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
실기시험장에서 영화 OST를 자유곡으로 연주해 버렸다.
15분 전에 엄격하게 생각했던 모든 말들이 거꾸로 날 헤집었다.
하지만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리려면 나도 물에 젖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같이 빠져 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연주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심사위원석을 향해 인사했다. 당연하겠지만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드니 어이없어하는 분과 화가 난 분, 무표정한 얼굴로 날 바라보시는 분이 계셨다.
내가 저지른 짓에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무언가 말을 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입이 제멋대로 떠들 것 같다. 정면을 바라보며 눈을 치떴다.
잘해야 한다.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 줬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질타가 날아오기 전에 선수를 쳤다.
“이젠 몇 점인가요?”
난 더더욱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말했다.
이젠 하이든과 쇼팽으로 최선을 다해 보인 내 가치를 믿고, 나 자신을 저 엄격한 선생들에게 파는 수밖에 없었다.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난 모종의 신념마저 느꼈다.
어째서 피아니스트로 다시 한 번 사는 것을 운명에게 허락받았는지에 대해 여전히 확신이 없는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느끼는 내 역할은 바로 이것이었다.
말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내가 아무리 호소한들 한승우에게 튜브를 던져 줄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같이 빠졌다.
자유곡의 기준 그 자체를 조금이라도 더 허물어뜨려야만 했다.
그래야 한승우에게까지 그 기준이 적용되어 살아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긴다.
만약 선생님들이 나를 건져 올린다면 한승우도 같이 딸려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일단 내가 건져 올려질 만한 가치가 있어야 했는데, 자신이 아주 없진 않았다.
난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지만, 미하일 선생님은 내 입시곡을 듣고 실기장에 있는 심사위원들이 흠 하나 잡지 못할 것이라 단언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하이든과 쇼팽은 만점을 받아 낸 것 같다. 솔직히 말해 하이든과 쇼팽에서 감점이 있었다면 바로 작전 중지였다.
그 시점에서 얌전히 멀쩡한 자유곡을 쳐서 나 혼자라도 합격했을 것이다.
“…….”
“…….”
어쨌든 현 상황은 여기까지 왔다. 난 지금 여기에 왜 있는가. 그 해답일지도 모르는 신념을 좇아 이런 일을 벌였다.
무시무시한 침묵이 날 짓눌러 왔다. 난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허리에 힘을 주었다.
“10번 지원자분…… 지금 점수를 물었습니까?”
가운데에 앉아 있던 남자 선생님이 거의 폭발하기 직전처럼 부들거리더니 앞에 놓인 채점지를 들고는 펜으로 찍찍 그었다.
그러곤 내 쪽으로 거칠게 던졌다. 팔랑거리며 채점지가 날아오다가 떨어졌다.
내 앞까진 안 왔지만 안 봐도 뻔했다.
“자유곡은 점수 없습니다. 절대 합격할 일은 없겠군요.”
망했나 보다.
보아하니 심사위원들 중에서도 목소리깨나 내는 선생님인 것 같은데…… 아주 기분 나쁘다는 듯 으르렁거리는 걸 보니 잘했고 못했고 이전에 내 태도를 문제 삼는 모양이었다.
딱 15분 전의 내가 저랬으니까 한 마디도 변명할 수 없었다.
언젠가 봤던 뉴스가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물에 빠진 청년을 구하러 같이 뛰어든 동네 사람, 안타깝게도 함께 숨져…….
나 이대로 죽는 건가……?
“잠시만요, 구세프. □□ □□ □□□.”
그때, 옆자리에 있던 여자 선생님이 빠르게 항의했다.
“정말 □□□ □□□ □□□? 아까 9번도 모자라서 이 10번도 떨어뜨리겠다고요?”
“그래요. 그럴 겁니다, 류드밀라.”
“제발, 구세프. 방금 들었던 쇼팽□ □□□□□. 이 10번 지원자는 떨어뜨리면 그냥 곧장 모스크바 음악원 영재클래스에 입학□□ □□□ □□□□□. 모르겠어요?”
“호오, 그럼 □□□ □□□□. 그냥 여기서 나가 컨서바토리로 가시죠. 10번 지원자분. ”
구세프 선생님이 비아냥거리자 그때까지도 약간 소심하게 말하던 류드밀라 선생님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 지금 상황 판단이 안 돼요, 구세프?”
“왜, 왜 이럽니까?”
난데없는 고함에 얻어맞고 구세프 선생님은 황망해했다. 그런 그를 보며 류드밀라 선생님이 답답한지 책상을 탕탕 쳤다.
“□□□ □ □□□ 좁아요! 제 말은, 그대로 뮌헨이나 바이마르로 가 버릴 수도 있단 뜻이에요!”
“독일이라니 지금 무슨 소릴…….”
구세프 선생님은 정말 생각도 못 했는지 말을 조금 더듬기까지 했다.
러시아인이 클래식을 배우는데 러시아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배우리라곤 정말 상상조차 못 하는 표정이었다.
선생님은 조금 인상을 쓰며 날 보고, 다시 옆을 보고,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의자에 기댔다.
덥석 받자니 자존심 상하는데 그렇다고 남 주자니 배 아프다고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자유곡을 맘대로 쳐 놓고 당당했던 내 태도가 조금 먹혀 들어간 것 같기도 하다.
류드밀라 선생님은 날 보며 분명 다른 음악학교도 뚫고 들어갈 자신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난 여기서 떨어지면 모든 게 끝나고 독일은 무슨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상황이지만, 선생님들이 그걸 알 리 만무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강렬하게 구세프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저기요, 선생님. 잘 생각해 보세요. 정말 저 놓칠 거예요?
류드밀라 선생님이 재차 무언가 설득조로 말을 꺼내려는 찰나, 가만히 날 쳐다보고만 있던 마지막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머리가 희끗하게 센, 연배가 지긋하신 여선생님이었다.
“매직 왈츠…… 영화에서도 그 곡을 치고 나인틴 헌드레드는 □□을 해야만 했지요.”
“…….”
“그의 친구 맥스와 말이죠.”
폭풍우 치는 바다 위의 버지니아호, 그곳에서 피아노의 잠금장치를 푼 채 그의 친구를 데리고 신나게 한 곡 친 나인틴 헌드레드가 결국 무엇을 해야만 했는진 잘 알고 있었다.
석탄을 퍼서 증기선의 보일러에 넣는 노역이었다.
노쇠한 눈가에 섬뜩한 빛이 일렁인다. 난 순간적으로 그녀가 최종 결정자임을 직감했다.
어떤 의미로 저런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 확실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내 의도에 근접해 있음을 어렴풋하게 느꼈다.
덥석 물어 볼까? 아니면 한 번 더 모르쇠로 상황을 보는 게 좋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배의 선장님도 그 둘을 바다에 던져 버리기엔 아깝다 생각하지 않으셨겠어요?”
지금 나와 한승우가 완전히 별종 취급당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한 번 어필을 하지 못하면 여태껏 한 것들이 모조리 허사나 다름없었다.
입으로 뱉어 놓고도 이게 맞았나 틀렸나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딱히 화가 나거나 한 것 같진 않았다. 담담히 물어 왔다.
“아깝다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예.”
“자신 넘치는군요. 무언가 □□□ □□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나요?”
무슨 말을 묻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이번엔 맥락으로 찍어 맞출 수도 없었다.
없는 자신감도 만들어서 보여 줘야 할 때였지만 조금 어물거리자 선생님은 날 가만히 지켜보더니 이렇다 저렇다 하지 않고 단숨에 본래 역할로 돌아갔다.
“난…… 10번 지원자가 장난을 쳤다고 보진 않아요. 그런데…….”
잠시 단어를 고르는 듯, 말을 길게 끌더니 곧 이어서 물었다.
“10번 지원자는…… 스스로가 소중하지 않은 건가요?”
“……? 소중합니다.”
“내 눈엔 그렇게 안 보이는데.”
“…….”
이번엔 알아들었는데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나는 연주자라는 정체성을 버리지 못해서 빌린 몸으로도 피아노를 시작했다. 세상에 나처럼 이기적인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는지 다시 되짚어 본 나는 약간 혼란에 빠졌다.
분명히 중요하긴 하다. 내겐 그래야 할 의무가 있었다. 때문에 나는 피아노를 제외한 다른 거의 모든 부분을 내어 주었다.
가족과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잘하고 내 몸을 털끝 하나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것은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소중하게 여기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머리가 아파져서 입을 다물고 있는데, 선생님이 펜으로 책상을 톡톡 치며 말했다.
“뭐, 좋습니다. □□□ 시간이 길지 않은 관계로…… 이쯤 하도록 하죠.”
갑자기 이렇게 정리해 버릴 줄은 몰랐지만 선생님의 입장에선 이만큼이나 이야기를 나눠 준 것만 해도 선심을 충분히 쓴 것이다.
할 만큼 했고…… 어쩌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겠나 싶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확답을 얻어 내고 싶었다.
하지만 대답을 조르는 듯한 말을 할 순 없었다.
살짝 머뭇거리자 선생님이 조금 귀엽다는 듯 픽 웃었다.
“맥스가 식사라도 대접해야겠는데요.”
“……!”
확답이었다, 이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계셨던 것이다.
다른 선생님들도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구세프 선생님이 급히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예브게니아 니콜라예브나. 지금 □□□ □□□ 일이 아닙니다!”
“구세프…… 젊은 사람이 왜 그리 꽉 막혔나요……?”
“방금 자유곡을 듣고도…….”
“잘 치던걸요, 뭘.”
노년의 예브게니아 선생님은 화끈한 면이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툭 말했다. 구세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잘 치고 못 치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왜요……? 클래식이 아니라서?”
“하, 설마 자유곡이니 □□□□ 상관없다고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뇨?”
예브게니아 선생님은 구세프 선생님과 뭐라 설전을 벌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이젠 만사 귀찮다는 듯 말하기 시작했다.
“작중 나인틴 헌드레드는 □□□□ 1900년생이죠…… 거기에 왈츠니까 클래식으로 □□ □□ □□□□? 잠깐만, 드미트리 드미트리비치 쇼스타코비치보다 나이가 더 많겠는데요……? 이봐요 류드밀라. 드미트리 드미트리비치가 몇 년 생이죠? 1909년?”
“1906년생이죠.”
“아…… 고마워요. 저도 나이를 먹다 보니 기억력이 영.”
“아직 □□□□□□ 뭘.”
“그래서…… 류드밀라는 어떻게 생각해요? 클래식 맞겠죠?”
“그렇겠네요.”
중앙음악학교의 두 선생님은 화기애애하게 클래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참 멋진 광경이기도 했지만…… 해괴하기도 했다.
이 기막힌 광경엔 구세프 선생님뿐만 아니라 나조차도 황당할 지경이었다.
영화 내 등장인물이 1900년생이고 형식이 왈츠니까 그냥 클래식으로 치자?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폭거란 말인가?
물론 클래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딱 정의되어 있진 않지만 이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음악가들이 치고받고 싸우는지 모른다.
1898년생인 조지 거슈윈이 클래식 음악가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도 지금 한 세기가 넘도록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편하게 앉아서 ‘음, 동그랗고 토핑이 올라가 있으니 이건 피자겠네!’ 같은 느낌으로 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 그럼 아무 문제 없죠?”
그런데 너무 간단하게 정해 버렸다.
구세프 선생님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인지 한 마디도 못하고 헛숨만 들이켰다 내쉬었다를 반복했다.
음…… 난 그냥 가만히 있어야겠다.
“뭐 해요?”
“예……?”
“나가 봐요.”
“아, 예…….”
그러게요……. 있으면 뭐 하나. 나가야지.
멍청하게 서 있다가 그제야 다시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날 향해 예브게니아 선생님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첨언했다.
“아, 미하일에게 □□□ □□□?”
응? 여기서 미하일 선생님 이름이 왜 나오죠?
멀거니 쳐다보니, 됐다는 듯 손을 휘적휘적한다. 난 조금 께름칙한 기분으로 실기장 문고리를 잡았다.
잠깐만, 미하일 선생님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
지난 반년간 미하일 선생님이 내 레슨을 봐 주시면서 예브게니아 선생님에게 이야기했을 수도 있다.
요즘 베르체노프가의 딸을 레슨 중인데 조만간 중앙음악학교에 시험을 칠…….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휙 돌아 쳐다보니 예브게니아 선생님이 날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지만, 난 그분이 날 기다렸다는 것을 어쩐지 알 수 있었다.
나머지 두 분은 끝까지 몰랐던 것 같지만,
순간 내 뇌리를 잠식한건 반가움도 안도감도 아니었다.
분함과 허탈함. 조금 분했다.
“칫…….”
콘탁으로만 내정자를 뽑아 입학시키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기왕에 시험을 치기로 했으니 되도록 지금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한 번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내 이름이 아니었으면 진짜 위험했을 수도 있었나…….
터덜터덜 시험장 밖으로 나왔다.
“저기…….”
나오자마자 웬수 같은 녀석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갑자기 그러고 싶어져서 녀석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너…… 이번에 내가 건져 올려 줬으니까, 제대로 설명해 줘야 해.”
“?”
“아, 답답해 정말!”
미쳐 버리겠다. 확 욕이라도 퍼부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지만 짜증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일단은 잘된 것 같으니까…….”
말로 하고 나니, 비로소 긴장이 흩어져 갔다. 절로 스르르 미소가 지어졌다.
내 표정을 본 한승우가 따라 웃었다.
“흠…….”
저편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에르네스트는 미묘한 시선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약간 찔렸다. 내가 한 것도 다 들었다면…… 첫인상이 분명 좋진 않으리라.
그런데 뭐, 어쩌라고. 나도 너 첫인상 그리 좋지만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