하는 대로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연주자의 실력을 살짝 감춰 줄 정도로 풍부한 음색을 내 주었다.
루바토는 어디까지나 왈츠의 박자를 깨지 않으면서도 느긋하게. 왈츠는 어디까지나 춤곡이다.
여기가 살롱이라면 당장에라도 누가 따라서 춤을 출 수 있도록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자연스럽게 왈츠를 추다가 바로 여기다 싶을 때 뻔뻔하게 숨을 고른다.
옥타브 도약은 슬쩍 내가 치기 편하도록 바꿨다. 클래식 연주자로서 옳은 행동은 아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칠 수 있는 곡은 극히 한정된다.
내 욕심을 위해선 많은 것을 타협해야만 했다. 제발 차이코프스키가 용서해 주시길 바랄 뿐이다.
5분 남짓의 곡은 금방 끝났다. 그간 재활을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걸 해결하려면 손가락 자체를 단련하는 하농 연습곡부터 죽자고 쳐야 하는데 이 큰 거실에서 스타인웨이로 하농을 치려니 뭔가 엄두도 안 나서 미뤄 두는 중이었다.
곡을 마무리하고 일어나 우아하게 인사하자 비로소 짧은 연주회가 끝났다.
“아버지?”
유리 아버지가 이상했다. 보통 내가 이렇게 한 곡 치고 나면 조금이나마 웃는 사람이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에 반해 미하일 선생은 입가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냉엄했던 눈빛도 뭔가 조금 더 반짝반짝 빛나는 듯한…… 이 사람, 위험한 사람 아니야?
살짝 경계하고 있는데 미하일 선생이 내게 말했다.
“나□ □□ 가자.”
“□□ □□□□□.”
가만히 있던 아버지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후로 미하일 선생과 아버지는 무언가 대화를 나누었다.
언성이 높거나 하진 않았지만 안 그래도 덩치도 크고 인상이 험악한 두 사람이 빠른 속도로 말하니까 무슨 싸우는 듯한 분위기였다.
저러다가 혹시 한쪽이 다른 한쪽을 후려치진 않겠지? 엉뚱한 걱정이 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미하일 선생이 내 쪽으로 불쑥 다가왔다.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칠 뻔했다.
날 내려다보던 그가 진지하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나□ □□와라.”
아버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 역시 황당했다.
이 양반 뭐야……? 다짜고짜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그 딸을 데려가려고 해? 간이 커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가 진심으로 화가 난 듯 내 앞을 가로막았다.
웃기는 소리지만 나는 아버지의 분노가 기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