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 편입학 시험. 그것은 이전엔 꿈도 못 꿨던 러시아의 피아니즘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러시아는 독일과 함께 세계 클래식 음악계를 이끌어나가는 최고의 클래식 선진국이었다.
중앙음악학교에서 배운 다음 모스크바 음악원까지 갈 수 있다면 피아니스트로서 최고의 길을 걷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만약 오늘을 망쳐서 떨어진다면 9월부터는 꼼짝없이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마르포 마린스키 여학교에 들어가야 할 판이다.
거긴 막말로 돈 좀 있는 가문의 여자이기만 하면 받아 주는 곳이었다.
“…….”
이렇게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알고 있다면 당장 1분 1초도 아까워하며 피아노 앞에서 연습을 하는 게 정상적인 수험생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머리를 비운 채 적당히 유튜브로 아무 영상이나 틀어 놓고 드러누웠다.
고양이를 열여섯 마리나 키우는 유튜버의 영상이 떴다. 와, 나는 내 몸 하나도 관리가 안 되는데 저렇게 많이 관리가 되나……?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영상을 보고 있다가, 얼굴을 감싸 쥐고 웅크렸다.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던 걸까.
타인의 몸으로 눈을 떠서 스스로를 증명하겠다는 그 이기적이고 추상적인 목적으로 또다시 피아노와 함께 사는 삶을 택했다.
하지만 난 이미 끝나 있던 게 아니었을까.
이 몸이 내 것이라는 착각과 오해로 잊어야 할 과거를 못 잊고 아직도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게 아닐까?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내 영혼으로 타티아나의 몸을 우선하는 게 낫지 않겠어?
왜냐면, 난 그저 지금 이 삶이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잖아.
“젠장…….”
이딴 생각을 하려면 진즉 했어야지. 반년이나 지났어. 오늘 당장 실기 날이고. 대체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야.
이 약해 빠진 손 때문에 답답해 죽을 지경이지만 그건 그냥 내 기준이 너무 높을 뿐이야. 갈등 같은 건 죄다 집어치워.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보면 알 것 아냐. 어디까지 할 수 있나 한번 끝장을 보자고.
타티아나? 알 게 뭐야. 망령인 내게 이 몸을 떠맡기고는 사라져 버린 애를 생각해서 뭐 해?
끝난 건 내가 아니야. 그 애지. 난 여기 분명히 존재해. 그리고 그 누가 뭐라 해도 난 연주자야. 연주자로 살아야 한다고.
그냥 가. 가서 실기를 치고 중앙음악학교 문짝을 부수고 들어가 버려. 지금도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잖아.
건방진 러시아 꼬맹이들을 모조리 짓눌러 버리고 재미 좀 보자고.
아무리 덜떨어진 반푼이라지만 그래도 피아니스트였잖아? 내가 나가서 상 받아 온 국제 콩쿠르만 열 손가락…….
“아가씨. 계십니까?”
“앗…….”
깜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드, 드, 들어오세요.”
바보처럼 더듬거리며 말하자 끼익 하고 방문이 열렸다. 안경을 쓰고 칼 같은 양복을 갖춰 입은 초로의 남자. 집사장 예고르였다.
“예고르…….”
아버지가 공사다망하신 사이 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준 것은 예고르였다.
내 연습실을 꾸려 준 것은 물론이고 건강을 생각한 스케줄 관리까지, 예고르가 없었으면 난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라면이 먹고 싶다고 중얼거린 걸 귀신같이 듣고 정말로 구해다 줬을 땐 진짜 애처럼 울어 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못 볼 꼴 다 보인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그 쪽팔림의 대서사시에 몇 가지 더 얹는다 한들 예고르는 웃으며 받아 주겠지만…… 지금 난 아무런 말도 하기 싫었다.
예고르는 문가에 서서 잠시 날 쳐다보더니 말했다.
“누워 계셨습니까? 조금 이따가 다시 찾아뵐까요.”
“아뇨, 들어와요…….”
아무 말도 하기 싫다는 내심과는 다르게 입으로는 엉뚱한 소리가 나왔다.
물론 예고르가 내 마음을 잘 알아주긴 하지만 초능력자인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내 말에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난 어물거리다가 그냥 침대에 걸터앉았다. 예고르는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털썩 내 옆에 앉았다. 순간 침대가 출렁거리면서 튕겨나갈 뻔했다.
“예, 예고르?”
“저도 이제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서 있기도 힘들군요.”
“그…… 어…… 예?”
예고르는 피식 웃더니 본론을 꺼냈다.
“아가씨. 오늘 오후에 중앙음악학교 실기장에는 세 명 정도 □□□□□□□. □□ □□□ 조금 더 붙이고 저도 따라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해 주시길.”
“아, 그래요…….”
진지하게 말하는 터에 농담으로라도 버스 타고 가도 된다는 소리는 하지 못했다.
여기는 러시아고 아버지는 적이 많다. 스스로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는 바보 같은 짓거리는 안 하는 것이 좋다.
세 명이라…… 잘 모르겠지만 예고르가 괜찮다고 판단했다면 괜찮은 거겠지. 난 예고르를 믿는다.
“유리 님도 오늘 함께하지 못하셔서 □□ □□□□□□□□.”
“아버지랑은 어제 이야기했어요. 어쩔 수…….”
“그런데 뭐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없…… 억.”
난데없이 푹 찌르고 들어오는 솜씨가 기가 막혔다. 명치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헛숨을 토해 내고 나니 이미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멍청히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담담한 눈으로 날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본론은 이거였나…….
그냥 입을 다물고 싶었지만 이렇게까지 속내가 드러나 기습까지 당했는데 다물고 있을 수 있을 정도로 난 뻔뻔하지 못했다.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예고르…… 혹시라도 화내지 말아요.”
“예.”
“아버지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예.”
“저기…… 저 그냥 마르포 마린스키에 갈까요?”
입 밖으로 뱉어 놓고도 암담하다.
마르포 마린스키 여학교에 가는 것은 지금껏 해온 것들을 모조리 접고 타티아나로서의 삶을 택하는 길이었다.
옷도 보다 잘 입어야 할 테고 화장도 다시 제대로 배워야 하고 공부도 착실히 더 잘 해야 했다.
연주자가 아닌 나는 굳이 나일 필요가 없다. 내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으니 타티아나를 위해 사는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은 없지만 애초에 이게 옳은 방향이었을 수도 있다.
그냥 내가 고집불통이라서 반년 정도 방황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주 합리적이었다.
예고르는 무슨 소리냐며 웃지도, 정색하지도 않았다.
“1년 쯤 시간을 더 벌어 볼까요?”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소리를 했다.
“1년 정도 준비를 더 하신다면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뇨,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난 급히 말했지만 왜 아닌지에 대해선 설명하기가 막막했다.
반년쯤 대충 해 보니까 내 재능에 대한 견적이 나오더라? 그 말을 누가 믿어 주겠는가. 막상 중앙음악학교 선생님은 극찬 중인데? 나는 겨우 열네 살인데?
하지만 예고르는 굳이 내게서 설명을 구하지 않았다.
“아가씨는 오늘 시험을 걱정하지 않으시는군요. 더 먼 곳을…… 먼 곳을 □□□□ □□□□□.”
“…….”
“그곳까지 갈 자신이 없으시군요.”
예리한 면도날 같은 그의 말이 내 목에 와닿았다.
난 두서없이, 살기 위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제 고집이 모두를 힘들게 만드는 게 아닐지.”
“아가씨가 고집이라 하셨던 □□□ 바로 아가씨를 바꾸고 유리 님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저 하나만…… 저만 포기하면 더 좋아질지도 몰라요.”
“유리 님은 실망하실 겁니다.”
“제가 피아니스트가 못 되면 어떻게 해요……?”
말을 하면서 스스로 깨달았다.
정말 끝장이구나.
반년간 정체성을 지키려고 아등바등했지만, 현실이 가져오는 괴리와 불안감은 기어이 날 집어삼키고 있었다.
언제나 거울을 보면 변명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결국 날 지켜 주는 건 피아노뿐이었는데……. 그것도 모르겠다. 내가 진짜 살고 싶었으면 이딴 소리를 주절거리면 안 되는 거였다.
무조건 들어가서 무조건 해내겠다고 장담을 했어야만 했다.
나에겐 이제 그럴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젠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다.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무거운 분위기가 내 어깨를 짓누르기 전에, 예고르가 내 어깨를 잡았다.
“뭐 어떻습니까? 수만 명이 있는 콘서트홀에서 연주회를 해야만 피아니스트입니까?”
고개를 들었다. 예고르는 더없이 가볍게 말하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내 어깨를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예고르…….”
“적절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르니 그냥 □□ 들으시길. 전 아가씨를 보면서 전쟁터에 □□□ 병사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열네 살 여자애라는 내 상황을 생각하면 정말 적절치 않은 표현인데, 아주 적절한 표현이기도 했다.
맞다고도 틀리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있자 예고르가 불쑥 물어 왔다.
“아가씨는 천재이십니까?”
“아뇨.”
즉답했다.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무슨 말이냐며 펄쩍 뛸 소리였다.
중앙음악학교의 선생이 직접 찾아와 반년이면 충분하다고 보증한 지 오래다. 천재 외에 다른 수식어는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예고르는 내가 아니라고 답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했다.
“그렇다면 세상에 천재들이 많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예.”
예고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엇이 아가씨를 병사로 만들었는지 알 것 같지만…… 아가씨.”
그는 작게 웃으며 덧붙였다.
“□□□ 아가씨가 계신 곳은 전쟁터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진 알겠다. 누가 봐도 나는 지금 지나치게 긴장하고 겁먹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예고르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는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아무것도 모른다.
비단 예고르뿐이 아니다.
그 누구도 지금 나에게 공감하지 못하겠지……. 멍하니 생각하다가 진짜 사춘기 애들이나 할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곤 소름이 다 돋았다. 이게 대체 지금 뭐 하고 있는 짓거리람?
머저리 같은 생각이나 하면서 침대보를 긁고 있자니 예고르가 껄껄 웃었다.
“물론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 □□□□ □□□□□□ 무척이나 기쁘군요.”
“예?”
기쁘다고?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놀라서 고개를 들자 미소를 짓고 있는 예고르의 얼굴이 보였다.
“아가씨 말마따나 전 잘 모릅니다. 하지만 □□□ □□□ □□ □□□□□ 목표를 향해 가시는 것보단 지금처럼 조심스러우신 모습이 낫군요.”
예고르가 여태 날 봐 왔던 시선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많이 걱정되지만, 손가락이라도 잘못 뻗었다간 혹시라도 넘어져 버릴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예고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곳은 저와 유리 님도 모르는 곳. 베르체노프의 □□ □□ □□ 곳입니다. 아가씨는 그런 곳으로 홀로 □□□□ □□□.”
난 그저 조용히 예고르가 하는 말을 들었다.
“조심스레 가 보십시오. 아직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아가씨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세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 내 심정이라곤 하나도 몰라주는 말이었지만…….
“오늘 처음으로 아가씨를 중앙음악학교에 □□□□□ □□□□. 그리고 유리 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 이야기해 드리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어쩐지 등 뒤까지 와서 내 목을 조르던 불안감이 씻은 듯 사라져 갔다.
무엇 하나 해결된 것이 없는데도, 마치 괴물 소굴처럼 느껴지던 중앙음악학교가 조금 편안하게 느껴졌다.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과는 별개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예고르의 목소리에서 안도를 얻는 나 자신이 웃길 지경이었다.
저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들어 보라. 마치 떼쓰는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어투이지 않은가? 내가 그렇게 애처럼 보였다면 당신, 착각하는 거야, 지금…….
“알겠어요…….”
착각하는 거라고…….
생각과 다른 말을 뱉으며 눈을 피했다. 이제 보이진 않았지만 예고르가 사람 좋게 웃고 있는 게 눈에 선했다.
열네 살짜리 꼬맹이 정도야 쉽게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아, 열 받아. 진짜 짜증나는데.
어떻게 하면 그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까 고민할 때였다.
“그리고 제겐 피아노를 연주해 주시지요.”
내 머리가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래서야 어린애보다 못한 강아지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예고르와 다시 눈이 마주치자 그런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어딘가 아련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예고르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는 피아니스트이지 않습니까.”
“아…….”
그의 말은…… 나를 긍정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 타티아나를 향한, 타티아나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마음이 풀어지고 의욕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예고르는 잠시간 나랑 있어 주다가 나갔다.
나는 내 주위를 맴도는 이 따뜻함의 아주 작은 편린이라도 온전히 내 것이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