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7화 (17/1,277)

##  17화

아침 연습을 마치고 별관을 나오자 벨카가 달려들었다. 난 함박웃음을 지으며 녀석을 안아 주러 가다가 멈칫했다.

벨카가 순진무구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꼈지만 오늘은 정말로 안 된다.

“오늘 아침은 좀 바빠서…… 안 돼요. 앉아요, 거기 앉아 주세요.”

“……낑?”

이 유혹에 넘어가서 벨카를 한 번 쓰다듬는 순간 30분은 쉽게 날아가 버릴 것이다.

난 몇 번이고 벨카의 귀여움에 저항해 보려 했지만 한 번도 절제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아예 손을 대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

내 명령에 따라 앉은 채 애처롭게 우는 벨카를 뒤로하니 나 역시 가슴이 찢어졌다.

하지만 입학식 첫날부터 지각할 수는 없었다. 눈물을 훔치며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자 나제즈다가 활짝 웃으며 날 맞이했다.

“아가씨, 연습 끝나셨어요?”

“예.”

“그럼 지금부턴 제 시간이죠?”

“……그렇게 되는 거였어요?”

“그럼요!”

나제즈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닌가요?

그녀는 내 교복을 들고 행복해 죽기 일보 직전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교복이다.

설마 러시아 학교에 다니면서 교복을 입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원래 작년까지만 해도 중앙음악학교엔 교복이 없었지만 올해부터 도입된 것이었다.

그 이유로는 학생이 적절하게 행동하고 책임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주고 국가적, 사회적 불평등을 최소화시켜서 학생들 간 평준화가 어쩌구저쩌구…….

자세한 건 잘 모르겠지만 좋은 취지에서 도입한 것이니 아무래도 좋았다. 뭘 입어야 할지 고민할 것도 없고.

그런데 나제즈다는 고민이 더 많아진 것 같았다.

“이 조끼에 이 색깔은 어떠세요? 음…… 넥타이는 이게 좋겠죠?”

“나제즈다…… 교복이잖아요. 그냥 정해진 대로 입으면 안 되나요?”

“아가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교복이니까 더더욱 신경 쓰셔야죠!”

특정한 포인트가 아니라면 두드러질 게 없는 교복으로 선택지가 줄어들자 나제즈다는 뭐라도 포인트를 주려고 난리였다.

“이 넥타이에…… 브로치를 하시는 게 좋겠어요. 보다 차분한 분위기가 완성될 거예요.”

“제가 아니라 나제즈다가 차분해지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 이 핀 잘 어울리시겠다!”

“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엄격한 나제즈다의 코디네이트가 완료되었다.

“완벽하세요!”

나제즈다의 손에 따라 거울을 보았다. 군청색의 중앙음악학교 교복은 깔끔하고 예뻤다.

이상한 시금치 색이거나 누르죽죽한 교복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다.

난 잠시 거울을 바라보며 내 선택을 다시금 되새겼다.

오른쪽 가슴에 있는 중앙음악학교 심벌마크는 조금 어색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이제부터 이게 내 소속을 보여 준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애착이 생겼다.

* * *

“다녀오십시오.”

소로킨의 배웅을 받으며 난 살짝 긴장된 걸음으로 중앙음악학교 앞에 섰다.

지금은 9월 중순. 벌써부터 공기가 차고 낙엽이 문가에 흩날리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러시아의 1학기는 9월부터 다음 해 1월 말까지이다.

그리고 2학기는 2월부터 6월 말까지. 그래서 신입생들은 항상 이렇게 낙엽을 맞으며 학교에 들어서게 된다.

항상 3월 입학이 익숙했던 나로선 약간 생경한 풍경이었지만 이건 또 이것대로 분위기 있게 느껴졌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니 선생님과 학생들과 부모들로 난리통이었다.

이번에도 난 아무도 없이 혼자였다. 어젯밤 아버지는 정말로 미안해하셨다.

난 태연하게 혼자라도 괜찮다고 아버지를 안심시켜 드렸지만…… 역시 아무래도 난 그냥 이렇게 홀로 다닐 운명인가 싶다.

혼자서 입학식장을 찾아가서 족히 1시간은 더 되는 기나긴 일장연설을 버텨 낸 나는 선생님들의 안내에 따라 내가 앞으로 지낼 반으로 향했다.

이미 피아노과 8학년 반에는 같은 반 친구들이 열댓 명 저마다 앉아 있었다.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저 애들이 전 세계에서 모인 피아노 천재들이라는 생각을 하니 살짝 소름 끼쳤다.

딱히 정해져 있는 자리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옹기종기 흩어져 있는데 난 친구도 없고 해서 대충 구석에 앉으려 했다.

“타티아나.”

그때 창가 쪽에서 누군가 날 불렀다.

그쪽을 보니 어딘가 조금 익숙한 금발의 남자애가 창가에 기대어 서서 내 쪽으로 손짓하고 있었다.

실기시험 날 만났던 애였다. 이름이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였던가. 성은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쟤 나랑 같은 반이었어……? 운명이란 게 있다면 이럴 순 없었다.

실기 날 있었던 내 미친 짓을 그대로 다 들은 유일한 학생이 같은 반이라는 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분명 첫인상이 좋진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기 싫었다. 하지만 웃는 얼굴로 자꾸 부르는데 어떻게 또 안 가고 무시하겠는가.

우물쭈물하며 다가가자 에르네스트가 그 특유의 눈웃음을 치며 반가워했다.

“□□ □ □□ □□. 교복도 잘 어울리네, 타티아나.”

“고마워요. 에르네스트.”

난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얘 뭐야. 내가 실기 치고 나왔을 때 째려보던 그 눈빛은 뭐였던 거야?

어색함과 당혹스러움으로 상황파악을 좀 하려고 하는데 그럴 시간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창가에서 일어나더니 바로 앞에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자, 여기 앉아.”

“……?”

나조차도 우리집 벨카한테 ‘앉아 주세요.’라고 하는데, 너무하는 거 아니니?

멀뚱히 쳐다보자 에르네스트가 오해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 뜻이 □□□ □□□. 단지 네 □□□ □□□□□ 네 자리는 여기라는 것이지.”

“자리 말인가요?”

“그래.”

에르네스트는 보란 듯이 교실을 향해 팔을 뻗었다. 조금 더 자세히 교실을 보니 확실히 특징이 있긴 있었다.

모두 같은 교복을 입고 있긴 했지만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유학생 집단이었다.

같거나, 인근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끼리 모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있는 쪽을 보았다. 에르네스트와 여학생 두 명 모두 러시아인이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생각 없이 사는 나도 지금 교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알아차릴 만했다.

내가 말귀를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에르네스트가 가늘게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그가 날 끌어들이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에르네스트의 입장에선 편입시험 첫날부터 화끈한 모습을 보여 준 날 케어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국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다.

약간 스스로가 한심해져서 작게 한숨을 쉬는데, 에르네스트의 기대감이 잔뜩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진짜 거짓말 하나 없이 초롱초롱하다.

아, 얘 뭐지? 당연히 내가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자신감 넘쳐 하니까 되레 좀 귀여워진다.

난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 제가 앉고 싶은 곳에 앉을 건데요?”

“그……으래?”

실망한 모습도 너무 선명해서 웃음이 나왔다.

가만히 얼굴을 보면 콧대가 반듯하게 선 것처럼, 성격도 콧대가 조금 높은 것 같지만 본바탕이 나쁜 애 같진 않았다.

물론 내가 아닌 다른 애들한텐 어떻게 하는지 좀 봐 둘 필요가 있겠다. 혹시 필요하다면 내가 한마디 정도 할 생각도 있었다.

그래도 지금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았다.

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살짝 기가 죽은 에르네스트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마음이 약해진다.

다른 곳에 딱히 앉고 싶은 곳도 없었고 다른 아이들을 소개받고 싶기도 해서, 난 에르네스트가 처음 가리켰던 자리에 가서 앉았다.

대번에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잘 되었다는 듯 옆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들과 날 소개해 주었다.

“□□□□□□ 인사해.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이쪽은 타티아나야. 이번에 편입한 □□□.”

에르네스트가 소개해 준 두 명은 삐딱하게 서서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다가 그제야 내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조금 날카로운 인상이 인상적이었고 발렌티나는 웨이브가 들어간 갈색 단발머리가 귀여운 아이였다.

잠시 시선이 오가고, 난 조금 무서워졌다.

생각해 보면 또래 여자애들을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금 망설이고 있자 결국 아나스타샤라는 애가 픽 웃으며 다시 스마트폰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잠깐만, 내가 리허설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실수했어. 재도전하면 안 돼?

다행히도 옆에 있던 발렌티나는 내 쪽으로 다가와 주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이 반짝였다.

“발렌티나 페트로브나 메체티나야.”

“예……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고 해요. 반가워요.”

“진짜인가 봐? 어떡해.”

호들갑을 떨던 발렌티나가 약간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있지, 에르네스트한테 듣긴 했는데……. 너 정말 그 베르체노프의 타티아나니?”

“맞아요.”

내가 담백하게 수긍하자 발렌티나는 조금 쳐다보더니, 약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소문이랑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타티아나. 내가 들은 이야기로는…….”

발렌티나는 말하다 말고 아차 싶었는지,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끝까지 안 들어도 알 만했다. 어지간히 막 나갔나 보다.

여기서 생각을 잘 해야 했다.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기존 타티아나의 이미지를 끌어안고 갈 것인지.

아니면 기억상실을 핑계로 가뿐하게 새 출발할 것인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당연히 싹 리셋하는 게 낫다. 과거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 없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아버지도 그렇게 하라고 했었고, 나 역시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앉아 있는 에르네스트와, 스마트폰을 쥐고 있지만 눈만은 이쪽을 향하고 있는 아나스타샤를 보니 이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타티아나의 모든 것을 몽땅 가지고 가면서 나에게 불리한 요소만 살짝 버리고 간다는 것도 어쩐지 굉장히 비겁한 짓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럴…… 때도 있었죠.”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것은 모든 것을 떠안고 가겠다는 긍정이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뱉어 놓고 나니 급격히 후회가 들었지만, 순식간에 상황은 흘러갔다.

“발렌티나, 무슨 소문이었는데?”

화려한 금발이 휙 끼어들었다. 관심 없는 것처럼 보이던 아나스타샤였다. 발렌티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내가 대신 대답했다. 이젠 주저할게 없다.

“제가 욕 좀 하고, 뭣 좀 집어던지고…… 그랬을 거예요.”

“?”

아나스타샤가 기겁을 하며 눈을 깜빡였다. 음…… 진짜 했는지 안 했는진 모르겠지만 뭐 비슷하게 깽판을 쳤겠지.

혹시나 해서 발렌티나 쪽을 보니 그녀는 내가 내 입으로 말해 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역시 하긴 했나 보구나.

아나스타샤도 발렌티나를 보며 눈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발렌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화가 많이 났었나 보네.”

아나스타샤는 당혹감이 역력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처음에 스마트폰이나 보면서 살짝 껄렁이는 게 무서워 보였는데 지금 보니 귀엽기만 했다. 이렇게 귀여운 애를 왜 무섭다고 생각했었지?

“아나스타샤? 제 이름은 아까 들었죠? 반가워요.”

“어, 응…… 난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 반가워.”

말은 반갑다고 하는데 눈빛은 영 꺼림칙했다. 살짝 미친 애 보는 눈빛이다.

벌써부터 후회가 든다. 그냥 기억상실이라고 할 걸 그랬나…….

인사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고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함께 어디론가 나가 버렸다.

내가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에르네스트와 둘이 남게 되었다.

조금 어색해진 상황에서 넉살좋게 에르네스트에게 말을 붙일 재간도 없어서 난 괜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슬쩍 주위를 보니 어느새 학생들이 많이 와 있었다. 저 멀리엔 익숙한 얼굴, 한승우도 보였다.

눈이 마주치니 그제야 옅게 웃는다. 이제 와서 뭘 웃어. 번호 따 가서는 지난 한 달 사이 연락 한 번 없던 놈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빅토르와 자하르가 끝까지 그렇게 겁을 줘 놨으니 아마 연락 한 번 잘못 했다가 사달나는 거 아닌가 싶었을 것이다.

저 녀석이 여기까지 와서 인사를 할 용기는 없어 보이니 내가 직접 가는 수밖에 없었다.

“잠깐, 타티아나.”

그간 밥은 먹고 살았나 좀 물어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에르네스트가 날 불러세웠다.

“무슨 일이죠?”

“어디 가?”

내가 어딜 가든 말든? 너한테 보고까지 해야 하니?

“아는 사람이 있어서요. 인사 좀 하려고 해요.”

“아는 사람?”

“예.”

이제 같은 반 친구가 되긴 했지만…… 솔직히 한승우랑 친구라기엔 좀 그렇다.

태블릿 컴퓨터가 없으면 서로 대화도 못 하고, 지난 한 달간 연락 한 번 없었고. 그냥 실기장에서 만난 아는 사람이라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의심스럽다는 듯 재차 물었다.

“정말이야?”

“그런데요?”

“넌 그냥 아는 사람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

“…….”

“말이 안 되잖아.”

에르네스트는 사건의 전말을 모조리 다 본 사람이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냥 다 오해라고 발뺌할까?

조금 머뭇거리는데, 에르네스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너, 저 □□□ 좋아해?”

“?”

미쳤니, 너?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물론 내가 한승우를 위해서 한 일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갑자기 무슨 실례란 말인가?

한바탕 쏘아붙이려다가, 멈칫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냥 날 유학생과 한 번 엮어서 놀려 보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모종의 확신을 얻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만 노려보자 에르네스트가 조금 더 내 쪽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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