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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22화 (22/1,277)

##  22화

하루가 또 그렇게 흘러가고 다음 날, 반에 들어서니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먼저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왔니, 타티아나.”

아나스타샤가 내 인사를 받아 주었다. 발렌티나는 근래 그랬듯 냉랭한 태도로 날 힐끗 쳐다볼 뿐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조금 힐난하는 시선으로 발렌티나를 바라보았고 발렌티나는 반항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아나스타샤도 정말 대단한 애였다.

나와 발렌티나의 사이가 지금 어색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충분히 알고 있었다.

평범한 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보통 둘 중 한쪽으로, 그중에서도 오래 친하게 지낸 발렌티나 쪽으로 편을 잡는 것이 당연한 일일 텐데…… 그녀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 발렌티나와 아나스타샤는 많이 싸웠을 것이다. 나 때문에.

이런 아나스타샤의 태도는 나에게도 일종의 부담으로 작용하는지라 직접적으로 아나스타샤에게 몇 번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전혀 듣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묵묵하게 중간에 버티고 서서 우리 둘이 항복할 때까지 지켜보겠다는 듯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저 마이페이스적인 성격은 세상이 멸망해도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멀리 앉아 봐야 아나스타샤가 억지로 끌고 갈 게 뻔하니 그냥 포기하고 그 옆에 가서 앉았다. 가방을 놓고 정리하고 있자니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예?”

“오늘따라 기분 좋아 보여서.”

좋은 일? 잘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아나스타샤가 괜히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우중충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없애려는 것이다.

난 아나스타샤에게 호응해 주기로 했다.

“오늘 아침 연습이 조금 잘 되어서요.”

“아침 연습? 너 그런 것도 하니?”

“예.”

근 반년 사이 나는 매일같이 새벽이면 일어나 별관의 연습실에서 피아노 연습을 해 왔다.

여러모로 불리한 점이 많은 내가 어떻게든 이 학교에 있으려면 아침잠을 잘 여유 따윈 없는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아침 연습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다는 듯 놀란 눈으로 날 보더니 말했다.

“물론 중요한 연습이겠지만…… 너 □□□ □□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

“그런가. 난 너처럼 라흐마니노프를 힘있게 치는 애는 본 적이 없는데.”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난 살풋 웃었다.

“그냥 치는 거야 어떻게든 해낼 수 있죠.”

“?”

“제가 원하는 소리가 안 나고 있거든요.”

“아, 무슨 소린지 알겠어.”

아나스타샤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겠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덜컥거리는 딱딱한 건반을 통해 수많은 걸 끄집어내야 하는 우리들에겐 공유할 만한 것이 많았다.

“나도 요즘 리스트 연습하는데 잘 안 돼서 짜증났거든.”

“근래 어떤 곡을 하신다 하셨죠?”

“초절기교 에튀드 10번.”

“아, 그 곡…… 재밌죠.”

“너 설마 그것도 쳐 봤어?”

앗, 실수.

“그게…….”

“타티아나.”

아나스타샤와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발렌티나가 날 불렀다.

솔직히 아직도 조금 어색하지만 아나스타샤가 이렇게 열성적으로 구심점을 잡아 주니까 뭔가 심경에 변화라도 생겼나?

물론 난 그녀에게 앙금 같은 게 전혀 없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친하게 지내 줄 생각이 있다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예. 발렌티나.”

“이야기 전부 다시 들었어.”

난 흠칫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이야기? 무슨 이야기?

빠르게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제 발렌티나는 다른 학교의 친구에게서 내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 그 이야기를 상세히 들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발렌티나가 툭 쏘듯 말했다.

“너 내가 바보 같지?”

“예?”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또 잡아떼지 마. 어제 내가 말한 거 있잖아.”

진짜 영문을 모르겠어서 물어본 것인데 발렌티나는 시치미 떼지 말라는 듯 더욱 얼굴을 들이밀었다.

난 살짝 허리를 뒤로 뺐다. 이렇게 가까우면 조금 부담스럽다.

발렌티나가 혼란스러움과 짜증이 서린 얼굴로 말했다.

“그거 먼저 그 애가 입에 담을 수도 없을 정도로 심한 말로 시비를 걸었었다며. 네가 일방적으로 한 게 아니라.”

“……?”

“대체 왜 그런 건 말을 안 해?”

난 당혹감을 금치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베르체노프라는 대재벌의 여식. 성격은 나쁘기로 소문이 자자하고, 악기를 빼앗아서 던진 일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발렌티나가 내 이미지를 어떻게 잡았을지 손에 잡힐 듯 훤했다.

나 역시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발렌티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내가 떠올린 것은 타티아나가 베르체노프가의 권력을 학교에서 휘두르면서 평범한 학생들을 괴롭히는 광경이었다.

잘 알 수는 없지만 악기를 던졌다는 말 한마디로 내 안에서 과거 타티아나의 성격은 개차반 이하로 추락해 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과거를 지워 버리려는 집안사람들의 행동 때문에 난 믿음이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발렌티나에게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입에 담을 수도 없을 정도로 심한 말? 지금의 나로썬 알 수 없어도 타티아나가 이성을 잃을 정도로 심한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발렌티나는 말이 없는 날 뚱하니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정말 짜증나.”

“저기, 발렌티나.”

“난 네가 분명히……. 아, 진짜.”

발렌티나는 뭔가 실수를 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길래 저러는지 궁금해졌지만 물어볼 엄두가 안 났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발렌티나가 돌연 눈을 치뜨며 날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장에선 내가 답답하게 굴었던 것이 정말 분통 터지는 모양이었다.

“이해가 안 가. 그건 연주자 이전의 이야기야. 나라면 플루트를 망가뜨리는게 아니라 그 애를 가만 두지 않았을 걸. 그런데 어제 그 자리에서 사과라도 할 것처럼 전화를 걸라는 건 뭐였던 거야?”

그건 분명한 진심이었고, 나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대로 뒀다간 발렌티나가 울기라도 할 태세였다. 난 급히 말했다.

“아니에요, 발렌티나. 오해예요.”

“뭐가 오해인데. 네가…… 굳이 지나간 이야기를 여기서 할 이유가 없다는 건 이제 알겠지만, 그렇다면 왜 미안하다는 말만 했던 건데?”

“…….”

“일방적으로 그런 소리 들으면 억울하지도 않니?”

살짝 울컥했다. 나대로 억울한 게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이 손으로 다른 사람의 악기를 망가뜨린 일이 있다는 것을 듣고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알아? 책임감과 죄책감, 의무감이 지금도 내 어깨를 짓눌러오고 있어.

사서 고생하는 것 같긴 하지만 솔직히 나라고 다 무시하고 편하게 살 줄 몰라서 이러겠어? 얼마든지 나 몰라라 할 수 있는데 나라고 어디 안 힘든 줄…….

물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창피해서 입 밖으론 못 내는 말들이었다.

여기서 열네 살짜리와 언성 높여 가며 신세 한탄 하고, 니가 맞니 내가 맞니 싸워 봐야 뭐가 되겠어?

할 수 있는 한 상냥한 목소리가 나와 주길 바라며 발렌티나를 달랬다.

“발렌티나. 지금 우리 사이엔 오해가 조금 많아요.”

“오해는 무슨 오해야.”

“지금 당장 설명하긴 어렵지만……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믿어 주세요.”

보다 더 진심을 담아 말하자 그제야 발렌티나가 조금 침착함을 되찾았다.

보다 차분해진 눈빛엔 이전 같은 날카로움이 사라져 있었다.

사실 그녀로서도 첫날부터 날 보자마자 지레 겁부터 먹고 친구들을 떼어 놓으려 했던 것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이 있는 듯했다.

한동안 나와 발렌티나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결국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매듭짓기로 암묵적인 의사 교환을 마쳤다. 발렌티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여전히 우리 사이엔 여러 오해가 얽혀 있었지만, 난 그녀의 짤막한 사과를 받는 것으로 한결 분위기가 좋아짐을 느꼈다.

발렌티나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와 나 사이엔 어색함이 남아 있긴 했다. 지금이라도 기억상실이라는 걸 밝히면 어떨까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곧 지워 버렸다.

될 수 있는 한 과거의 타티아나와 완전히 선을 긋지 않고 살겠다고 결심했으니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 이상에야 내가 먼저 깰 수는 없었다. 그 정도로 내 각오가 얕진 않다.

슬쩍 옆을 보니 아나스타샤는 지금은 끼어들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자기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확실히 지금 네가 끼어들면 악화될 일밖에 없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확실하게 딴청을 피우는 건 좀 아니지 않니?

***

피아니스트들은 종종 대곡의 완성이 내 집 마련만큼이나 어렵다는 농담을 한다.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이 시대에도 통용되는 이 농담은 한 곡을 완성시켰다고 당당하게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 준다.

연주자들은 한 곡을 마주할 때 세 단계 정도 과정을 거친다.

첫째로, 틀리지 않고 템포와 음표를 정확하게 맞춰 완주하는 단계.

두 번째로, 셈여림과 지시에 맞춰 음악성을 완성하는 단계.

보통 여기서 곡을 완성했다고 말하곤 하지만 조금 더 높은 수준을 넘보려면 세 번째 단계를 생각해야만 한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만의 소리를 낼 수 있는 단계.

물론 연주자의 개성 따윈 완전히 걷어 내고 작곡가가 의도한 음악만 선보이는 것이 연주자의 본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시간 예술인 음악의 특성상 연주자의 해석과 개성이 없었다면, 이 긴 시간이 흐르기까지 클래식이 그 위상을 지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살면서 과연 몇 곡이나 자신 있게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많이 바라지도 않아.

한 곡만 완벽하게 내 음악을 연주해 낼 수 있더라도 대단한 것 아닐까.

“……어라.”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곧장 연습실에 틀어박혀서 피아노 연습을 하던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쇼팽 소나타 1번에서 그토록 마음에 안 들던 패시지가 오늘따라 꽤 괜찮게 들렸기 때문이다.

착각인가.

다시 쳐 봤다.

겨우 5초? 6초가량의 짧은 흥얼거림이었다.

완벽하게 쳐 냈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음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려서 지리멸렬하게 들리던 부분이었다.

그 부분이 오늘은 물에 적셔서 쌓아 올린 것처럼, 확실한 부피를 가지고 있었다.

“이게 되네…….”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다시 쳐 봤다. 내가 원하는 소리가 손에 잡힐 것처럼 장난을 치고 있었다.

집중해서 몇 번 더 쳐 봤다. 내가 의도하는 대로 쌓이고 쌓이다가, 와르르 쏟아졌다.

건반에서 손을 내렸다.

내 곡의 완성도는 항상 두 번째 정도에서 그치고 있었다.

테크닉에서 비롯된 실수 없는 완주와 경험에서 비롯된 음악성의 완성.

막말로, 이 정도 완성도면 피아니스트로서 연주회를 열고 티켓을 팔아도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하지만 난 늘 목마름을 느끼고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내 음악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조금 모습을 드러냈다.

“…….”

조금, 갈증이 해소된다.

오늘 아침 연습을 할 때만 하더라도 그저 그랬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느껴지는진 잘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테크닉적인 벽이 하나 허물어졌을 수도 있고, 그냥 많이 듣다 보니 귀가 익숙해져서 이만하면 됐다고 자기합리화를 시전 중인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무언가 심리적인 문제가 조금이나마 해결되어서 집중할 수 있게 되었든지.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소리가 드디어 모습을 보였다는 것뿐이다.

일단 가능성을 봤다는 데에 의의가 있었다. 여유가 조금 생겼다.

지금까지 연습이든 연주든 항상 작곡가들에게 사과나 하고 적당히 자기합리화나 해 왔지, 한 번도 마음에 든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희망이 조금 생기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이 소리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조금 더 힘을 내 봐도 괜찮지 않을까.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나는 연습에 임했다.

감 잡았을 때 끝장을 봐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보다 집중해서 손가락에 힘을 주어 다시 연주를 반복했다. 다시 내가 그토록 원했던 소리가 피아노에서 솟아나다가, 스르륵 사라졌다.

어쩐지 무리해서 쫓아갔다간 바로 도망쳐 버리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를 악물고 이리 오라고 고함을 지르면 지를수록 멀리멀리 가 버릴 것이다.

난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다시 건반을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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