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0화 (20/1,277)

##  20화

도망가다가 아나스타샤에게 붙잡힌 나는 그녀와 함께 연습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힘을 주지 마시고 손끝으로 밀면서 감아요. 감아올리다가, 툭 하고 떨어뜨려 봐요.”

경험으로 앞서 있는 내가 조금이나마 알려 줄 수 있는 것들은 이 약한 몸으로 500kg도 넘는 피아노를 다루면서 감각적으로 터득한 기술들이었다.

그 감각을 말로 설명하자니 이상하게만 들렸지만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내 말에 따라와 주었다.

이렇게 저렇게 쳐 보는데 순간순간 발전하는 게 귀에 들릴 지경이다.

벽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지, 기본적으로 타고난 연주자인 것이다.

정말 스펀지에다가 물 붓는 기분이다.

그렇게 나도 정신없이 그녀와 연습을 하다 보니 2시간도 넘게 지나 있었다.

살짝 현기증이 일었다. 체력적으로 아직 팔팔한 아나스타샤에 비해 난 어디 드러눕기 직전이었다.

혼자 연습을 하는 거라면 또 모를까, 계속 말을 하면서 신경을 쓰자니 2시간밖에 안 지났는데도 피로도가 상당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아나스타샤.”

“지금 그만하면 어떻게 해? 이 □□□ □□□ 부분에 대해서 네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

“애초에 전 선생님이 아니잖아요. 설명도 잘 못하고.”

“맞아. 네 설명은 못 알아듣겠어.”

막상 그렇다고 인정해 버리니까 살짝 뿔이 났다. 2시간이나 같이 있어 줬는데……!

내 얼굴을 본 아나스타샤는 배시시 웃으며 첨언했다.

“그래도 네가 훨씬 좋아.”

“……제발 그런 말 그만둬 주세요.”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던지는 거라는 건 잘 알지만……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난 한숨을 쉬며 대충 상황을 정리했다.

“아나스타샤. 리스트의 곡들을 쳐 보세요. 안 쳐 봤죠?”

“어…… 어떻게 알았어?”

“아나스타샤의 소리를 들어 보면 알아요.”

“선생님이 리스트는 이르다고 그랬는데. 연주회용 연습곡 정도밖에 안 쳐봤어.”

“이른 게 어디 있나요?”

물론 열네 살에 프란츠 리스트의 곡을 치는 것은 쉽지 않다. 몸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음악적 이해력도 부족하다.

하지만 지금 아나스타샤에게 필요한 것은 그 리스트의 곡들이라고 난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피아노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표현하기 위한 곡들을 썼던 리스트의 정수를, 반짝이는 노래를 가지고 있는 아나스타샤가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아마 지금보다 몇 단계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오늘은 제발 여기까지 하자. 힘들어.

아쉬워하는 아나스타샤를 간신히 설득해서 연습실을 나섰다. 연습실 자체는 밤늦도록 개방되어 있지만 난 일단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먼저 가, 그러면.”

“예. 아나스타샤는?”

“난 발렌티나 좀 찾아보려고. 아, 타티아나. 오늘 재밌었어.”

“저도요.”

그렇게 아나스타샤와 헤어진 나는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서 담배를 피우던 소로킨이 급히 불을 끄고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요.

“돌아가십니까, 아가씨.”

내 부담과는 상관없이 소로킨은 깍듯이 말했다.

“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빅토르를 철수시키겠습니다.”

“……?”

철수?

소로킨이 귀에 꽂은 핸즈프리 무전기로 연락을 하자 잠시 후, 빅토르와 자하르가 학교 뒤편에서 나타났다.

“저 두 분…… 학교에 있었던 거예요?”

“예. 중앙음악학교의 경비팀과 협조가 되어 있습니다.”

난 전혀 몰랐다.

“아가씨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로킨은 그렇게 말했지만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학교에 계속 있었다고? 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떨떠름하게 지켜보고 있는데 빅토르가 난데없이 말했다.

“아가씨 친구 생기신 것 축하드립니다.”

“!”

놀라서 어벙대고 있는데, 자하르가 옆에서 한 걸음 나서며 수첩을 하나 꺼내 들더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전 인정 못 합니다, 아가씨. 친구는 가려 사귀셔야 합니다.”

“……?”

“아가씨를 달리게 만든 그 꼬맹이가 오전 내내 뭘 했는지 아십니까? 9시 30분 연습실, 10시 30분 휴게실에서 취침, 11시에 교정 밖으로 나가 식사, 11시 30분 고양이 사료를 사서…….”

“당신 스토커예요?”

대체 뭘 잘했다고 떠드는 거야?

소리를 빽 지르자 자하르가 움찔했다.

난 자하르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데에 놀라고, 그가 아나스타샤를 스토킹했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들은 내 경호원이니 학교에 들어와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도 상관없다.

하지만 나랑 접촉하는 학생들을 감시할 것까진 없잖은가?

자하르는 금세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와서 말했다.

“아가씨의 신변에 문제가 될 사안들을 처리하는 것이 저희 일입니다만, 나쁜 친구를 만나지 않도록 하는 것 역시…….”

“아나스타샤가 왜 나쁜 친구예요? 그 애가 얼마나 천재인지 알아요?”

“…….”

뭐라고 항변하려던 자하르는 할 말을 잃었는지 침묵했다.

자하르도 할 말은 많겠지. 그는 경호원으로서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똑바로 이야기해 두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일이 빈번히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하르는 그렇게 한참을 나와 눈싸움을 하더니, 곧 졌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난 확답을 받기로 했다.

“앞으로도 다른 학생들을 쫓아다니거나 하는 일 없을 거라고 약속해 줘요.”

“그건…….”

“자하르.”

“알겠습니다, 아가씨.”

자하르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난 그제야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 *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난 문득 생각난 것을 빅토르에게 물었다.

“저기, 빅토르. 기억을 잃기 전의 저는 어땠어요?”

앞으로의 학교생활을 생각하면 과거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 둬야 했다.

내가 알고 있는 타티아나에 대한 것은 그냥 성격이 개차반이었다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격이 막장이었다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아 둬야 뭔가 반응을 해도 좀 그럴싸하게 반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 질문에 빅토르는 엄청나게 당황해했다.

“쿨럭, 쿨럭! ……왜, 왜, 왜 그러, 런 걸?”

“그냥 궁금해서요.”

내가 기억상실이라고 하지 않고 타티아나로 그냥 살기로 했다는 것을 말했다간 대번에 뭐 하러 그런 짓을 했냐고 타박이 날아올 것이 뻔했다.

상식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나’에 대해 알고 싶다는데.

빤히 바라보자 빅토르는 창밖을 봤다가, 어쨌건 날 외면할 수는 없어서 또 날 봤다가, 나와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백미러로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날렸다가, 소로킨에게 무시당하고, 다시 날 봤다가, 고개를 홱홱 젓더니 다시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아, 안 됩니다. 유리 님의 명령입니다.”

“제가 말도 못 하게 엉망으로 살았다는 건 잘 알아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녜요. 그럼 그 아닌 것 이야기해 봐요.”

“타, 타티아나 아가씨는 늘 뭇 학생들의 □□□ □□□ 분으로서 쉬꼴라에서도 늘 □□□□□으로 유리 님을 기쁘게 해 드렸고…… 또…….”

“정말 거짓말 못하시네요.”

“또…….”

이쯤 되면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거의 공황에 빠진 빅토르는 내버려 두고 이번엔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하르는 아는 것 없나요?”

“전 신입이라서 모릅니다.”

“운 좋으시네요.”

“감사합니다.”

당신이 거기서 감사하다고 하면 내가 뭐가 돼?

다음은 소로킨.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

한 마디도 안 했는데 단호하게 딱 잘라 버렸다. 난 조금 차가운 그의 행동에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안 돼요?”

“예.”

“제가 그걸 들어 봤자 그냥 남의 일처럼 느껴질 뿐인데도요?”

“예. 안 됩니다.”

소로킨은 백미러로 날 슬쩍 보았다.

“그냥 잊어버리십시오.”

너무 단호한 태도에 난 조금 침울해졌다.

처음엔 그저 내가 모르는 과거의 행적을 조금 찾아서 기계적으로 기억해 뒀다가 누군가에게 의심을 살 때 회피하는 용도로 써먹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상실이라고 밝히지 않은 것은 단지 내가 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그 누구에게도, 사과나 작별 인사를 안 하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지만…… 이렇게까지 부정당하는 건 너무 불쌍하지 않아?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책상 서랍을 열어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몇 번이고 확인했었기 때문에 비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열어 보았다.

빈 서랍을 다시 닫고, 고개를 들었다. 하얀 벽지의 이 황량한 방은 반년간 내 방이었지만 그 누구의 색도 스며들어 있지 않았다.

나는 타티아나가 무엇을 좋아했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거울을 보니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가 있었다.

* * *

루슬란 유리예비치 베르체노프는 동생이 틀어박혀 있는 별관까지 직접 가야만 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니 동생을 직접 데리고 오라는 아버지의 명을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 속내를 모를 동생이지만, 어쨌든 자신은 오빠였다. 식사 시간이 되면 자기가 알아서 와야지, 이게 무슨 건방진 짓이란 말인가?

그렇게 투덜거리며 타티아나의 연습실에 도착한 루슬란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오늘은 입맛이 없어요.”

“뭐……?”

언제나 약간 어두운 기색이지만 자신만 봤다 하면 눈이 희번덕거리며 달려들던 동생이 오늘따라 계속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도 힘없이 건반을 톡톡 건드리고 있는 모습이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루슬란은 속으면 안 된다고 되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묻고 말았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괴롭힘을 당……하진 않았을 거고.”

누굴 괴롭혔으면 괴롭혔지. 루슬란은 아직도 다른 누군가한테 당하고 다니는 타티아나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타티아나는 조금 놀랐는지 허리를 폈다.

“절 걱정해 주신 거예요?”

“우, 웃기는 소리 하네. 네가 누굴 때리진 않았는지 걱정이거든?”

“오빠는…….”

타티아나는 어렵게 어렵게 말을 만들어 내는 듯, 우물거리며 물었다.

“제가 싫으신 거죠?”

“응.”

열네 살밖에 안 된 친동생을 이렇게까지 차갑게 대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루슬란은 거침없었다.

타티아나는 이제 더 상처받을 일도 없다는 듯 아랑곳 않고 다시 물었다.

“아직도 제가 싫은 거죠?”

“그렇다니까.”

그냥 싫은 거랑 아직도 싫은 게 뭐가 다른 것인지 모르겠지만 루슬란은 다시 대답했다. 그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네가 지금은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예전에 했던 일들도 □□□ 없던 것으로 하고 아주 편하게 살고 있지만, 난 아버지의 그런 방침은 반대야.”

“아…… 오빠는 제가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안 되지.”

타티아나는 잠시간 숨을 잊고 루슬란을 올려다보았다. 멍하니 풀려 있던 눈동자에 서서히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루슬란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회피 본능이 자리를 뜨라는 신호를 보냈다.

“여하튼, 밥 안 먹을 거면 아버지한테 그렇게 말할 테니까 내 책임은 없는…….”

“잠깐만요, 한 가지만 더요.”

타티아나가 일어나서는 막 돌아서는 루슬란을 붙잡았다. 루슬란은 무심하게 다시 타티아나를 내려다보았다.

“뭔데.”

“모두 잊으라고만 하고…… 아버지는 제게 학교에서 기억상실임을 밝히라고 하셨어요.”

“그러셨겠지.”

“하지만 저 학교에 기억상실이라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어요.”

“뭐?”

루슬란은 조금 황당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는 타티아나의 편의만을 생각하는 유리의 방침이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그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학교 일에 대해서라면 말할 것도 없다.

겨우 6개월 치의 기억밖에 없는 타티아나가 또래들과 섞여서 지내려면 밝혀야 할 건 밝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의지는 굳다. 담담한 시선으로 올려다본다.

루슬란은 이유를 물었다.

“왜?”

“제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라도…… 모조리 없던 것처럼 되는 건…… 싫어서요.”

싫다고 확실하게 말하는 그 모습이 단지 과거를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 같진 않았다.

모종의 책임감과 의무감이 타티아나의 목소리에 서려 있었다.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루슬란은 가만히 타티아나를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그냥 아버지의 말을 따르는 편이 편할 텐데.”

“제가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걸까요?”

살짝 드러내는 불안감이 위태롭게 보인다. 루슬란은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알지도 못하는데 사과해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몰라.”

타티아나는 고민한다. 하지만 대답은 분명했다.

“할게요.”

루슬란은 동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