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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8화 (18/1,277)

##  18화

에르네스트는 소녀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애써 흥미진진한 척 하지만 어딘가 우울한 미소를 짓는 소녀였다.

손을 대면 흩어질 것 같은 백금발에 조금 연약해 보이는 외모가 시선을 끌었다.

에르네스트는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어디까지나 순수한 마음이었다.

소녀와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조금 나눠 본 에르네스트는 깜짝 놀랐다.

고아한 외견의 소녀는 생각보다 훨씬 거물이었다. 제 의견을 내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고, 특히 클래식에 관해서만은 누구보다 곧고 뚜렷한 의식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실력 또한 그 의식에 걸맞게 뛰어났다.

평생을 자신 또래에 적수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에르네스트는 생각을 고쳐먹어야만 했다. 굉장한 실력자였다.

그리고 소녀는 그 모든 것을 과감하게 던져 버리기도 했다.

자유곡을 이상하게 준비해 온 동양인 유학생을 위해 자신 역시 자유곡을 내던져 유학생과 운명공동체로 한데 엮어 버리는 정신 나간 짓을 하는 것을 보고 에르네스트는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저 정도 실력자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에르네스트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고, 동시에 그는 그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너, 저 유학생 좋아해?”

약간 가시 돋친 말투가 되는 것도 어쩔 수 없으리라. 에르네스트는 어쩐지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소녀, 타티아나는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적대적인 시선으로 그를 노려봤다. 에르네스트는 찔끔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굉장히 모욕적인 언사로 듣기에 충분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다.

러시아 재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베르체노프 가문의 영애에게 할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느낀 것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도 가만 내버려 두면 타티아나는 또다시 저 유학생에게 가 버렸을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용기를 내어 타티아나에게 다가섰다.

“그게 아니라면……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설명해 줘. 난 그걸 들어야겠어.”

순간 타티아나의 표정이 눈이 녹듯 사르르 녹아내렸다.

“훗, 우후후…… 후후후후.”

“뭘…… 웃어?”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가리고 돌아선 타티아나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타티아나는 눈만 돌려 에르네스트를 보며 말했다.

“귀여워라…….”

“뭐……?”

에르네스트가 얼이 빠져 되물었다.

귀엽다는 소리는 정말 많이 듣고 자랐지만 동갑내기 여자애한테 들어 보긴 생전 처음이라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걸 발견한 타티아나는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눈을 빛냈지만, 곧 웃음기를 거두고 조금 우울해 보이는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타티아나가 조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냐! 그럼 뭔데?”

“친구……는 아니지. 그 이전의 문제니깐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타티아나는 홀로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정리하는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되도록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싶었지만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것 자체도 마음에 안 들었다.

“아니면 아니다 맞으면 맞다 말을…….”

“에르네스트. 하나 물어볼게요. 우린 뭐죠?”

“무슨 소리야……?”

“그냥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 해 봐요. 우린 뭐예요?”

타티아나가 뭘 묻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어떻게 대답해야 그녀에게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는 타티아나에게 에르네스트는 바보 같은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학생……?”

“정답이에요. 잘 알고 있네요.”

하지만 타티아나는 기뻐하며 정답이라 말해 주었다. 에르네스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지만, 곧 다시 절망했다.

“그럼 학생이기 전에 뭐죠?”

“자꾸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대답해 주세요. 어서요.”

에르네스트는 살짝 용기도 생기고, 심술이 나기도 해서 대담하게 대답했다.

“남자와 여자지.”

“정답이네요.”

타티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긍정했다. 조금 골려 볼까 싶었던 에르네스트가 되레 뻘쭘해질 정도로 담백한 태도였다.

이어서 타티아나가 물었다.

“그럼 남녀이기 전에 뭐죠?”

“인간? 포유류? 동물? 뭐 그런 거겠지. 이게 네가 원하는 대답이야, 타티아나?”

“아하하, 그건 조금 멀리 갔네요.”

담담히 계속되는 질문에 에르네스트가 조금 짜증을 냈고 타티아나는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고 말했다.

“남녀이기 전에 연주자죠.”

“……뭐라고?”

타티아나의 말을 듣고 에르네스트는 무언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니 그건 맨 처음에 말했잖아? 학생이라고.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는 듯한 에르네스트를 보며 타티아나가 힘없이 웃었다.

“우린 남녀이기 이전에 연주자죠. 그리고 세상에 남녀는 많지만 연주자는 그리 많지 않아요. 보기 드문 종이라 할 수 있겠군요. 우리 말로는…… 보기 드물어서 지켜야 하는 종? 이걸 뭐라고 하죠?”

“알아듣게 말을 좀 해.”

“으음, 죄송해요.”

타티아나는 희귀종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약간의 위화함을 느끼며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엉망진창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자신이 조금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한숨을 푹 쉬고는, 약간 불안해하면서, 의심스러워하면서 천천히 말을 맺었다.

“우린 연주자일 거예요. 그리고 저기 한승우도, 그래요.”

타티아나가 자신의 귀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때, 들었죠?”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와 처음 만났던 날, 그녀와 함께 실기시험장의 벽에 기대어 서서 들었던 하이든과 쇼팽을 떠올려냈다.

그건…… 확실히 들어 줄 만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티아나의 행동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타티아나는 배시시 웃었다.

“자, 그럼 여기까지.”

타티아나가 박수를 짝 치며 말했다.

“아직 에르네스트와 이런 이야기까지 할 때는 아니었는데, 제가 조금 지나쳤네요. 미안해요.”

타티아나의 어투는 어딘가 벽을 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급히 말했다.

“잠깐 기다려. 네 말은 그러니까…… 그냥, 그냥 같은 연주자라서…… 네가 인정할 만한 연주자라서 그렇게 도와주었다는 거야?”

타티아나는 약간 주저하더니, 대답했다.

“예. 한승우에겐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죠.”

“가치? 너도 위험했었다는 건 알아? 넌 아무 가치가 없어?”

에르네스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실기장을 나오면서 타티아나가 지었던 표정을 보면 그녀는 분명 대충 놀러 온 내정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히 자신의 실기에 무언가를 걸고 있었고,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타티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했죠. 그리고 앞으로도요. 한승우는 연주자로서 성장해서 절 위협할 테니까.”

타티아나의 대답은 한술 더 떴다. 에르네스트는 기가 막혔다. 그녀는 여기 있는 모두가 동료이자 동시에 경쟁자임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에르네스트가 망연히 물었다.

“그런데 왜……?”

“글쎄요…….”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는 듯 타티아나는 말을 흐리다가, 대답했다.

“무대에 올라가지도 못한 연주자를 그렇게 외롭고 허무하게 사라지도록 둘 순 없었어요.”

“경쟁자인데도?”

“지금 제 기회는…… 한승우가 기회를 붙잡기 위해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까요.”

“무슨 소린진 모르겠지만 난 그 부분이 의심스러운데. 내가 보기엔 넌 저놈을 너무 신경 써. 단순히 연주자 어쩌고 하는 궤변으로는 말이 안 돼.”

에르네스트의 말에 타티아나는 조금 머뭇거렸다.

“제 프라이버시에 관한 것이라 자세히 말은 못 해 드리지만…….”

살짝 생각을 고르는 듯한 것도 잠시, 시원하게 인정해 버렸다.

“사심이 아예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네요.”

그러곤 조금 짓궂게 덧붙였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게 설령 에르네스트였더라도 저는 주저 없이 도와주었을 거예요. 반드시 말이죠.”

“……!”

깜짝 놀라는 에르네스트를 뒤로하고 타티아나는 한승우에게 갔다.

자리에 앉아 있던 한승우는 타티아나가 다가오자 깜짝 놀라서 책걸상을 덜커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타티아나는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니?”

그제야 에르네스트는 위화감 하나를 더 깨달았다.

자신에겐 단 한 번도 반말을 하지 않았던 타티아나가 한승우에겐 친근하게 말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했던 말들을 곱씹었다. 꼭 남녀 간의 사랑이 있어야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건 아니란 것엔 동의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보이는 행동이 조금 비틀려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헌신, 저 호의. 그 모든 게 다 단순히 연주자로서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렵네.”

살면서 여자애들이 짜증나거나 번거롭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어렵다고 생각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간만에 승부욕이 끓는 것을 느꼈다.

타티아나가 한 말들을 잘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 요지는 단순했다.

연주자로서의 역량을 보이고 인정받는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대우하겠다는 뜻 아닌가?

언제가 되어야 자신의 연주를 보여 줄 수 있을지, 에르네스트는 시간표를 확인하며 고민했다.

* * *

한승우와 간단히 안부 인사를 하는 사이에도 에르네스트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뜨거워라.

남자애가 보내는 열렬함이라는 것이 조금 문제이긴 했지만 일단 외모가 말도 못 하게 귀여우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승우 역시 귀여운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얘는 그냥 중고등학교 때 친구 보는 기분이었다. 자연스레 반말이 나가는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

귀엽다 귀엽다 하지 말고 솔직히 진심을 토로하자면, 다 귀찮다. 몽땅 귀찮아.

난 정말 피아노 말고는 남녀 관계 따위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옛날도, 지금도. 내가 왜 그런 것에 시간과 기력을 빼앗겨야 한단 말인가?

제발 내가 한승우를 좋아해서 도와줬다는 착각 같은 건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미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건 알겠다.

일단 한승우와 너무 가깝게 지내는 것은 좀 자제해야 할 것 같다. 오해의 심지에 불을 붙일 필요는 없었다.

정말 깔끔하게 인사만 마치고는 복도로 나왔다.

복도의 창을 열고 창가에 서서 9월의 바람을 만끽하니 머리가 좀 개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다가, 한때 시끄러웠던 주제가 문득 떠올랐다.

과연 남녀 간에 친구가 가능한가?

본래 나는 가능하다는 쪽에 한 표를 던지곤 했었지만…… 솔직히 그게 나 혼자 그러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에겐 잘난듯이 떠들었지만, 아직은 헷갈리기만 한 생각들을 하면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흡.”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이상한 소리를 냈다.

반짝이는 화사한 금발에 시크한 외모가 함께 어우러져 빛났다. 아까 반에서 인사를 나눴던 아나스타샤였다.

목표를 발견한 내가 움직이자,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등을 돌려 큰 걸음으로 되돌아갔다.

“……?”

쟤 지금 나 피해서 도망가는 건가?

혹시나 싶어 따라갔더니 더더욱 속도를 올려 달아났다.

갑자기 열 받기 시작했다. 내가 너한테 뭐 했어? 왜 피해?

작정을 하고 뛰자 내 발소리를 들은 아나스타샤가 힐끗 내 쪽을 쳐다보더니 본격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조금 흥분된다. 내가 정말 학생이 되긴 했구나. 학교 복도에서의 추격전이라니 새삼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래, 어디 누가 이기나 해 보자 이거지?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내가 말이지…….

“헤엑…… 헤엑…… 헤엑…….”

10초만 뛰어도…… 퍼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어 스르르 무너졌다. 숨이 막히고 눈앞이 흐려졌다. 계단을 뛰어 올라간 게…… 최악으로 호흡을 망가뜨려 놓았다.

예고르가 반강제적으로 운동을 시키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벨카와 산책을 하거나 스트레칭으로 재활을 하는 것 정도였다.

지금 조금 후회됐다. 달리기 10초 했다고 이렇게 퍼진다는 게 말이 돼……?

“하악…….”

여유가 조금만 더 없었더라면 진짜 기절했을지도 모르겠다. 난 쿵쾅거리는 심장이 조용해질 때까지 꼼짝도 못하고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괘, 괜찮아?”

머리 위에서 누군가 걱정스레 물었다.

눈만 들어 쳐다보니, 아나스타샤가 복잡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숨도 하나 거칠어지지 않은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와, 천하의 중앙음악학교에 육상 꿈나무가 있는 줄은 또 몰랐네?

가까스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괜찮아요…….”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안 괜찮아요…….”

“어느 쪽이야?”

“…….”

내가 쫓아와 놓고 정말 미안한 말인데, 그냥 잠깐 저리 가 주면 안 될까? 친구고 뭐고 혼자 있고 싶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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