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9화 (19/1,277)

##  19화

“여기 기대 봐. 심호흡하고.”

“…….”

“이거 마시고.”

“고마워요……. 읍…….”

“줘 봐, 따 줄게.”

의자에 퍼져서 아나스타샤가 가져다준 음료수를 마시니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내가 죽으면 자신이 용의자가 되리라 생각했는지 날 살리기 위해 굉장히 꼼꼼하게 챙겨 주었다.

복도 끝에 있는 휴식 공간까지 날 부축해 준 다음 음료를 사서는 뚜껑까지 따 줬다. 고마워요, 아나스타샤…….

파인애플 맛 음료수를 꼴깍이고 있자니 아나스타샤가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물었다.

“너…… 괜찮은 거야?”

“좀 낫네요.”

“무리하지 마. 10초도 제대로 못 뛰면서.”

“…….”

아나스타샤의 말투는 무시하는 투가 아니라 정말 심각하게 걱정하는 투였다. 나 역시 심각함을 조금 느꼈다.

난 인대가 굉장히 약한 편이니 근력운동은 못한다고 쳐도 유산소 운동은 정말 좀 해야 할 것 같다. 이게 무슨 추태인지 모르겠다.

난 아나스타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죽을 뻔했어요.”

“……살면서 처음이야. 이런 일로 감사 인사 듣는 거.”

“저도 처음이에요. 이렇게 뛰어 본 거.”

“…….”

갑자기 어색해졌다.

아나스타샤는 나에게 왜 쫓아왔냐고 묻는다면 왜 도망쳤냐는 질문이 이어질 테니 일부러 안 묻는 것 같았고, 나는 아나스타샤에게 왜 도망쳤냐고 물었다가 괜히 이유를 듣기가 무서웠다.

내가 자신감 넘치고 사교성 좋은 사람이었다면 여기서 뭔가 친해질 수 있는 말들을 찾아냈겠지만, 난 본래 그렇게 붙임성이 좋은 성격도 아니고…….

서로 멀뚱거리며 보다가 아나스타샤는 결국 휙 고개를 돌렸다.

“그, 그거 천천히 마시고 와. 난 먼저 갈 테니까.”

“잠깐만요, 아나스타샤. 음료수값…….”

“됐어, 동전 하나 안 가지고 다닐 것같이 생겨선…….”

내가 그렇게 없어 보이게 생겼어? 발끈해서 지갑을 꺼냈지만 정말 아버지가 준 카드 한 장뿐이었다. 투시라도 한 건가.

아나스타샤, 카드도 받나요?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아나스타샤는 사라진 뒤였다.

난 그녀가 사 준 음료수를 홀짝이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 * *

다행히 입학식 첫날부터 수업 진도를 나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선생님은 없었다.

서로 인사하고 앞으로 수업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그냥 오리엔테이션적인 의미가 강했다.

그래도 첫날부터 수업에 안 들어오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없나요?”

걔 아침에 있었는데요, 라고 말도 못 하고 난 전전긍긍했다. 첫 교시인 러시아어 시간에 없길래 설마 싶었는데, 2교시인 수학 시간에도 안 들어왔다.

얘는 어딜 간 거야? 괜히 내가 뭐라도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잖은가? 그렇다고 에르네스트나 발렌티나에게 물어보기에도 어색했다.

선생님은 잠시 기다리더니 출석부에 무언가 체크하고 다음 출석을 불렀다.

“리처드 피츠앨런 하워드.”

“선생님. 리처드는 비자 문제로 당분간 못 나올 거예요.”

“……흠. 이번에도인가요?”

“예.”

리처드라는 학생은 아나스타샤처럼 땡땡이를 친 것이 아니라 정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얼굴도 모르는 친구이지만 문제가 잘 풀렸으면 좋겠다.

여차저차 출석을 부르고 앞으로 진도를 어떻게 나갈 것인지 설명 듣고, 학생들은 죽겠다고 엄살을 피우고. 세상 어디 학교를 가도 이 광경은 비슷비슷할 것 같은 느낌이다.

약간 추억에 젖어 책을 펼쳐 봤더니 중학교 수준의 수학이었다.

대충 보니 이차함수와 부등식…… 이 직각삼각형 그림은 피타고라스의 정리일 게 뻔했다.

내가 수학에게 작별을 고한 것은 사인 코사인 탄젠트부터였으니까……. 이번엔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을까, 수학아?

* * *

점심엔 식당으로 내려가서 급식을 먹었다. 학생은 급식을 먹어야지.

그런데 말이 급식이지 그 수준은 호텔 뷔페 급이었다.

흑빵과 카틀레트, 그리고 수프인 보르쉬 정도가 메인으로 나왔는데 입맛이 꽤 고급스러워진 내가 먹어도 상당히 괜찮았다.

“어때, 어때? 입맛에 맞아?”

“예. 맛있는데요.”

“다행이다. 혹시 안 맞으면 어쩌나 했지 뭐야.”

첫날부터 혼자 밥을 먹는 일은 없었다. 발렌티나가 옆에서 함께 있어 준 덕분이었다.

교실 안에선 에르네스트도 발렌티나도 각자 생각이 많은지 나와 이야기를 하려는 느낌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점심시간까지 혼자 두기엔 조금 불쌍해 보였나 보다.

난 보르쉬를 한 스푼 떠 먹다가 혹시나 해서 살짝 물어보았다.

“발렌티나. 혹시 아나스타샤는 어디 갔는지 아세요? 아침엔 있었잖아요.”

“아, 걔?”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발렌티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 흑빵을 북 찢으며 대답했다.

“어디 연습실에라도 들어가 있을걸?”

“예?”

“걔 원래 그래. 신경 쓰지 마. 괜찮아,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다. 조금 더 물어보려는데 발렌티나는 이미 할 말 다 했다는 듯 한입 가득 흑빵을 베어 물었다.

연습실? 물론 피아노과 학생으로서 연습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멀쩡히 학교에 잘 와 놓고는 결석 처리되는 것은 비상식적이었다.

아나스타샤가 학교 생활을 어떻게 하든 내가 간섭할 일은 아니겠지만…… 어쩐지 내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우울해졌다.

그렇게 아나스타샤에 대한 생각을 하는 나와 달리 발렌티나는 내게 묻고 싶은 것들이 있는 듯했다.

“타티아나, 여기 오긴 전엔 어디 다녔던 거야?”

“그…… 평범한 학교에 다녔었죠.”

“우와, 거짓말도. 그런 애가 여길 어떻게 와? 내가 듣기론 쿠즈민키 쪽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쪽 음악학교에 있었던 거야?”

“……?”

그게 어디야?

자꾸 과거 이야기를 물어보는데 뭐라 답해야 할지 진짜 어려웠다.

집에선 아버지고 오빠고 옛날 이야기는 거의 금기처럼 입에 담지 않으니까 난 아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것들에 대해 딱 자르지 않고 안고 가기로 결정했다.

이전 학교에 대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굴면서도 의심을 사지 않게 하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지만 난 열심히 말을 맞췄다.

식사 후 오후엔 레슨이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내 레슨을 맡아 주실 지도 선생님은 미하일 표도로비치 볼콘스키 선생님이었다.

처음에 날 눈독들이고 이곳으로 데리고 오려고 했던 것도 미하일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달리 다른 분을 택할 이유가 없었다.

미하일 선생님이 나를 너무 천재로 알고 계신 것은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이제 와서 도망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잠재력이 그리 높지 않은 몸과 10년쯤 앞선 피아니스트로서의 경험만을 가지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진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해 보기로 한 것이니 최선을 다해 앞으로 가 보기로 했다.

미하일 선생님이 맡고 있는 두 개의 레슨실로 가니 그 앞 복도엔 이미 학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복도 벽에는 스케줄 표 같은 게 있었는데 학생들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얼굴을 들이밀고 내 순번을 확인하려던 때였다.

“……!”

바로 옆에서 어깨를 부딪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반짝이는 금발에 청록색 눈동자. 아나스타샤였다.

오전 내내 보이지 않았던 애가 갑자기 나타나자 깜짝 놀랐지만 나보다 아나스타샤가 더 놀란 듯했다.

“너, 어, 너…….”

이번에도 그녀는 바로 날 피하려고 했다. 이번엔 놓치지 않고 팔을 붙잡았다.

아나스타샤가 흠칫 떨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난 나보다 큰 아나스타샤를 질질 끌고 옆으로 빠져나왔다.

“아나스타샤.”

“…….”

“왜 절 피하는 거예요?”

아예 직접적으로 물어봤다.

아나스타샤가 날 꺼려 할 이유라고는 한 가지뿐이었다.

점심에 발렌티나가 보인 태도는 명백히 이상했다.

대놓고 묻지는 못했지만 발렌티나는 타티아나의 과거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아나스타샤는 발렌티나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들었을 것이다.

나에 대해 좋은 이미지가 없다는 건 알겠지만 정확히 무엇을 들었느냐고 추궁하기도 힘들었다.

또 침묵이 이어졌다.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지 알지도 못하는 과거를 떠안고 가기로 마음먹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같이 가겠다는 이야기이지 발목 잡게 두겠단 소린 아니다.

그게 날 이렇게 곤란하게 한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아나스타샤.”

“?”

가만히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처음으로 동급생에게 제안했다.

“같이 연습실 가서 연습하지 않으실래요?”

“뭐?”

발렌티나의 말에 따르면 오늘 수업에 빠지고 그 시간에 연습실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아이다.

같이 연습실에 가자고 하면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습실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나스타샤의 긴장이 조금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내가 다시 한 번 재촉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왔다.

우리 둘은 빈 연습실을 찾아 들어갔다. 방음처리가 된 방에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있었다.

집에 있는 내 연습실보다 조금 작지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문을 잠그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난 자연스럽게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아나스타샤가 날 보더니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뭐 해……?”

“연습실에 왜 왔겠어요.”

“무슨 소리야. 연습하자는 건 핑계고 나한테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

“할 말 있지요.”

지금부터 할 거야.

아나스타샤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난 건반 덮개를 열고, 의자를 조절하고, 자세를 잡은 뒤, 양손을 깍지 낀 채 스트레칭하면서 아나스타샤에게 툭 던지듯 물었다.

“저기, 신청곡 같은 거 있나요?”

“……?”

보통 이렇게 악보도 없이 무작정 신청곡을 받는 경우는 없었다.

제아무리 베테랑 피아니스트라 하더라도 가능한 레퍼토리의 범위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굳이 모든 곡들을 다 칠 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실질적으로 자주 연주되는 곡들만 추려 보자면 그 개수가 엄청나게 압축되고, 또 나는 이 나이 대 학생들이 알 법한 곡들은 이미 한 번 지나왔었다.

그리고 지난 반년간은 그것들을 다시 되돌아보며 이 손에 적응시킨 기간이었다.

지금 내 레퍼토리는 어지간한 또래들을 한참이나 상회한다.

아나스타샤는 날 잠시 보더니 의심이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

“악흥의 순간 4번 칠 수 있어?”

“라흐마니노프 말이죠?”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흐마니노프의 악흥의 순간 4번. 참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곡이란 말이지.

물론 나도 사랑해 마지않는 곡이다.

주저 없이 왼손으로 건반을 내리쳤다.

빠른 아르페지오를 포르티시모로 시작하는 열정적인 곡이다.

이 천둥이 우르릉거리는 듯한 프레이즈가 잇달아 반복되면서 전체적 기준을 잡는다.

이어서 오른손을 내리쳤다. 쾅. 여전히 소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손이 따라가 주질 않는다. 아직도 갈 길이 한참이다.

모자라게만 들리는 음악이었지만 난 최선을 다해 연주에 임했다.

격렬하게 곡 전체에 걸쳐 그 부피와 존재감을 만드는 왼손은 쉴 틈이 없었다. 이 무지막지한 아르페지오는 속도와 힘 둘 모두 최대치를 요구했다.

여기서 적절한 균형감각이 필요했다. 너무 강하게 하면 속도가 떨어지고 속도를 올리면 힘이 떨어진다.

내 손이 표현할 수 있는 균형을 잡아 힘있게 기교를 살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껴졌다.

오른손으로 피아노가 부서져라 악센트를 살리며 주제를 완성해 나갔다.

피아노는 정열적인 악흥의 순간, 순간을 토해 낸다. 더 세게, 더 빠르게.

쉴 새 없이 빠르고 균일하게 양손 아르페지오를 전개하면서는 거의 피아노와 격투를 벌였다.

난 달리기는 못하지만 피아노와 하는 격투엔 능숙했다.

쳐서, 때리고, 끌어 올렸다가, 내리꽂았다. 다시 찍어 누르고, 멱살을 붙잡고 당긴다.

무섭도록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더욱 강하게 몰아붙였다.

러시아의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젊은 시절 머릿속에 있었을 음악을 이 자리에 재현해 냈다.

“…….”

마무리는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4도 교차 피날레다. 격렬하게 화음들을 밀어내고, 3분 남짓한 곡에 마침점을 찍었다.

“후우…….”

손목이 저려 왔다. 그만큼 최선을 다한 것도 있지만 아직도 내가 몸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여전히 난 불안하고 우울했다.

그래도 연주자로서, 지금 이 곡으로 난 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

고개를 드니 아니나 다를까,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날 보는 시선에서 계속 느껴지던 부정적인 감정들은 씻은 듯이 날아간 지 오래였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

천 마디 말로 나 자신을 변명하기보다, 이렇게 한 곡으로 날 설명하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너 진짜구나.”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말했다. 여지껏 숨을 참기라도 했는지, 긴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네 피아노는, 이 연주는 그냥 얻을 수 있는 게 아냐.”

“고마워요.”

아나스타샤는 내 옆까지 다가와서 무릎을 굽혔다. 그러곤 이번엔 그녀 쪽에서 내 팔을 잡았다.

“어떻게 이 팔에서 그런 소리가 나지……? 난 못하겠…….”

“기본적인 힘이야…… 당연히 부족하죠. 하지만 할 수 있어요, 아나스타샤. 이 정도는.”

“말이야 수도 없이 들었지. 그건 마르타 아르헤리치 같은 □□□ 사람에게나 가능한 말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실제로 되면…… 이렇게 되는구나.”

그녀는 연신 중얼거리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근래 슬럼프에라도 빠져 있었던 듯했다.

아마 테크닉과 소리에 관련된. 아나스타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연주자들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게 되면 넘어서야 하는 벽을 몇 번이고 만나기 마련이었다.

지금 나는 동년배들이 마주한 벽을 몇 개 정도 깨고 조금 앞서 있는 상태였고, 아나스타샤는 내 등 뒤에서 벽 너머를 살짝 엿본 듯한 희열을 표정에서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나 역시 아나스타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아 기뻤다.

아이들에게 선물을 건넸을 때, 받는 아이는 물론이고 주는 사람도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 감동을 느꼈다.

할 수 있다고, 분명히 가능하다고 힘껏 껴안아 주고 싶었다.

앞으로 더 성장해서, 날 밟고 올라설지도 모르는 아이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아무런 계산 없이 순수하게 기뻐했다.

조금 재능이 있었을 뿐인 기억과 별로 재능이 없는 몸을 지닌 나와 달리 이 아이들은 제대로 된 천재들이다.

살짝 가능성을 일견한 것만으로도 바로 길을 찾아내는 것을 보라. 이렇게 성장을 부추기면 정말 몇 년 가지 않아 난 따라잡히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조금 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 찬란한 아이들을 방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난 연주자이지만, 그전에 음악가니까.

아나스타샤는 내 팔을 만지는 것을 그만두더니 갑자기 내 옆자리에 엉덩이를 밀고 들어왔다.

갑자기 찰싹 달라붙는 데에 당황해서 주춤하며 옆으로 물러나자 아나스타샤는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해.”

그러곤 내 쪽은 보지도 않고 피아노 쪽만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 나도 잘 모르겠어, 왜 그렇게 도망쳤는지. 발렌티나가 해 준 이야기도 있지만 그런 □□□□□ 지우고 널 똑바로 봐 줬어야 했는데. 너와 이야기를 해 봤어야 했는데.”

그리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청록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넌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야. 난 믿어.”

“……!”

“다신 도망치지 않을게.”

“…….”

“용서해 줄래?”

사과를 받고 난 멍하니 굳어 버렸다.

똑바로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뇌리에 콱 틀어박혔다. 그대로 머리는 정지해버 렸는데 심장만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나스타샤의 사과는 기다리던 바였다. 당장 알겠다고 받아 주면 될 일인데, 간신히 연 입에선 주제를 돌리는 말만 튀어나왔다.

“그보다!”

“?”

“오늘 수업은 왜 안 나온 거예요?”

오늘 하루 종일 궁금했던 것이었다.

대체 날 어떻게 생각했길래?

이제야 물어볼 타이밍이라고 확신한 나는 대답을 기다렸다.

아나스타샤는 단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즉답했다.

“뭐 하러 나가.”

“예?”

아나스타샤는 뻔뻔하게 눈매를 치켜 올렸다.

그러더니 처음 봤을 때처럼 쿨하게 툭 내뱉었다.

“첫날 수업할 것도 아닌데 가서 뭐 해. 잠이나 자고 연습이나 하지.”

“…….”

그것도 그렇네요?

나 때문에 아나스타샤가 없어졌었다는 건 모두 자의식 과잉이었나……?

급격하게 몰려드는 쪽팔림에 난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어디 가!”

“쫓아오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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