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6화 (26/1,277)

##  26화

연신 울고 있는 소녀를 보며 한승우는 난처해했다. 살면서 이렇다 할 다툼도 없이 무난하게 살아온 그는 생전 처음으로 사람을 울렸다.

그 처음이 하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소녀라는 게 그를 더더욱 난감하게 만들었다.

“하아…….”

조금 편한 사이였다면 토닥여 주기라도 하고 말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달래 줄 수 있었을 텐데, 어떻게 손도 대지 못하고 쩔쩔매는 사이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바르르 떨리는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다가 떨어졌다.

한승우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말 자신이 말 한마디로 이 소녀를 울렸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여긴 5층이니 당장 뛰어내리면 용서해 줄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자니 타티아나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뭐라고요?”

아직 러시아어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간단한 감사 인사도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두 번 말하기 싫다는 듯 손등으로 눈가를 닦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방금 고맙다고 한 게 무슨 소리냐고 똑바로 물을 수도 없도록 통역 역할을 하던 태블릿 컴퓨터를 뺏어 든 타티아나는 그대로 악보까지 챙겨 모두 가방에 집어넣고는 허리를 쭉 폈다.

“가자.”

“어디를요.”

“선생님이 찾으신다며.”

선생님이라는 단어밖에 못 알아들었지만 한승우는 아, 하고 소리를 냈다.

타티아나를 울렸다는 게 너무 충격적으로 와닿아서 애초 목적까지 까먹고 있었다.

먼저 나가는 타티아나를 따라 나가던 한승우는 가서 불 끄고 오라는 소리를 못 알아들었다가 결국 또 그녀가 직접 돌아가서 불을 끄게 만들고 말았다.

교무실로 향하는 내내 대화는 없었다.

애초에 사적인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말도 안 통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 둘의 사이는 거의 일방적으로 타티아나가 한승우에게 관심과 호의를 표하는 것으로 어렵사리 이어지고 있었다.

한승우는 항상 타티아나가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고, 크게 비웃고, 때론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지만 그게 모두 다 자신을 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대체 왜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처음엔 몰랐으나 나중에 찾아보니 러시아에선 거의 손에 꼽는, 한국이라면 삼성이라 할 수 있는 대재벌의 딸이었다.

말도 안 통하는 유학생에게 관심을 두고 대할 이유가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 미스테리한 소녀는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듯했다.

한승우는 잠시 타티아나의 옆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한 마디도 없이 둘은 복도를 걸었다.

딱히 어색하진 않았다. 어쩐지 편안한 기분이었다.

* * *

“부르셨어요, 류드밀라 선생님.”

“왔어요? 타티아나.”

“예. 전화 못 받아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앉아요.”

교무실 문을 열고 타티아나와 한승우가 들어서자, 피아노 지도와 음악사 수업을 맡고 있는 류드밀라 지모쉬예브나 니콜라예바가 웃으며 둘을 반겼다.

류드밀라는 아직도 그들이 실기시험장에서 보여 주었던 기막힌 드라마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 둘을 앞자리에 앉도록 했다.

그 옆엔 이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

의자에 앉아 있던 남학생은 타티아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하게 올려다보기만 했다.

깔끔하게 손질한 애쉬브라운의 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지닌 학생이었다.

아직 앳된 얼굴에 교복을 입고 있으니 학생임은 분명했는데 세상만사 귀찮다는 듯한 권태로운 눈빛이 그 외모를 몇 살은 더 많아 보이게 만들었다.

바로 앉기 전에, 타티아나는 여유롭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고 해요.”

“그래요.”

“…….”

거의 무안을 주는 듯한 대답이었다.

타티아나는 놀라거나 당황해하는 대신 인상을 팍 썼다.

남학생은 조금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말없이 올려다보던 남학생이 툭 한 마디 던졌다.

“울었어요?”

“……!”

그러더니 한승우 쪽을 보고 물었다.

“그쪽이 울렸어요?”

“……?”

“재미있네요.”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지자 류드밀라가 타티아나를 살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모르겠지만 분명 눈이 약간 충혈되어 있었다.

류드밀라는 무슨 일인지 나중에 타티아나를 따로 불러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단 끼어들었다.

“인사는 받아 주어야죠, 하워드 군. 같은 반 친구인데.”

“아, 그래야죠. 제 이름은 리처드 피츠앨런 하워드. 그쪽 둘은 뉴페이스인 걸 보니까 편입생인가 본데 여기 장난 아니니까 조심해요.”

“……?”

“하워드 군!”

류드밀라는 다시 야단을 쳤고 리처드는 자기가 못 할 말 한건 아니지 않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타티아나는 또 막 나가는 학생 하나 있구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해 버렸다. 한승우는 인사를 할 타이밍을 놓치곤 그냥 자리에 앉았다.

이제 와서 살갑게 소개할 수 있을 정도로 한승우는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세 명이 자리에 앉자 류드밀라가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자, 어쨌든 간에 모두 왔군요. 하워드 군 그리고 이제 막 편입 와서 적응 중인 타티아나, 한승우 군까지.”

“예.”

“제가 이 세 명을 모은 이유를 알겠나요?”

한승우는 못 알아들어서 침묵했고 타티아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으나 이유를 알 턱이 없었다.

타티아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이 세 명은 함께 보충수업을 받아야 되겠어요.”

“?”

리처드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별 반응이 없었고, 타티아나는 그야말로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보, 보충수업이요?”

“예. 하루에 1시간씩.”

“죄송합니다만 선생님. 전 제가 보충수업을 받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는데요.”

타티아나가 또박또박 이의를 제기하자 류드밀라가 훗 웃으며 세 명을 돌아보았다.

얌전히 따라 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우선 가장 왼쪽에 있는 리처드에게 말했다.

“우선 하워드 군. 비자 문제로 이번 학기 등교가 늦어져서 수업 진도가 조금 늦어졌을 겁니다. 개별적으로 노력을 해서 따라잡을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보충수업 반을 꾸렸으니 며칠간은 함께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선생님 말씀대로 하죠, 뭐.”

리처드는 굽든 삶든 마음대로 하라는 투였다.

류드밀라는 그다음 가장 오른쪽의 한승우를 보았다. 사실 가장 문제아이기도 했다.

“한승우 군은…… 러시아어가 너무 뒤떨어져요. 노력 중이라는 건 잘 알지만, 과제를 하나도 하지 못한다면 9학년에 올라갈 수가 없어요. 아시겠어요?”

“…….”

“정말 큰일이네요…….”

“제가 나중에 설명해 줄게요, 선생님.”

타티아나가 자진해서 말했고 류드밀라는 조금 안도했다.

피아노과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한 예브게니아 선생이 강력하게 추천해서 예비학기도 없이 입학시키긴 특이 케이스이지만 한승우의 경우는 조금 심각했다.

저렇게 러시아어가 서툴러서야 앞으로 필기시험을 제대로 치를 수가 없었다.

어쨌든 걱정거리지만 옆에서 타티아나가 꽤나 이것저것 도와주는 것 같았다. 그나마 조금 다행이었다.

“너 공부 좀 하래.”

“?”

솔직히 류드밀라는 아직도 저 둘의 관계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학생들 사이의 일이었다.

그리고 한승우의 실력은 충분히 대우를 받을 만했다. 그 외의 잣대를 들이댈 이유는 없었다.

가문이건 인종이건 그런 건 모두 이 학교에선 의미 없는 외적 가치에 불과하다. 적어도 류드밀라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 타티아나를 봐줄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타티아나.”

“예.”

“이전에 낸 음악사 숙제, 봤습니다.”

타티아나는 제출한 숙제를 떠올렸다.

그레고리오 성가로 시작하는 중세 유럽의 폴리포니 예술에 대해 설명하고 이것이 이후 바로크 음악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 설명한 뒤, 개인적인 사견을 덧붙이라는, 기초적이고도 까다로운 숙제였다.

류드밀라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타티아나가 제출한 숙제는 대부분 인터넷에서 조사한 것으로 보이더군요. 문장이나 단어나 표현들의 수준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

“그게 문제라는 건 아니에요. 인터넷을 사용한 것은 괜찮아요. 어떤 사료를 보든 학생 스스로 배우고 익힐 수 있다면 상관없어요. 하지만 그저 타인이 낸 의견을 가져와서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하고 내놓는다면 숙제를 하는 의미가 없겠죠?”

“……선생님, 전 인터넷을 쓰지 않았어요. 어느 정도 레토릭에 익숙해지지 않고선 쓸 수 없는 문장들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그만큼 많은 레포트를…….”

말을 하다 말고 타티아나가 얼버무렸다. 더 이상은 말할 수 없다는 듯 꾹 입을 닫았다.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는 걸 아시겠죠.”

류드밀라가 선을 그었다.

“타티아나.”

“…….”

“음악사 보충수업을 받는 데에 동의하시겠죠?”

“예…….”

뭐라 변명해 봐야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타티아나는 대답한 다음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침묵했다.

조금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인정하는 듯했다.

류드밀라는 세 명을 다시 돌아보며 말했다.

“보충수업은 모든 교과수업이 끝난 후 1시간 동안 진행될 겁니다. 러시아어와 수학, 음악사 위주로 빠르게 복습하는 것으로 하죠. 아마 며칠만 함께하면 될 겁니다.”

“예.”

“별일 없다면 오늘부터 하도록 하겠어요. 오늘 레슨 있는 학생은 없는 것 같으니 각자 연습하시고, 연습 끝나면 다시 반으로 모이도록 하세요.”

“예…….”

타티아나는 힘없이 흐느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류드밀라에게 꾸벅 인사해 보이곤 나갔다. 한승우도 어물거리다가 인사를 하고는 그 뒤를 따랐다.

“하워드 군?”

“네?”

“할 말이라도 있나요?”

삐딱하게 의자에 앉아 있던 리처드는 뭔가 말하려는 듯하다가 그만두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 * *

연습실에서도 어영부영 있다가 다시 반으로 가니 한승우와 리처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난 창피하고 억울해서 제대로 보지도 않고 대충 자리에 가서 앉았다.

정말 열심히 했었다. 단어를 몇 가지 모르겠어서 사전을 찾아본 것 외엔 교과서랑 음악사 책 한 권만 보고 열심히 했을 뿐이었다.

문제는 내가 예고와 음대에서 이런 과제를 한두 번 해 본 게 아니란 점이었다.

과유불급이라고…… 열네 살짜리가 쓸 법한 문장이 아니라는 건 생각지도 못하고 너무 신을 내 버렸다. 선생님이 의심하시는 것도 당연했다.

보충수업이라니. 이게 뭐야 대체.

“으…….”

다행스럽게도 한승우도 리처드도 나한테 따로 말을 걸지 않았다.

아주 그냥 말만 걸면 그 순간 끝장을 보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힐끗 보니 리처드는 아예 대놓고 창밖을 보며 멍 때리고 있었고 한승우는 단어장을 펴 들고 공부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

“타티아나.”

낯익은 목소리를 좇자 에르네스트가 희한하다는 듯 이쪽을 보고 있었다.

“뭐 해?”

“큭…….”

오해에서 빚어진 일이지만 보충수업이라고 말하기 너무 창피했다.

내가 대답을 못 하고 있자 옆에 있던 리처드가 대신 말했다.

“보충수업.”

“뭐?”

“숙제를 배꼈나 봐.”

“안 배꼈어요!”

바락 소리를 지르자 리처드가 뚱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뭐 어때요. 나도 자주 그래요.”

그렇게 말해 봐야 하나도 안 고맙거든?

감추고 싶었던 치부가 드러나 버려서 새빨갛게 된 얼굴로 앞만 쳐다보고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내 앞자리에 털썩 앉더니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정 하기 어려웠으면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도와줬을텐데.”

“필요 없어요. 수업 끝났는데 안 가요? 에르네스트?”

“오, 화내는 거야? 처음 봐.”

“더 파격적인 모습 보여 드려요? 후회하실 텐데?”

“보여 줘, 보여 줘.”

반쯤 진심이 담긴 협박이었는데 에르네스트는 눈이 초롱초롱해져선 발까지 동동 굴렀다.

막 열리려던 뚜껑이 푸쉬쉬 닫혀 버렸다. 애가 애처럼 구는데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다.

하루하루 한숨만 는다.

싱글벙글 웃으며 에르네스트가 말을 걸려는 찰나였다.

“학년 수석. 보충받는 사람들 그만 괴롭히고 가지 그래?”

“뭐?”

에르네스트가 눈을 부라렸지만 리처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귀찮다는 듯 말했다.

“방해되니까 가라고.”

여전히 온 세상 달관한 듯한 눈빛이지만 그 목소리엔 어딘가 위엄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었으면 애당초 나한테 이렇게 말을 걸지도 않았을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한껏 더 목소리를 높여 대꾸했다.

“싫은데? 내가 가든 말든 니가 무슨 상관인데?”

“학년 수석이면 수석답게 굴 줄 알아야지 □□□□ 방해나 하고 말이야…… 야, 너 이렇게 밑바닥까지 견제하면 안 피곤하냐?”

“밑바닥? 어이가 없네, 진짜.”

에르네스트가 벌떡 일어나서 리처드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갔다.

“너 저기 있는 애가 누군진 알고 밑바닥이니 뭐니 한데 묶냐? 영국 놈이라서 □□□□□ 안 되지?”

“알 게 뭐야. 보충수업 같이 받는 처지라는 것 외에 알아야 할 게 있냐?”

“당연하지. 타티아나는…….”

“그만하세요.”

도저히 참고 못 들어 주겠어서 제지했다.

난 한 번도 학교에서 내가 누구네 하고 잘난 척하고 다닌 적이 없었다.

힐난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에르네스트는 조금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하지만 리처드와 으르렁거리며 눈싸움을 하는 건 그치지 않았다.

“리처드. 까불지 마라 진짜. 너 저번에 나한테 깨지고 엉엉 울면서 영국으로 튀었던 거 기억 안 나냐?”

“아 그때, 네 꼴이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날 수밖에 없더라고.”

“……□□□□, □□□ 뜨거운 물 없으면 얼어 죽을 □.”

“너 저번에 그거 마시지 않았냐?”

“닥쳐, □□□□.”

사자와 호랑이가 티격태격하는 듯한 광경을 보다가, 난 한승우 쪽을 돌아보고 중얼거렸다.

“넌 저러지 말아 줘…….”

“?”

“걱정 안 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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