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음.
망한 것 같지?
“□□ 그 □ □□□.”
유리 아버지가 조용히 말했다. 차디차게 얼어붙은 눈빛에서 광활한 시베리아 벌판이 보인다.
더 화를 내시면 내가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참고 계시는 게 눈에 보였다.
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어차피 조만간 아버지와 했어야 할 이야기였다.
원래 말을 좀 배운 다음에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는데, 저기 내 편이 되어 줄 음악 선생님이 있는 지금이 더 적기인 것 같았다.
내가 물러서지 않고 올려다보자 아버지는 팔짱을 턱 끼더니, 할 말이 있으면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날 노려보았다.
기회를 주시는 것 같지만, 내게 있어선 기회가 아니었다.
할 말이 아무리 많아도 러시아어로 표현할 줄 모르기 때문이었다.
입만 뻐끔거리고 있자 아버지가 회심의 일격을 가해 왔다.
“□ □□ 말□ 하지 □□□.”
“…….”
유리 아버지는 내가 말을 못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조금 치사했다.
팔다리 묶인 채로 바다에 빠진 기분이었다. 숨이 막혀 왔다.
난 답답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원하는 게 뭘까. 아마 피아노를 전공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학교에 진학하는 걸 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내가 타티아나로서 가야 할 길일지도 모른다.
내게 저항할 자격이 있는가?
모든 것이 바뀌었고 내 것이 아닌데도, 난 다시 한 번 피아노 연주자를 목표로 해야만 하나?
운명은, 그리고 타티아나는 날 허락한 것일까?
“…….”
머리가 아프지만 자격론을 제쳐 놓고 적어도 한 번은 내 의지를 전하고 싶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무언가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조금 더 자극적이고 감정적인 의사소통 방식들을 떠올랐다.
방법은 수없이 많았다. 아버지가 날 반대하실 수 없을 정도로 과격한 짓들. 충동적이고, 자기파괴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한 짓들.
열네 살이 쉽게 할 수 있는 것들.
여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난 이를 악물고 도리질 쳤다.
한 번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짓거리를 해 놓고 또 그걸 반복하겠다고? 그럴 순 없었다.
이를 얼마나 앙다물었는지 턱이 아플 정도였다.
여전히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가에 대해선 의문이 많지만, 분명히 이건 내 아픔이기도 했다.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다.
다시 한 번 유리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평생을 얼마나 낙심하고 자책했던가. 부모님과 대립했던 그 순간, 다시 한 번만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고 얼마나 후회했던가.
지금 그 때가 왔다.
두 번 후회하진 않는다.
“아버지.”
가만히 부르자 아버지가 고개를 주억였다. 난 조금 웃어 보이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조용히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단 몇 초지만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 주어졌다.
최대한 진심을 담아 고했다.
“저. 피아노. 하겠습니다.”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볼썽사납게 눈물을 흘리거나, 인상을 쓰진 않았다. 오로지 내 의지를 있는 그대로 보일 뿐이었다.
열네 살이었다면 절대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겠지.
도대체 왜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느냐고,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렸겠지.
그리고 모든 것을 잃었을 것이다.
이제는 안다.
부모 자식의 관계를 떠나 한 사람으로서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다면, 자식 역시 부모를 부모 이전에 한 사람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다.
이 관계에 어리광이나 억지 따위는 개입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부탁드립니다.”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여기까지였다. 아는 단어도 여기까지였고.
더 이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
적막이 내려앉았다.
3초도 지나지 않아 창피해졌다.
시간이 좀 지나고 머리가 식으니 지금 내가 한 짓도 거의 어리광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깟 무릎 정도 꿇었다고 다 쉽게 풀리면 세상살이 퍽이나 쉽겠다? 당장 오늘 밤에 자다가 불쑥 생각나서 이불 걷어차게 될지도 모르겠다.
민망함에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묵직한 침묵이 어깨를 내리눌렀다.
그냥 일어나기도 뻘쭘하고 눈을 피하기도 애매해서 갈등하고 있자니 그게 불쌍해 보이긴 했나 보다. 머리 위에서 아버지로부터 대사면의 은전을 입었다.
“타티아나.”
아버지가 다시 다가와 내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워 주었다. 얼음장처럼 굳어 있던 얼굴이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네□ □□□ □□ 해라.”
“……?”
어라 잠깐만. 이거 허락 떨어진 거 맞지?
확신을 갖지 못해 눈만 깜빡이고 있자 아버지가 웃으며 피아노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피아노 해라.”
“……!”
너무 놀라서 어찌할 바도 모르고 주춤거리고 있는데, 아버지 쪽에서 날 덥석 끌어안았다.
“타티아나. 네□ □□ □□ □□□□, 난 네 □□□.”
말이란 건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이름이랑 인칭대명사 빼곤 전혀 알아듣지 못해도 이 응원과 애정이 피부로 느껴지는데, 대체 말이란 게 왜 필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그래도 말로 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
“고마워요.”
아버지는 조금 더 힘을 주어 날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그리고 다시 진중한 어투로 내게 말했다.
“□□ □□□ □□. □□□□□□ □□ □□□□□ □□ □□□. □□□□□□ □□□□ □□□□□ □□ □□□□□.”
세상에 정확한 의사소통만큼 중요한 게 또 없군요.
좋은 분위기를 깨기 싫어서 방긋방긋 웃고 있지만…… 숨이 막혀 왔다. 진짜 인정사정없는 러시아어의 폭력이었다.
있잖아요, 아버지……. 방금 제 부탁 들어주시자마자 바로 좀 죄송한데요. 제발 제 사정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뭔가 중요한 이야기 하시는 것 같은데 진짜 한 단어도 못 알아듣겠거든요.
* * *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미하일은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열네 살밖에 안 된 여자아이가 무릎을 꿇고 제 부모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해 달라 간곡하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허…….”
무릎을 꿇은 자세에선 일말의 추레함이나 가벼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태도가 너무나 올곧고 고상하여 먹먹한 감동마저 느껴졌다.
커다란 빙산처럼 타티아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유리의 표정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베르체노프가는 유서 깊은 명문가로서 귀족적이고 엄한 가풍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의 화끈한 직구엔 뻣뻣한 아버지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허락이 떨어졌다.
미하일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지, 그래야지. 저 아가씨는 반드시 데려가서 최고로 키워 내야만 했다.
러시아 최고, 아니 세계 최고로 키워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미하일의 머릿속엔 타티아나의 기본기부터 확실히 다잡을 철저한 커리큘럼이 준비되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의 허락엔 조건이 따라붙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특별편입으로 쉽게 들어가려는 것은 반대다.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시험을 쳐서 입학하거라.”
이 조건에 미하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당장 타티아나의 실력엔 문제가 많다.
때문에 입학시험 대신 음악학교의 선생이 재능 있는 학생을 학교로 데리고 오고 싶을 때 쓸 수 있는 권리인 콘탁kontakt 실기를 쳐서 일단 옆에 두고 가르칠 생각이었는데, 유리는 절대 그런 것을 허락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어찌 되었건 유리는 러시아인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보수적이고 깐깐했다.
그는 엄청난 부와 권력을 지니고 있지만 예술에 있어서 그런 것들이 영향을 끼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하일 역시 그 점엔 동의하고, 감사할 따름이지만…… 약간 속이 쓰린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 와중, 미하일은 타티아나의 미소가 불안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눈치챘다.
마치 다 알아들은 척 생글거리고 있지만 사실 하나도 못 알아듣고 있음이 역력했다.
“후…….”
미하일은 한숨을 푹 쉬며 부녀에게 다가갔다.
“유리 알렉세예비치.”
“무슨 일이오, 선생.”
“마음을 정하셨으면 이제 따님의 시간을 제게 좀 내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흠.”
유리는 한 번 내린 결정은 되도록 번복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멀리 가진 않았다. 그는 아직도 미하일을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
미하일은 가지고 온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한 장 찢어 냈다.
그리고 타티아나가 볼 수 있도록 곁에 선 상태로 만년필로 또박또박 한 자씩 글자를 쓰면서 발음을 불러 주었다.
“하이든. 소나타. 호보겐. 16-23. 1악장. 알레그로.”
그리고 검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알아들었을까?
다행히도 타티아나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은 확신했다. 역시 이 아가씨는 음악 쪽에 대해선 기억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분명 듣기론 식사법조차 모조리 잊어버렸을 정도로 심각하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방금 그녀의 아버지 앞에서 보여 준 의지와 연관된 기적인지 무엇인진 잘 모른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녀가 준비해야 할 곡들을 알려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쇼팽. 화려한 변주곡. 오푸스.12.”
손가락 두 개를 올렸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자유곡.”
러시아 최고의 음악학교.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의 8학년 편입 시험은 이렇게 세 곡으로 이루어진다.
미하일은 조금 망연해졌다. 다 써 놓고 보니 말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8월에 있을 시험에 맞추려면 반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반년 사이 세 곡이나 실기시험곡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완성하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한 일정이다.
그렇다면 1년 더 시간을 들여서 내년을 노려야 하는데…… 내년이면 타티아나는 열다섯 살이다. 더더욱 늦어지는 것이다.
정식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게든 특별편입으로 데리고 가서 지도하는 것이 빠르다.
미하일이 유리에게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하이든? 으음…….”
타티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신의 태블릿에 하이든의 소나타 악보 영상을 띄웠다.
그러곤 영상을 휙휙 돌려 보았다. 영상 전체를 한 번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데에 30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가서 앉더니 영상을 다시 처음부터 재생시켰다.
미하일이 설마, 하며 경악하는 사이 타티아나가 영상을 따라 연주를 시작했다.
“맙소사.”
지금 초견으로 하이든의 소나타를 치고 있는 건가?
미하일이 가서 태블릿을 뺏어 들자 연주가 멈췄다. 타티아나는 물끄러미 미하일을 올려다보았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테크닉이 무르익지 않더라도 특출 난 감성과 박자 감각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다. 그건 충분히 타고날 수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악보를 읽는 능력은 전혀 다르다.
생전 처음 보는 언어를 익히는 것과 똑같다. 익숙하지 않은 문자를 놓고 처음엔 발음하는 법을 외운다.
그다음 더듬거리면서 읽어 나가고, 그것이 숙달되면 마침내 슥 훑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허밍을 흥얼거리는 아기는 있을 수 있어도 동화책을 읽는 아기는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 신문을 읽는 아기가 있었다.
미하일이 보기에 타티아나는 악보에 굉장히 익숙한 상태였다. 그것도 어지간한 피아니스트에 가까울 정도로.
“알 수가 없군.”
모든 것을 잊어버렸지만 음악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다.
기가 막혔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모조리 까먹으면서도 음악의 언어는 잊지 않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미하일의 의구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타티아나는 약간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른 태블릿을 달라는 듯했다.
미하일은 그제야 그녀에게 사과하고 태블릿을 돌려주었다. 다시 영상이 재생되고, 연주가 이어졌다.
“…….”
스케일은 절뚝거리고 미스도 굉장히 많다.
앞서 연주한 차이코프스키의 왈츠나 쇼팽의 마주르카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게 다 선곡으로 실력을 숨긴 것이었다.
하이든의 소나타를 치는 것을 보니 이건 기본기가 부족한 수준이 아니라 기본기가 아예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저 손은 피아노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손이었다.
중요한 것은 타티아나 본인도 그것을 잘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손가락을 절 때마다 기를 쓰고 끌어다 붙이는 것이 느껴졌고, 레가토가 끊어질 것 같으면 서스테인 페달로 이어붙이는 것이 느껴졌다.
무너지지 않도록, 사라지지 않도록. 이를 악물고 악을 쓰면서 음으로 된 탑을 쌓아 올리려고 발버둥 치는 음악가가 여기에 있었다.
1악장을 전부 친 타티아나는 전신이 땀에 젖은 상태로 양손을 번갈아 주물렀다.
가쁘게 숨을 고르면서도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귀기 서린 뒷모습을 보며 미하일은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6개월 만에 중앙음악학교에 편입.
상식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비상식의 집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가씨에게 그 도전은 해 봄직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