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유리 알렉세예비치 베르체노프의 분노는 차갑고 어두웠다.
“돌아가시오, 선생.”
명백한 축객령. 유리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깊은 동굴에서 들려오는 듯한 음울한 목소리,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에 대한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점잖은 것은 아니리라.
목숨이 서너 개쯤 되지 않는 이상 지금은 일단 뒤돌아 도망쳐야 할 때였다.
하지만 미하일 표도로비치 볼콘스키는 그런 신경전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남자였다. 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렇게는 못 하겠군요.”
유리가 위협적으로 한 발 내디뎠다.
“내 인내심의 한계를 확인하려 들지 마시오. 베르체노프가 우습소?”
“그럴 리가. 뒤에 있는 작은 베르체노바에게 내가 얼마나 탄복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탄복이고 자시고…….”
“역시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그러니 내가 그녀를 데려가는 게 낫다는 겁니다.”
미하일의 말은 폭언에 가까웠다. 유리는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데려가? 내 딸을? 내 집에서? 중앙음악학교의 선생에게 그 정도 권력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소.”
“물론 난 중앙음악학교의 하찮은 피아노 선생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유리 알렉세예비치, 지금 당신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 정말 그렇소? 선생의 신변엔 내 의견이 중요할 텐데?”
유리는 새끼를 지키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뒤편에 있는 딸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모든 기억을 잃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 것이다.
절대적으로 지켜 주어야만 했다.
모종의 수단을 사용할 의지도, 힘도 있었다.
수십 년 전엔 꽤 잦았던 일들을 떠올릴 것도 없었다. 전화 한 통화만 해도 미하일이 그를 귀찮게 굴 일은 없어질 것이다.
그런 그의 뒤에 잠자코 있던 타티아나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피아노 선생님?”
미하일이 말한 단어에 반응한 것이었다. 타티아나는 아직 두어 살 된 아기나 다름없는 언어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단지 미숙할 뿐이다.
앞뒤 맥락을 꿰어 맞춰 이해하는 능력은 어디까지나 정상이었다.
타티아나는 미하일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분명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미하일이 말했다.
“그래. 난 피아노 선생이다.”
“제, 피아노 선생님?”
“아직은.”
그 말에 유리가 코웃음 쳤다.
“헛물켜지 마시오. 내가 이 아이의 아비로 있는 한 그럴 일은 없을 테니.”
“비웃으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따님은 이미 음악가로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 무대를 만드신 게 바로 유리 알렉세예비치, 당신 아닙니까?”
유리는 잠시 조용히 그를 노려보았다 미하일 역시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공격태세를 준비 중이었다.
그는 혹여라도 유리가 아이들의 재롱에 불과하다는 둥 그런 소릴 한다면 진심으로 화를 낼 작정이었다.
천하의 베르체노프고 나발이고 상관없었다.
유리 역시 느끼는 바가 없진 않았다. 유리는 씹어뱉듯 말했다.
“이것도 오늘로 끝이오.”
“대체 왜…….”
“맞소. 내가 잘못 생각했소. 이럴 줄 알았으면 타티아나가 아무리 원했어도 말렸어야 했소. 늦게나마 깨달았으니 그만두어야지.”
“이 정도 재능을 보인 따님을 평범한 학교에 다시 보내시려는 겁니까?”
미하일이 이곳에 찾아온 것은 그의 친구 류보프의 소개 때문이었다.
류보프의 말에 따르면, 연줄이 있었던 베르체노프가의 여식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기에 축하 인사차 방문했더니 멀쩡히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었단 것이었다.
후유증으로 말도 똑바로 하지 못하는 소녀가 보여 준 연주에 류보프는 적잖이 감동한 듯했다.
열네 살밖에 안 된 여자아이의 연주에서 말끔하게 정돈된 페이소스를 느꼈다, 쇼팽의 마주르카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하더라, 등등.
그렇게 류보프의 이야기를 듣던 미하일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그의 친구는 문외한이 아니었다. 류보프는 충분히 클래식 애호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식견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이다.
‘마주르카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라는 평은 완벽에 가까운 찬사였다.
그길로 미하일은 베르체노프가로 향했다.
그리고 타티아나가 들려준 차이코프스키의 왈츠에서 그 편린을 찾아내었다.
미하일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 소녀를 중앙음악학교에 입학시키지 않으면 대체 누굴 입학시키란 말인가?
하지만 소녀의 아버지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미하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만찮은 가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맏아들이 아닌 딸이라면 혹시나…… 하고 생각했다.
안일했다. 유리 알렉세예비치는 당장 그를 잡아 죽여 버릴 것처럼 살기등등한 눈을 하고 있었다. 접근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젠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미하일은 새로운 천재에 굶주려 있었다.
“유리 알렉세예비치. 정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죠.”
“미치겠군. 선생, 대체 왜 이렇게 끈질기게 구는 것이오? 중앙음악학교라면 가고자 하는 학생들이 줄을 섰을 텐데. 대체 왜?”
“지금이 아니면 따님 앞에 선생들이 줄을 서게 될 테니까요.”
“치켜세워 준다고 내가 혹할 것 같소? 이 아이가 교양으로 피아노를 배운 것은 지금보다 한참 어릴 때였소. 그땐 잠자코 있던 재능이 이제야 눈을 떴다고?”
“보시면 아시지 않습니까?”
“모르겠소.”
“그렇습니까.”
미하일이 중얼거리더니 타티아나에게 말했다.
“네가 말을 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다만.”
타티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미하일은 드물게 웃었다.
“좋아. 내가 도와주지. 쇼팽의 마주르카를 쳤었다고 들었다. 쇼팽. 마주르카. 알아들었겠지?”
미하일은 그녀가 무슨 말을 알아듣고 무슨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지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대답했다.
“예.”
“지금도 칠 수 있나?”
이번엔 알아듣지 못한 듯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미하일이 피아노 쪽으로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타티아나는 현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는 옅게 웃더니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유리는 타티아나를 막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타티아나가 의자에 앉아 건반을 마주하고 등허리를 펴는 순간, 유리는 그녀와 피아노 사이에 끼어들 수 없게 되었다. 무언가의 시작이 준비되고 있었다.
유리가 갈등하는 사이 타티아나는 태블릿으로 쇼팽의 마주르카 한 곡을 골라내었다.
OP.17 4개의 마주르카 중 네 번째 곡.
마주르카 역시 3/4박자의 춤곡이다. 얼핏 왈츠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주르카는 왈츠와 트로트만큼이나 다르다.
독특한 템포 루바토와 마주르카 리듬에 대해 혹자는 폴란드인이 아니면 완전한 마주르카를 칠 수 없다고 평하기까지 했다. 미하일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그렇게나 표현이 까다로운 곡이다.
집중적인 교육을 받지도 않은 평범한 소녀가 아무렇게나 칠 수 있다고 연주가 되는 곡이 아니었다.
“맙소사…….”
하지만 타티아나가 건반을 채 열 번 누르기도 전에 미하일은 전율했다.
결코 완벽한 연주라고 할 순 없었다.
악보대로 깔끔하게 연주하는 것은 고사하고 기본기가 부족하니 손가락을 마음대로 가누는 것 자체도 힘겨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엉망. 클래식 피아노를 가르치는 교사의 입장에선 납득이 안 되는 0점짜리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들끓는 욕심은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자기주장 강한 쇼팽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감 넘치는 음색이다.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 와중 길을 잘못 드는 일 없이 마주르카 리듬을 지켜 나간다. 개성적인 면과 보수적인 면이 혼재되어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고 쳐도 말이 안 되는 수준의 깊은 고찰과 연구가 압축되어 있는 연주였다.
이쯤 되니 고친 화음마저 개성적으로 들렸다.
최소 십수 년은 쇼팽을 쳐 온 피아니스트의 노련함이 여기에 있었다.
테크닉은 초심자인데 표현력은 원숙한 피아니스트라니,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연주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엔 상식 밖의 일이 얼마든지 일어나기도 하는 법이다.
곡이 끝나고, 타티아나가 일어나 인사했다.
미하일은 넋이 나간 듯 박수를 쳤다.
“대단해.”
더 이상 길게 뭐라 평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기교가 부족해? 힘이 모자라?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음악성은 그보다 훨씬 값지다.
그저 대단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미하일의 칭찬에 타티아나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다시 한 번 확신을 얻고 나니 그제야 얼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말 예쁜 소녀다. 미하일은 이 작은 소녀에게서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읽어 내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수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오로지 이 재능을 개화시키기만 하면 된다. 살짝 햇빛을 쬐여 주는 것만으로도 활짝 피어오를 것이다.
만개한 타티아나를 세상에 풀어놓기만 한다면, 그다음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클래식계에 거대한 태풍이 휘몰아칠 것이다.
미하일은 다시 확신에 찬 어조로 강하게 주장했다.
“유리 알렉세예비치, 확실하게 말씀드리죠. 결코 흔한 재능은 아닙니다. 따님은 천재입니다.”
“…….”
유리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미하일은 중앙음악학교의 선생이었다.
그런 사람이 타티아나의 재능에 대해 이렇게나 열성적으로 말하는데 상대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유리가 아니라고 끝까지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단지 아버지로서 의견을 낼 수는 있었다.
유리가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겠소. 나는 타티아나가 무엇을 원하든 간에 그 손에 쥐여 줄 능력이 있는 사람이오. 작은 생과일 주스점 주인부터 거대 기업의 오너까지. 딸아이가 원한다면 나는 그 무엇이든 줄 것이오. 하지만 피아니스트는 이야기가 다르오.”
유리는 클래식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모스크바 음악원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중앙음악학교만 보더라도…… 전 세계 굴지의 음악가 지망생들이 모이는 러시아의 자랑이오. 난 절대로 그들을 무시하지 않소. 그곳에 내 딸이 열네 살에 들어가 쟁쟁한 천재들과 경쟁하고 시험을 보고…… 잘해 나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타티아나가 그들 모두를 압도할 만한 천재성을 지니고 있지 않는 이상 분명 좌절하는 일도 많을 거요. 난 그 자체가 싫고, 때문에 막고 싶소. 내가 왜 그런 길을 허락해야 하오?”
유리가 진정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말했다.
“내가 유리 알렉세예비치 베르체노프인데.”
이렇게까지 나오자 이번엔 미하일의 말문이 막혔다. 흥분해 있던 머리에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이었다.
정확한 판단이었다. 아무리 타티아나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녀는 열네 살이었다. ‘겨우’가 아니라 ‘벌써’였다.
바로 올해 9월 편입한다고 쳐도 중앙음악학교 8학년. 한참이나 늦은 나이인 것이다.
낙관적으로 보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찾아낸 것이 다행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도 세상살이 알 만큼 아는 어른이었다. 현실이 그리 녹록하진 않은 법이다
미하일은 마지막 구명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해 봐야 아는 일 아니겠습니까? 스비아토슬라프 테오필로비치 리히테르 역시 늦은 나이에 데뷔했지만…….”
“궁색하군.”
“…….”
“선생. 나는 그런 특수한 예외를 일반적인 일인 양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오. 내 말이 틀렸소?”
미하일은 대답하지 못했다. 타티아나를 높게 평가하긴 하지만 전설이나 다름없는 피아니스트와 비슷한 레벨에 오를 수 있으리라고 딱 잘라 확언할 수는 없었다.
미하일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타티아나는 진짜 천재였다. 중앙음악학교의 선생을 전율하게 만들 정도의 음악성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천재성을 지녔더라도 피아니스트가 되는 길이 험난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대재벌 베르체노프의 하나뿐인 영애라면 굳이 그런 길을 택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이해가 갔다.
미하일이 고민에 빠져 침묵하는 사이 유리가 지극히 현실적인 의견을 개진했다.
“나는 가정교사를 통해 타티아나에게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치고 나서 준비가 되면 마르포 마린스키 여학교에 보낼 생각이었소. 정교회 수도원 소속 여학교라 깨끗하고, 가깝지. 본래 똑똑했던 아이였으니 금방 적응할 수 있을 테고 곧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유리는 손가락을 들어 피아노를 가리켰다.
“피아노? 얼마든지. 여성에게 악기만큼 좋은 교양도 없지. 그리고 원한다면 개인 리사이틀이라도 열어 주면 되는 일 아니겠소?”
유리는 타티아나의 자유를 빼앗을 생각이 없었다. 다만 보수적인 아버지로서 합리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베르체노프가는 러시아 전체를 통틀어도 손꼽을 정도로 부유하고 지체 높다.
그런 가문의 안배 아래에 보장된 길은 그저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두 남자를 지켜보던 타티아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미하일은 러시아의 음악학교 선생이었고 타티아나를 입학시키려 한다. 그리고 유리는 그것을 반대한다.
대화를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피아노? 얼마든지.’라고 가볍게 말하는 어투에서 이미 읽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버지.”
판단이 선 타티아나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가만히 미하일의 옷소매를 붙잡는 것으로 그녀의 의사는 확실히 전해졌다.
유리 알렉세예비치의 분노가 이번엔 그의 딸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