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피아노 소리가 멎고도 한참 동안 실기장 안에선 대화가 오갔다. 보통 이렇게 이야기할 거리가 없다. 분명 한승우를 향한 성토의 장이리라.
“…….”
“이따 보자.”
옆에서 알짱거리던 에르네스트는 몇 번 말을 걸려고 하더니 내 기분이 별로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자리를 피했다.
그제야 내가 지금 얼마나 살벌한 표정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상상도 하기 싫었다.
갑자기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화를 내야 하는데.
솔직한 말로, 내가 한승우의 보호자인 것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까지 열을 낼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내일이면 볼 일 없을 텐데 이젠 그냥 빠이빠이 하면 그만인 관계였다.
한국인? 그딴 것 알 게 뭔가. 그냥 오늘 처음 만났고, 말을 나보다 더 못하는 게 안쓰러워서 어쩔 수 없이 조금 도와줬을 뿐이다.
어른도 한 명 없이…… 그저 자기 몸뚱어리 하나 믿고, 이 먼 러시아까지 와서 음악 좀 해 보겠다고 쩔쩔매는 게…… 남일 같지 않아서 그랬다. 남일 같지가 않아서.
앞으로도 가능하다면 도움을 줄 수도 있었겠지. 난 충분히 그럴 의향도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무언가 해 줄 의리도, 방법도 없었다.
그냥 다 끝난 것이다.
“…….”
잠시 후, 한승우가 실기장 문을 열고 나왔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열불이 확 났다.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잔불이 갑자기 휘발유라도 퍼부은 듯 화르륵 타오른다.
달려가서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윽박질렀다. 알아듣든 말든 상관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짓을 한 거야?”
“잠깐…….”
“네 곡들이 아깝지도 않아? 멀리서 왔을 거 아냐. 비행기 푯값이 아깝진 않아?”
방금 그 한 순간을 준비하기 위해 쏟아부은 시간들이 아깝진 않았니? 여기까지 널 보내 준 부모님들의 기대가 무겁진 않았어?
혹시나 하고 생각했던 내 기대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어?
하고 싶은 말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어차피 못 알아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모든 게 다 허무해졌다.
그래, 내가 뭣하러…….
「방금 안에서도 그렇고 너도 화내는걸 보니, 자유곡…… 잘못한 것 같네.」
잠자코 있던 한승우는 그렇게 말했다.
그걸 알겠냐? 알겠어? 이제 와서 그딴 소릴 해 봐야 다 끝장났다는 것도 알겠어?
못 알아듣는 척하는 것도 힘들다. 입을 꾹 닫고 목구멍 안으로 하고 싶은 말들을 꾸역꾸역 삼켰다.
한승우는 내가 못 알아들어도 괜찮다는 듯, 차라리 그래서 다행이라는 듯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선생님은…… 믿었었는데. 결국 선생님도 부모님 쪽이었던 건가…….」
무슨 소리야, 그게?
제대로 된 설명을 듣기도 전에 실기장 안에서 날 불렀다.
“10번 지원자. 들어오세요.”
난 차마 바로 들어가지 못했다.
한승우는 잠시 날 바라보았다. 풀이 죽어 있는 그 눈엔 이미 생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최선을 다해 입시를 치렀는데 결과를 망친 사람의 얼굴이었다.
조금 당혹스러웠다.
한승우가 한 말과 그의 태도, 쓸데없는 내 오지랖. 그 모든 게 머릿속에서 마구 엉켰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는데 뭔가 정리되어 말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말없이 노려보고만 있자 한승우는 살짝 옆으로 비켜서며 실기장 쪽을 손짓했다.
너…….
난 벽에 기대선 한승우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말했다.
“너 꼼짝 말고 여기 있어. 알겠어?”
“……?”
“나 나올 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으라고!”
“?”
빽 소리를 질러 놓고 실기장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도 하이든이고 쇼팽이고 아무 생각도 안 나고 한승우가 한 말만 맴돌았다.
선생님을 믿었었는데, 그 선생님조차 부모님 편이었다고?
아주 기분 나쁜, 불길한 시나리오가 뭉실거리며 떠올랐다.
보통 한국이라면 입시곡을 고르고 준비할 땐 학원 선생님의 도움을 받는 편이다.
지금 한승우가 보이는 태도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그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한승우에게 자유곡으로 클래식 음악이 아닌 다른 선곡을 해 준 것 같았다.
설마 싶다. 하지만 세상에 설마가 사람 잡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만약 이 때문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선생이 미치지 않고서야 왜 한승우를 떨어질 수밖에 없도록 준비시킨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선생의 독단으로 이렇게까지 할 리는 없었다. 무언가의 입김이 있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자연스럽게 한승우 부모님과의 연결고리가 연상된다. 한승우 역시 그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
이 모든 게 다 내 망상에 불과하지만…….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새삼 몸서리쳐진다.
의자에 앉기 전, 심사위원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살짝 인사했다.
총 세 명의 심사위원이 저마다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높이를 조절하고, 페달에 맞게 의자를 당겼다.
이제 시작하면 된다. 모든 것을 잊고 내 음악에 빠져들 시간이다.
“…….”
하지만 난 쉽사리 건반 위에 손을 올리지 못했다.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난 계속 고민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승우의 실력은 진짜배기였다.
얼마나 높이 갈 수 있을진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지금 여기에서 꺾여 마땅한 실력은 결코 아니었다. 이렇게 떨어뜨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문득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내 앞의 그랜드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내게 다시 이런 기회를 준 신과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 난 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걸까.
혹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건 아닐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웃음이 터졌다.
정신 차려. 너 지금 미친 거야.
* * *
중앙음악학교의 피아노 선생 류드밀라 지모쉬예브나 니콜라예바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물병을 들어 목을 축이곤, 다시 좀 전에 나간 한국인 남학생의 채점표를 들여다보며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한국인 남학생, 9번 지원자가 앞서 친 두 곡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타고난 천재성이 눈에 잡힐 듯 어른거렸다. 류드밀라는 반드시 이 한국인 학생을 붙잡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유곡에서 문제가 터졌다. 자유곡으로 클래식이 아닌 이상한 곡을 선보이는 바람에 그의 채점표는 엉망이나 다름없게 되어 버렸다.
분명 좋은 곡이었고, 연주도 깔끔했지만 클래식이 아니었고 자작곡이라면 악보를 제출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물어봐도 묵묵부답. 언어학습도 충실하게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자유곡으로 하농 연습곡의 스케일을 친 정신 나간 학생도 있었는데 이건 그보다도 못했다.
류드밀라는 재차 한숨을 쉬며 옆자리의 동료 선생에게 물었다.
“구세프. 방금 9번 지원자…….”
“미련 갖지 마세요. 끝난 이야기 아닙니까.”
구세프 바실리예비치 알레니체프는 더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원래 맺고 끊음이 확실하여 믿음이 가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이럴 땐 그런 태도가 굉장히 야속했다.
류드밀라는 조금 심통이 난 상태로 구세프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 봐요, 구세프. 방금 한국인 9번에게 그렇게까지 박하게 점수를 줄 필요까지 있었나요?”
구세프는 고개만 돌려 류드밀라를 쳐다보았다. 바흐의 스페셜리스트로 유명했던 그의 눈빛은 굉장히 깊고 무거웠다.
“여기가 어린애 놀이터도 아니고…… 그렇게 장난이나 치는 사람을 받을 자리는 이 중앙음악학교에 없습니다.”
“착각이었을 수도 있잖아요? 자유곡이라고 입시요강에 명시해 뒀지만 유학생이니 어쩌면 오해했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재고를…….”
“오해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학생인 만큼 더더욱 철저하게 준비를 해 왔어야죠. 그러니 제발 그만 좀 하세요, 류드밀라. 저깟 유학생 한 명 안 잡는다고 우리 중앙음악학교에 무슨 문제라도 생깁니까?”
“구세프…….”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구세프는 딱히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라면 조금 맹목적이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인재가 없다는 소리가 나오는 판국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우로 학생을 또 하나 놓치자니 너무 아쉬웠다.
“하아아아…….”
류드밀라는 머리를 싸매며 9번의 채점표를 옆으로 치워 두었다.
굉장히 아쉽긴 했지만 일단은 계속 심사를 진행해야 했다. 9번은 나중에 합격자를 확정할 때 구세프와 다시 이야기해 보자…….
결번이 있진 않으니 다음은 10번이었다. 그녀는 10번의 채점표를 집어 들었다.
별 의미 없을지 모르지만 모양새나마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시험장 안으로 들어선 10번 지원자는 한눈에 봐도 귀티가 자르르 흐르는 소녀였다.
옅은 백금발을 길게 드리우고 은은한 하늘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모습에서 자연스러운 품위가 묻어났다.
사뿐히 들어와서 심사위원단을 향해 우아하게 인사한다.
연주에 앞선 정중한 인사. 류드밀라는 그 인사를 받자마자 심사위원이 아니라 한 명의 청중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10번 지원자는 단순한 인사만으로 한 번에 분위기를 제 쪽으로 끌어갔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류드밀라는 눈을 크게 떴다가, 심사에 지장이 가게 할 순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
인사를 마친 10번 지원자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자리를 자신에게 맞추고 정돈했다.
그리고 잠시, 무언가 다짐하는 듯 천장과 피아노를 번갈아 보더니 이윽고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연주가 시작되었고, 류드밀라는 거의 얼이 빠졌다.
이 애는 대체 왜 이제야 여기에 온 거지?
류드밀라는 지금껏 자기도 모르게 하이든의 소나타를 저평가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하이든 소나타는 50곡이 넘고 실제로 학습용으로 많이 간주되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류드밀라는 이 곡이 얼마나 아름답고 화려하게 연주되어지는가는 그다지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또랑또랑하고 균일하게 건반을 누빌 수 있는 최소한의 기교를 지니고 있는가. 딱 그 정도를 보는 곡으로 여기는 게 적당하다, 라고 생각했다.
“…….”
하이든 소나타가 이렇게나 행복한 울림을 줄 수 있는 곡이었던가.
물론 바장조, 장조의 곡이다. 밝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화성이 가져오는 당연한 밝음 따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곡 전체를 휘감았다.
학생들이 흔하게 보이는 긴장감이나 어색함 등은 찾아볼 수 없었다.
10번 지원자는 정말로 심사위원들에게 작은 연주회를 선보이고 있었다.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는 선생들은 고명한 피아니스트들이기도 했지만 또한 클래식 애호가이기도 했다.
매번 딱딱하게 지원자들의 연주에서 미스 난 부분을 체크하기나 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지만, 결점을 체크할 일이 없어진다면 순수하게 감상하는 일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쇼팽의 화려한 변주곡에 와서는 심사위원 셋 모두 채점표를 내려놓았다.
무척이나 브릴리안테하다. 류드밀라는 그렇게밖에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8분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브라바.”
곡이 끝나자 구세프가 짧게 박수를 보냈다. 류드밀라는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옆을 돌아보았다.
여성 연주자에게 보내는 찬사. 그는 원래 시험장에서 절대로 이런 표현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것이다.
류드밀라는 헛웃음을 흘렸다. 조금 어이가 없었다. 대체 어디서 저런 학생이 튀어나온 거지.
기가 막혀 하면서도 마지막 자유곡은 무엇을 들고 나왔을지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리스트나 라흐마니노프를 준비해 왔다면 류드밀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칠 준비까지 되어 있었다.
모두의 기대 속에서 10번 지원자는 잠시 건반을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간의 고민, 격정, 중얼거림. 심사위원들이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사이, 10번 지원자가 불쑥 고개를 들어 심사위원석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여태껏 보여 주었던 실력이 무색할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죄송합니다만. 지금까지 제 점수가 어떤지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왜 묻죠?”
류드밀라는 그제야 책상 위의 채점지를 발견했다. 당연히 체크된 항목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선생들 역시 매한가지였다.
압도적인 만점. 그냥 시험 내내 감상이나 하다가 합격시키면 되는, 정말 쉬운 지원자. 정말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우였다.
이런 압도적인 성적을 보이고도 10번 지원자는 무슨 죄라도 지은 듯 어색하게 웃었다.
“아마 만점일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
사실이긴 했지만 넙죽 그렇다고 말하기도 좀 이상했다.
분위기가 약간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 때쯤, 우물거리던 10번 지원자가 결국 마음을 정했다는 듯 말했다.
“제게 만점을 주신 선생님들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뭘……?
미처 되묻기도 전에 10번 지원자는 도로 건반을 마주하더니, 언제 머뭇거렸냐는 듯 곧장 연주를 시작했다.
첫 소절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더 곡이 흐르고, 한차례 꾸밈음이 지나가자 류드밀라는 오래전 보았던 한 영화를 기억해 냈다.
선상에서 나고 자라 피아니스트로 살아간 한 남자의 이야기. <피아니스트의 전설>.
그 영화의 OST인 매직 왈츠가 실기장에 연주되고 있었다.
“아…….”
옆을 보니 구세프의 얼굴이 거의 폭발하기 직전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류드밀라는 탄식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믿었던 10번도 폭탄이었다.
그동안 한 마디도 없던 예브게니아 니콜라예브나 말로바 선생만이 날카로운 눈으로 10번 지원자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