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6화 (16/1,277)

##  16화

“아가씨…… 그분은?”

“잠깐 이 사람이랑 이야기할 게 있어요. 어디 카페 같은 곳 없나요?”

“음…… 카페라. 공개된 장소도 상관없으신가요.”

무슨 공개되지 않은 카페도 있는 거예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로킨은 의심스럽다는 듯 한승우를 위아래로 흘겨보았다.

험상궂게 생긴 소로킨을 보며 한승우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여차하면 도망칠 자세였다.

거기에…….

“뭐 하는 자식이냐, 너.”

차 안에서 대기하던 빅토르가 벌컥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소로킨에 이어 검은 정장 2호가 등장하자 한승우는 더더욱 겁에 질렸다.

그리고…….

“……이놈 뭡니까.”

어느새 한승우의 등 뒤를 자하르가 가로막고 있었다.

살기등등한 분위기에 애만 하나 잡기 직전이었다. 그제야 소로킨이 헛기침을 했다.

“장난들 그쳐. 아가씨가 모시고 온 분이시다.”

“뭐요? 소로킨이야말로 장난합니까, 지금?”

“아가씨…… □□□□□ □ 좋지만, 검증도 안 된 외부인과 함부로 친해지시면 곤란합니다. □□□□□□□□.”

자하르가 진지하게 고했다. 살다 살다 저런 말을 처음 들어 본 나는 조금 질렸다. 그럼 학교를 대체 어떻게 다니라는거예요?

빅토르는 대놓고 으르렁거렸다.

“깨어난 지 반년밖에 안 된 우리 병아리 아가씨에게 이 □□□ □□□□ 어딜 감히 □□□ □□□…….”

“…….”

말없이 소로킨을 일견하자 그가 내 대신 빅토르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병아리라는 소리를 듣고도 얌전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이 사람들이 날 걱정해 준다는 건 잘 알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겁주지 말아요. 이야기만 좀 들어 볼 거예요.”

“무슨 이야기 말입니까?”

“그런 게 있어요.”

빅토르는 의심스러워하긴 했지만 더 캐묻지 않고 삐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차로 조금만 이동하면 있는 공연예술 극장 맞은편에 위치한 곳이었다.

소로킨은 차에서 대기하기로 하고 빅토르와 자하르만 날 따라왔다.

난 단호하게 요구했다.

“옆 테이블에 앉으세요.”

“아니, 저희가 함께 있어야 저놈이 허튼짓을 못 하…….”

“괜찮으니까 저쪽 테이블로 가요.”

구시렁거리는 빅토르와 자하르를 옆 테이블로 보내고, 라떼를 두 잔 주문했다.

비로소 난 한승우와 마주 앉을 수 있었다.

“…….”

“…….”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마주 앉아 있으니 조금 우습긴 하다.

어쨌건 이제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전후사정을 들어 볼 때였다.

하지만 난 한국말을 할 수 없고 한승우는 러시아어를 거의 못한다. 대화가 가능하려면 통역이 필요했다.

그래서 내 오랜 친구, 태블릿 컴퓨터를 통역으로 모셨다.

태블릿 컴퓨터를 중앙에 놓고 번역기를 켰다. 그리고 나부터 하고 싶은 말을 썼다.

[지금부터 이걸로 대화할 거야.]

러시아어로 말을 쓴 다음 그대로 태블릿 컴퓨터를 한승우에게 내밀었다.

한승우는 그것을 번역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뭐 어떻게 하자는 건지 알겠지?

한승우는 잠시 고민하더니 액정을 눌렀다. 뭐라고 썼나 한 번 볼까?

[이름을 가르쳐 주세요.]

아직 통성명도 안 했던가?

당연히 번역된 러시아어 쪽은 볼 필요가 없었다. 솔직히 조금 웃겼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하지만 이것은 내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마지노선이었다.

내 이름이 뭐냐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타티아나…….”

망연히 중얼거리던 한승우가 다시 뭐라고 썼다.

바로 본론이었다.

[왜 절 도와주신 건가요?]

기특하게도 도와준 걸 알긴 아는 모양이다.

난 답변 대신 질문을 던졌다.

[왜 자유곡으로 그런 걸 준비했어?]

[그게 학원에서 상담받은 곡이었어요.]

한승우는 갑자기 액정을 연타했다.

[학원 선생님이 작년에도 러시아 유학 간 학생이 이렇게 해서 붙었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도 솔직히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딱딱한 한국과는 달리 외국 학교들은 자유곡에서 정통 클래식이 아니라 자작곡이나 다른 장르의 곡으로 자기 색을 보여야 한다고 워낙 강하게 말씀하셔서…….]

[그걸 믿었어? 너 바보야?]

예상대로이긴 했지만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세상에 어떻게 세계 최고의 클래식 음악학교 실기를 준비하면서 클래식으론 안 된다는 말을 믿는가?

한승우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선생님을 믿었으니깐요……. 부모님은 제가 피아노 하는 거 반대하시거든요. 제가 학원 계속 다니고 지금 이렇게 러시아에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부모님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도와주신 거예요. 거기에 학원 선생님은 부모님이 반대하는 건 알지만 제가 열심히 하면 결국 알아주실 거라고 많이 응원해 주셨었는데…….]

더듬더듬 자판을 두드리던 한승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떻게 된 걸까요…….]

뭐가 어떻게 돼. 너도 알잖아.

네 부모님이 학원 선생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한 거지. 자세하게는 뭐 어떻게 된 건지 억측할 수는 없다만…….

확실한 건, 네 실력을 보고도 학원 선생은 널 배신한 거야. 듣는 귀가 없는 선생이었으니 그냥 잊어버려.

하지만 정말 괴로워하는 한승우에게 차마 그걸 적어서 보여 주진 못했다.

“……그래.”

설명을 대충 듣고 나니 확실해졌다. 내 생각이 맞았다.

거의 직감과 망상으로만 행동한 미친 짓이었지만…… 내가 왜 한승우를 처음 봤음에도 그냥 내버려 두지 못했는지 이제서야 비로소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이 애는 나랑 같았다. 본질적으로 닮아 있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홀로 피아노와 살겠다고 결심한, 음악에 미친 종자였다.

난 정말 믿을 수 있는 교수님과 친구가 있었기에 피아니스트까지 어찌어찌 될 수 있었지만, 한승우는 좋은 선생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

분명 처음엔 좋은 선생이었겠지. 그건 한승우의 피아노를 들어 보면 안다.

비슷한 나이 대의 아이들에 웃도는 실력을 보면 이 원석을 보석으로 만들기 위해 세공사가 얼마나 열심히 깎고 광택을 내고 공을 들였을지, 그게 귀에 들렸다.

단지, 한승우는 버텼지만 선생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예컨대, 한승우의 부모님으로부터 온갖 종류의 강압이 이어졌을 것이다. 욕설을 퍼붓고, 금전으로 회유하고…….

처음엔 어떻게 해서든지 한승우가 피아노를 할 수 있도록 방파제 역할이 되어 막아 주었지만, 결국엔 한승우를 이 먼 곳으로 보내 좌절시키려 한 것이다.

[러시아 유학도 네 선생님이 제안한 거였어?]

진짜라면 악질도 그런 악질이 없었다.

하지만 한승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게…… 올해 초에 러시아에서 오신 선생님 한 분이 제 연습을 잠깐 봐 주시고는 유학 올 생각 없냐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예고 대신…… 아, 제가 기숙사 들어가기 전까지 당분간 홈스테이 하기로 한 곳도 그 선생님 댁이에요.]

‘혹시 어디쯤인지 아세요?’라며 한승우는 낡아 빠진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았다.

대충 펜으로 소속과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써 놓은 종이였다. 그리고 맨 위의 두 줄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차이코프스키 모스크바 국립 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

예브게니아 니콜라예브나 말로바』

어……? 예브게니아? 이 이름 분명 방금…….

아니지, 예브게니아라는 이름은 흔한 편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선생님이 두 분 있다고 해도 별로 이상하지 않다.

설마 해서 쳐다보니 한승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실기장에 계시더라고요. 알은척하면 큰일 날 것 같아서 모른 체했지만.]

야!

난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며 일어날 뻔했다.

너 콘탁 내정자잖아!

소리를 질러야 하는데, 이 와중에도 한국말을 하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틀어막으니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것들이 갑자기 뒷골로 꽝 부딪혔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가 돌아왔다.

와, 몇 번이고 기절해 보긴 했지만 이렇게 혈압이 올라 쓰러질 뻔한 건 처음이었다.

사람이 갑자기 혈압이 오르면 순간 눈앞이 까맣게 변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가뜩이나 약한 몸에 극도의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덮쳐 오자 현기증이 밀어닥쳤다.

간신히, 정말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앞에 놓인 라떼를 들어 마셨다. 앗 뜨거!

「괘, 괜찮아요?」

한승우가 한국말로 허둥지둥했다. 혈압이 더 치솟는다. 안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다고.

괜찮다는 뜻이 아닌, 닥치고 있으라는 뜻으로 손사래를 치자 한승우는 내가 하는 꼴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레 한 줄 더 적었다.

[그런데 그 앞에서 자유곡도 잘못 준비해 가고……. 아마 실망하셨을 거예요. 가운데에 있는 선생님이 막 뭐라 하셨거든요. 아마 저 혼자였다면 떨어졌겠죠.]

난 이제 거의 만사 포기한 상태로 한승우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 진짜 상황 파악을 전혀 못 하고 있다.

[그런데…… 타티아나가 절 도와주셨단 건 알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듣고도 뿌듯하기보단 억울함만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돕긴 뭘 도와. 헛짓거리한 거지!

예브게니아 선생님이 한국에 가서 어린애 한 명에게 레슨을 봐 주고 쪽지를 남겼다.

이건 약간의 오해를 할 여지도 없이 명백하게, 그 자리에서 실기는 마쳤으니 더 볼 것 없이 제자로 뽑겠단 소리였다.

러시아나 독일 같은 외국 음악학교, 음대들은 입학사정관보다 교수진의 권한이 강력했다.

그리고 좋은 재목을 한 사람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선생들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강력한 방법을 사용한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직접 데리고 오는 것이다.

단순히 중앙음악학교에 입시를 치르게 하려는 거였다면 사적인 연락처가 담긴 쪽지가 아니라 러시아엔 중앙음악학교라는 곳이 있다 하고, 그곳에 들어가기 위한 입시요강이라든지, 준비해야 할 것 들을 소개했겠지.

그 외에도 방법은 많다.

정석적인 입학 외에도 한국엔 모스크바 음악원과 협력 관계로 콩쿠르 형태의 오디션을 열어 학생들을 모아서 입상한 학생들을 유학생으로 선발해 입학시키는, 입학 오디션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는 업체도 있다.

정말 실력만 있다면 여러 방법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쪽지를 보라.

입학이 어쩌구 시험이 어쩌구 하는 그런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다.

아주 대놓고 적나라하게 몸만 오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시험은 의미 없었다.

물론 자유곡을 마음대로 쳐 버린 건 확실한 문젯거리였지만 구세프와 류드밀라, 두 선생님이 반대하더라도 예브게니아 선생님이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한다면 그냥 길게 묻고 따질 것도 없이 입학이 가능했다.

얘는 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거야?

그리고 대체 내가 한 짓은 뭐가 되는 건데?

“아으…….”

머리가 아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눈앞의 원흉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너 그냥 한국 가…….”

“?”

“가, 그냥!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내가 감수해야 할 것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늘 실기장에서 봤던 선생님들은 모두 날 괴짜로 볼 테지, 아마 만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로 돌아가서 내 뺨을 때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간 에르네스트의 눈빛도 아직 생생하다. 완전 이상한 애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한승우의 자유곡을 듣고 말도 못 붙일 정도로 화가 나 있더니, 정작 자기 차례에 똑같은 짓을 해 버렸으니 이게 대체 뭐 하는 건가 싶겠지.

어떻게 변명도 못 한다.

앞으로 학교 어떻게 다녀, 진짜.

* * *

베르체노프가의 오늘 저녁 식사 주인공은 다름 아닌 장녀 타티아나였다.

러시아 최고의 음악학교인 중앙음악학교의 실기시험을 치르고 왔기 때문이었다.

“수고 많았다, 타티아나.”

“예, 아버지.”

타티아나의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하지만 유리는 부모로서 물어봐야 할 건 물어봐야만 했다.

“결과는 어떨 것 같으냐.”

“…….”

타티아나는 포크를 든 채 침묵했다. 루슬란은 직감했다. 아, 망쳤구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시험을 망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데도 루슬란은 동생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생각하기보단, 어떤 각도에서 무엇이 날아오든 간에 막아 낼 수 있도록 접시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었다.

루슬란이 아는 타티아나는 그런 동생이었다.

“합격했어요.”

하지만 타티아나는 덤덤하게 그렇게 말했다. 루슬란은 의아해했다. 벌써 결과가 나왔나? 그런데 시험에 붙은 사람 표정이 왜 저래?

타티아나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아까…… 미하일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10번 지원자…… 저 합격했다고요.”

그러면서 전화 내용이 다시금 생각나는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뭔가 무서운 소리를 들었을 때나 보일 반응이었다. 합격 내용을 전해 들은 게 그렇게 무서웠나?

“미하일 선생님이…… 제 자유곡…… 하…….”

이젠 손까지 벌벌 떨던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그 간절한 목소리에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루슬란은 속으로 혀를 찼다.

몸도 허약한 타티아나가 가끔 이런 기세를 보일 때면, 유리는 항상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렇게 무엇이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는 유리에게 타티아나가 말했다.

“아버지, 저 중앙음악학교 말고 다른 음악학교에 가면 안 되나요? 상트페테르부르크나 그네신이나…… 아무 데나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부끄러움과 치욕스러움이 한데 뒤섞인 목소리로 타티아나가 말했다.

“저 그 학교 못 다녀요!”

“합격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합격했으니까요!”

“?”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유리가 의아해했다.

루슬란은 감탄했다. 아, 역시 내 동생이다. 깨어난 뒤로 근래 좀 정상인인 척 잘하더니 역시나 미쳐 버렸구나.

“갑자기 왜 그러느냐. 무슨 일 있었느냐?”

“그…… 그게.”

타티아나는 최고의 음악학교에 합격해 놓고선 왜 못 가겠다는 것인지 똑바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리는 타티아나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진지하게 답했다.

“네가 정 원한다면 어디라도 좋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고 싶다면 그쪽 지부로 내 사무실을 옮기고 집을 구해서…….”

“예!? 사무실을 옮겨요?”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

보호자로서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유리가 말했다. 기숙사에 타티아나가 들어가는 것은 아예 배제되어 있었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타티아나는 그제야 고개를 저으며 작은 변덕이었을 뿐이니 잊어 달라고 말했다.

도대체 무슨 변덕이 생기면 학교를 옮기고 싶단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타티아나는 상세한 이야기를 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더 이상 유리와 루슬란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듯 했다.

열심히 포크를 움직이는 동생을 보며 루슬란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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