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나제즈다는 언제나처럼 날 대해 줬다.
“예뻐요, 아가씨.”
“고마워요.”
어깨선을 정리해 주는 나제즈다를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그냥 타티아나의 일에 대해선 신경을 꺼 버리는 수도 있었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이 난 나 자신을 변호할 방법이 두 가지나 있었다.
우선 내가 아니었고, 지금 난 기억상실에 걸린 것으로 되어 있다.
누군가 묻는다면 내 알 바 아니고,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면 될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막대한 부채감은 그렇게 간단하게 행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제즈다.”
“예, 아가씨.”
“제 옛날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있나요?”
나제즈다의 손길이 멈칫했다. 난 순간 내가 나제즈다에게도 돼먹지 못하게 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
“아가씨.”
조금 겁이 나서 침묵하자 그녀는 어딘가 슬픈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가씨, 그렇게 알지도 못하는 과거 때문에 모든 사람들 앞에서 위축되실 건가요?”
“모든 사람마다가 아니라…….”
“그러지 마세요. 아가씨가 그렇게 마음을 써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괜찮으니까요.”
나제즈다는 언제나처럼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난 작게 항변했다.
“그, 그렇지만 기억이 안 난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요.”
“안 해도 돼요. 지금 아가씨는 너무 겁을 먹고 계세요.”
그녀는 보다 확고하게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과거에 □□□□□□□. 제 생각에, 아무것도 모르시는 아가씨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과거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앞으로의 좋은 관계예요.”
“……?”
“지금 정말 잘하고 계세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좋아해 주시고 상냥해지신다면 그 누구라도 아가씨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나제즈다는 기억이 없는 나에게 많은 것을 원하지 않았다.
배려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안 될 일이지만, 부채감과 죄악감에 지지 않고 당당하게 지내는 것 또한 내가 지녀야 할 태도였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알았어요, 나제즈다…….”
알았다고 말하면서도 잘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
반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타티아나. 안녕.”
저편에 있던 아나스타샤가 내 쪽을 보곤 인사해 왔다. 나 역시 웃으며 화답했다.
그 옆에 발렌티나가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난 그녀가 나에게 그리 감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너 어제만 해도 꽤 친한 척하지 않았니?
“안녕하세요, 발렌티나.”
“…….”
이젠 아예 인사도 안 받아 주네.
이미 어제 어렴풋이 느끼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돌변해 버리니 약간 무서웠다.
옆자리에 대충 가방을 놓고 앉았더니 아나스타샤가 불쑥 나서며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타티아나, 어제 너 가고도 내가…….”
“대단하네, 너.”
“?”
발렌티나는 대뜸 그런 말을 했다. 아나스타샤가 하던 말을 뚝 멈추고 발렌티나를 돌아보았다.
조금 짜증스럽다는 눈길. 하지만 발렌티나는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의문을 표하자 발렌티나는 경멸이 어린 시선으로 날 쳐다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꼬셨어?”
조금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있는 사이 아나스타샤가 끼어들었다.
“발렌티나. 어제 내가 그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했잖아.”
“뭘 하지 마? 그리고 아나스타샤. 내가 평소에 말을 안 해서 그러는데, 넌 조금 순진한 구석이 있어. 내가 그래서 일부러…….”
발렌티나는 말을 맺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는 뻔했다.
“발렌티나. 어제 아나스타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 준 건가요?”
“네가 작년에 한 일.”
“정말 미안하지만, 그렇게 듣고는 기억나는 바가 없어요.”
정말 모르는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달리 좋게 물어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모르쇠로 되묻자, 발렌티나는 눈썹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기억이 안 나?”
“……미안해요. 모르겠어요.”
“정말 어이없다. 그게 너한테는 기억도 못 할 정도로 별것 아닌 일이었구나?”
조용히 쳐다보자 발렌티나가 이젠 거칠 것 없이 말했다.
“이전 학교에 있을 때, 같은 반 아이의 플루트 소리가 듣기 싫다며 던져서 망가뜨린 적 있었다며?”
……잠깐만.
“그리 오래전 일도 아냐. 그런데 모르겠다고?”
타티아나, 너 진짜 미쳤었던거야?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데?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머리가 새하얗게 굳어 버렸다.
발렌티나는 내 표정을 보더니 이어 말했다.
“어제 점심시간 내내 물어봤을 땐 일부러 모르는 척하나 했더니 정말 기억 못 하나 봐? 옛날 일들은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거야?”
“…….”
“난 악기를 그렇게 다루는 연주자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사과든 변명이든 하려고 준비했던 모든 문장들이 일시에 날아갔다.
무슨 일이 있었건 담담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마음의 준비를 마쳤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와 동시에 난 타티아나를 조금 무시하고 있었다.
잘못을 해 봐야 얼마나 했겠어? 비교적 가볍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내가 앞으로 잘 한다면 쇄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감당 가능한 범위를 조금 넘어서 있었다.
악기를 던져 버리다니, 연주자로서 절대 해선 안 될 일이었다. 발렌티나가 치를 떠는 것도 당연했다.
그때 아나스타샤가 담담히 말했다.
“난 그 말 안 믿어.”
“아나스타샤! 너 왜 자꾸 이래?”
발렌티나가 짜증을 냈지만 아나스타샤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부풀려진 헛소문일지도 모르잖아. 너도 직접 본 건 아니지? 발렌티나. 그저 소문으로 접했을 뿐이잖아.”
“진짜라고. 그 학교에 있는 내 친구한테 들은 이야기야. 전화 걸어 봐?”
“그 애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아나스타샤!”
발렌티나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는 타티아나가 피아노를 대하는 자세를 못 봐서 그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나스타샤, 네가 저 애를 얼마나 봤다고? 바로 어제 하루잖아? 하루!”
“2시간이면 충분하지.”
올곧은 눈빛이 날 바라봤다.
“타티아나는 연주자야. 그런 애가 다른 연주자의 악기를 함부로 할 리가 없잖아.”
난 그녀의 눈을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아니야, 했어. 난 잘 모르겠지만 아마 했을 거야.
이를 어쩌지.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사이, 일종의 확신을 지니고 있는 발렌티나는 내게 다른 사람의 소중한 악기를 내던질 정도로 위험한 면모가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변호하지도 못하는 내 대신 아나스타샤는 흔들리지 않고 날 변호하는 데에 힘썼다.
난 차마 그쪽을 쳐다볼 수 없었다.
내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타티아나라는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음악을 경건하게 마주하는 연주자라면 절대 그런 짓을 할 수 없다고 믿을 수 있도록 확신을 주었다.
물론 지금의 나는 연주자니까 스스로 목을 매는 한이 있어도 그런 짓은 못 한다.
그런 점에서 아나스타샤는 날 정확하게 본 것이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아니었겠지.
“…….”
한동안 아나스타샤와 설전을 펼치던 발렌티나가 다시 날 돌아보았다.
“왜 가만히 있어? 잘 생각이 안 나면 뻔뻔하게 한마디라도 해보지 그래. 베르체노프잖아? 뭐가 어쨌든 네가 악기를 막 다루는 위험한 애라는 건 변하지 않지만.”
“…….”
아무 대꾸도 못 했다. 억울했지만 억울하다고 말도 못 한다. 이제 와선 기억상실이라고 토로해 봐야 역효과만 날 것이 뻔했다.
아나스타샤만이 꿋꿋하게 맞섰다.
“발렌티나, 그만 좀 하지? 10초도 못 뛰는 애가 어떻게 위험하다는 거야?”
“뭘 그만해? 아나스타샤, 너도 에르네스트도 속고 있는 거라니까?”
발렌티나는 지금 결코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베르체노프라는 이름을 지닌 내가 무엇을 할지 몰라 무서워하고 있었다.
상상 이상으로 막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이 소중하기에 발렌티나는 이렇게 정면으로 나와 적대했다.
난 입을 열어야 할 때라는 것을 느꼈다.
어제 루슬란 오빠, 그리고 나제즈다와 했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과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그 또한 내가 안고 가기로 결정했다면 책임을 지고 사과를 할 필요는 있었다.
정말 사과를 해야 할 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서 지금 여기에 없지만, 그건 누군가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난 스스로 생각한대로 하기로 했다.
“미안해요.”
“?”
내 말에 발렌티나가 의아해했다. 조금 더 진지하게 말했다.
“일부러 모른 척한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불안하게 만들었다면 미안해요, 발렌티나.”
“갑자기 무슨 말이야?”
“이전 일도…… 제가 연락처를 모두 잃어버려서 그런데 혹시 가능하다면 제 이야기를 해 주신 친구 분을 거쳐서 연락이 가능할까요?”
“지금?”
“예, 가능하다면 지금.”
“직접?”
“예, 직접.”
악기를 망가뜨린 것에 대해 제대로 사과를 안 했다면 지금이라도 하고 싶었다.
내가 이 몸으로 계속 피아노를 치는 이상 그 정도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발렌티나는 미심쩍다는 듯 날 바라보더니 불쑥 내뱉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
아무래도 난 선입견 때문에 신용이 별로 없는 듯하다. 발렌티나는 내가 베르체노프 가문의 힘을 빌려오기라도 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일은 전혀 없겠지만, 설득할 방법이 없다.
잠시 그렇게 우리 세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특히 발렌티나는 친구들을 위해 내 앞에 나선만큼 날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내 가슴속에 있는 진짜 속마음을 읽어 내기라도 할 것 같은 눈치이다. 나도 할 수 있다면 다 드러내놓고 싶다.
그때였다.
“너희들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막 교실 안으로 들어온 에르네스트가 신기하다는 듯 말하며 다가왔다.
사정을 모르는 그는 우리 세 명이 친해졌다고 생각하는지 어른스럽게 웃고 있었다. 여유 있게 미소를 짓자 본래 돋보이던 외모가 더더욱 빛난다.
난 발렌티나가 에르네스트에게도 내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 아나스타샤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내 편을 들어 주고 있는 상태이니 에르네스트라도 끌어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발렌티나는 아무 말도 않고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아무렇지도 않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안녕. 에르네스트.”
“그래. 좋은 아침, 발렌티나. 아나스타샤도.”
“응. 안녕.”
아나스타샤도 아침 인사를 받았고, 다음으로 에르네스트의 시선은 내게 향했다.
“타티아나.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네.”
그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평소의 빠른 어투가 아닌, 느긋한 어투라 알아듣기에도 편했다.
빠르게 말하면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챈 듯하다. 난 짧게 대답했다.
“예. 덕분에요.”
“그런데 조금 신기하네. 발렌티나는 몰라도 아나스타샤랑 어떻게 하루 만에 친해진 거야?”
“글쎄요.”
난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그녀는 키도 크고 화려한 데다가 인상도 조금 날카롭게 생겼다.
그리고 실제로 자기 생각에 필요없다 싶으면 수업을 연달아 안 나와 버릴 정도로 마이페이스이기도 했다.
확실히 쉽게 가까워질 수 있는 모범생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피아노를 사이에 놓고 나와 2시간 동안 연습한 것으로 수년간 사귀어 온 친구와 대립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만큼 스스로 보고, 듣고, 느낀 것엔 확실한 줏대를 가지고 고집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먹먹한 감동과 기쁨, 한편으로는 끔찍한 죄책감을 느낀다.
난 내색하지 않고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어제 제가 했던 이야기 기억나시나요?”
에르네스트가 움찔했다. 왜 이래?
잠시 서성이던 그의 눈동자가 다시 내 쪽을 보았다.
“응. 기억해.”
정말?
“그 덕분이에요. 어제 아나스타샤와 함께 연주자로서 연구를 조금 했거든요.”
“연구?”
“예. 연구.”
내 말을 듣고 에르네스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참는 듯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네가 뭘 원하는지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뭘요? 하고 되묻기도 전에 에르네스트는 거의 본인의 지정석인 창가 쪽에 가서 앉았다.
발렌티나가 그 옆에 쫓아가선 이러저런 말을 건넸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진 않고, 잡담에 가까운 이야기들이었다.
난 발렌티나가 자기 주변의 친구들을 지키고 싶어 할 뿐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에르네스트, 발렌티나, 아나스타샤는 모두 0학년부터 중앙음악학교에서 다녔던 진짜배기 천재들이었다.
그 우정과 유대는 내 상상 이상일 것이다.
발렌티나가 왜 갑자기 내게 적의를 보였는지 분명한 이유를 알았으니 이젠 앞으로 잘 처신해야 할 일이다.
“하…….”
나제즈다가 말했듯 기억도 안 나는 과거 때문에 죄책감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진 알겠지만, 상황이 이리 되니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슴이 아프면서도 기억상실이라고 하지 않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게 말했다면 훨씬 더 복잡하게 일이 꼬였을지도 모르겠다. 타티아나라는 사람에게도 불성실하게 대하는 일이고.
일은 아직 해결된 것이 없고 발렌티나가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진심으로 앞으로 잘 지내고 싶다는 것을 어필할 생각이다.
단순히 모든 것을 끌어안고 내 마음이 편해지길 바라는 이기심의 발로일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언제나 이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어쩌면 사람이란 다들 그렇게 제멋대로 양심을 속이고 덮어 가며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