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리처드, 한승우와 받는 보충수업은 별다른 문제없이 지나갔다.
어차피 학기가 시작한 지 이제 2주째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수업이라고 해 봐야 별로 한 게 없었다.
그리고 난 원래 수업을 열심히 들었고 리처드는 원래 머리가 좋은 편인 것 같았다.
우린 딱 사흘 만에 더 이상 보충을 할 필요 없을 것 같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짧은 보충수업이 깔끔하게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승우와 따로 나흘째 보충수업에 돌입했다.
“받아 써 봐. 시험, 칫솔, 버스.”
“시험…… 칫솔…… 버스…….”
난 한승우에게 받아쓰기 시험을 내 주고 있었다.
이미 러시아어 과외 선생이 붙었다고 들었지만, 혼자서 단어장 보고 덮었다 펼쳤다 하면서 외우는 걸 보면 조금이나마 도와주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특히 난 한국인이 러시아어를 배울 때 느끼는 어려운 부분이나 필요한 노하우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 더 잘 가르쳐 줄 자신이 있었다. 한 마디라도 더 해 주고 싶은 것이다.
정작 나도 러시아어를 배운 지 반년이 조금 지난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게 우습지만, 그래도 내가 이 반년 동안 공부에 투자한 시간과 집중력의 밀도는 어지간한 고시생 수준 그 이상이었다. 그만큼 난 필사적이었다.
“그런 □□□ 공부시켜서 □□ 하겠다. 너무 □□□□□□□.”
하지만 아직도 에르네스트가 빠르게 중얼거릴 때면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때가 많았다. 아직 나도 멀었다.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그런데…… 에르네스트.”
“응.”
“왜 안 가고 있나요?”
“감시 중.”
짐작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슬며시 돌아보자 소설로 보이는 책을 꺼내서 읽고 있는 리처드가 보였다.
난 그가 대체 왜 나흘째에도 나왔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대놓고 물어봤더니 연습도 귀찮고 기숙사에 들어가는 것도 싫어서 책이나 읽으려고 나왔다는데…… 아무리 봐도 핑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 이유가 날 귀찮게 하기 위해서라면 리처드는 아주 성공적으로 목적 달성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기껏 정해진 보충수업이 끝나고 리처드가 빠지면 에르네스트가 올 일도 없이 조금 조용히 한승우의 실전 압축 러시아어 강의에 집중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리처드가 계속 나와 버리니 에르네스트 역시 당연하다는 듯 끼어들기 시작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 인간들?
난 애써 그 둘을 무시하며 한승우에게 계속 받아쓰기 문제를 내 줬다.
한승우 역시 신경줄이 상당히 굵어서 별로 주변에 신경을 안 쓰는 듯했지만 불편해하는 기색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승우가 받아 쓴 것들을 보면서 어떤 발음을 못 알아듣고 있는지 체크해서 확인시켜 줬다.
“자, 따라 해 봐. 칫솔.”
“칫솔?”
“그래. 조금 더 사잇소리를 내.”
쥬브냐 슈트카. 몇 번 반복해서 들려주는데 한승우는 머뭇거리면서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왜 이래, 지금 너 가르쳐 주자고 내가…….
“타티아나. 잠깐 나와 봐.”
“……?”
“그 유학생한테 발음이라면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계속 거슬리게 앉아 있긴 했지만 그래도 무턱대고 끼어들진 않고 얌전히 있던 에르네스트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러곤 한승우와 마주하고 빠른 속도로 뭐라 떠들기 시작했는데…… 한승우가 알아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
바짝 열을 올리는 에르네스트를 보고 있자니 어느 정도는 내가 자초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나와 한승우를 어떻게 보고 있는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만약 불똥이 튄다면 그건 모조리 다 한승우를 향할 것이라는 것도.
그런 사이가 아니라 설명해 본들 이해해 줄 리 만무했다. 그래서 혹여나 복잡한 일이 생길까 봐 지금까지도 조금 자중하고 있었는데…….
짜증이 불쑥 치밀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 것까진 없지 않은가?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내가 한승우랑 같이 막말로…… 무슨 데이트를 한 것도 아니고.
공개된 교실에서 기껏해야 받아쓰기 하고 앉아 있는데 그것조차 꼴 보기 싫다면 대체 뭐 어쩌란 소리야? 이것도 저것도 다 떠나서 같은 반 친구이지 않은가?
대체 내가 뭐가 아쉬워서 열네 살짜리 눈치나 살살 보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있어야 하는 거야?
속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누군가 에르네스트의 어깨를 훅 당겼다.
“야, 너야말로 나와.”
“뭐?”
“하나도 못 알아듣는 거 안 보여?”
잠자코 있던 리처드마저 나섰다.
리처드가 이상한 짓이라도 하는 게 아닌가 긴장하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리처드와 한승우는 조금 친해져 있었던 것 같다.
리처드가 그 특유의 억양을 지닌 영국 영어로 몇 마디 물었고 한승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영어로 이야기하는 저 둘은 이미 여러 번 이렇게 대화를 나누어 본 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에르네스트가 당혹스러워하는 사이 리처드가 말했다.
“네가 뭐라는지 전혀 모르겠다는데.”
“그야…….”
“나와.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겠어.”
그리고 리처드는 한승우 옆에 척 앉더니 받아쓰기를 한 종이를 들고 읽기 시작했다.
난 영국인이 한국인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쳐 주는 광경을 보며 조금 감격스러워하고 있었다. 바로 여기가 지구촌인가…….
전 세계에서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에 다니다 보니 재미있는 광경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보아하니 리처드는 매사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래도 한승우에게 조곤조곤 설명해 주는걸 보니 배려심은 꽤 있는 것 같았다.
“타티아나.”
생각지도 않게 배턴을 넘기고 한숨 돌리고 있자니 에르네스트가 날 불렀다.
난 솔직히 지금 그에게 별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급하고 충동적인 데다가 집착까지 조금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못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에르네스트. 그렇게 완벽에 가까우면서 뭘 그리 안절부절못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에르네스트는 내 옆에 가까이 앉더니 작게 말했다.
“타티아나. 조금 □□□ 말할 게 있는데. 들어 줄 수 있어?”
“그렇게 속삭일 거면 차라리 나가요.”
속삭이듯이 작고 빠르게 말하면 못 알아들을 것 같거든.
그렇게 나와 에르네스트는 복도로 나왔다.
모스크바의 9월은 쌀쌀하지만 상쾌했다. 열린 창을 통해 들어온 시원한 바람이 복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교실에서 피로해져 있던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
“뭔가요? 에르네스트.”
스스로 내뱉고도 조금 놀랐다. 에르네스트에게도 신경질적으로 들렸음이 분명했다.
뾰족한 내 어투에, 에르네스트는 답지 않게 조금 주저했다. 늘 넘치던 자신감이 오늘은 어디 갔는지 온데간데없었다.
난 무언가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사람을 앞에 두고 모질게 굴진 못했다.
“천천히 말해 보세요. 들어 드릴게요.”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마음을 다잡은 듯 고개를 들었다.
다시 바람이 분다. 그와 나 사이에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 만들어진 것처럼, 바람이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그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이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결심했어.”
꿋꿋한 목소리,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날 향한다.
잠깐, 잠깐, 잠깐.
뭐야, 이 분위기 뭔데. 허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예술작품이나 다름없게 생긴 그가 순수한 감정을 부딪쳐 오자 소름이 돋으며 등줄기에 긴장이 내달렸다.
분위기에 동승한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아니야, 기다려 봐. 에르네스트, 정말 미안하지만 난 아직 피아노에 집중하고 싶어요……. 지금은…….
“전 아직…….”
“나랑 같이 연구회를 만들자.”
“……예?”
멀거니 되묻자 그가 한 발자국 더 다가오더니 말했다.
“연구회를 만드는 거야. 너와 내가 주축이 되어서,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도 함께.”
“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 소리 하는데 무슨 분위기를 이렇게 잡아?
이렇다 할 대답도 못 하고 바로 창가로 가서 바람에 얼굴을 식혔다. 망할, 수치스럽다.
중앙음악학교에도 방과 후 연구회나 동아리가 존재하긴 했다.
물론 거의 모두가 음악에 관련된 것들이었고 당연히 축구나 야구처럼 부상을 입을 가능성이 있는 것들은 모두 제외되었다.
그 무엇보다 몸이 재산인 음악가들을 키워 내는 학교이니 어쩔 수 없는 방침이리라.
어쨌든, 재학생이라면 연구회나 동아리를 만드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뭔진 몰라도 연구회를 만들고 싶다면 함께 오래 학교를 다닌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에게 제의를 하는 게 맞지 않은가? 이제 편입해 온 나한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미리 만들어 놓고 들어오라고 권유하는 것이라면 또 모를까.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나는 다시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에르네스트가 주도하면 되잖아요.”
“그래, 내가 주도할 거야. 그런데 너도 필요해.”
“제가요?”
“너밖에 없어. 우리가 한데 뭉치기 위해선.”
무슨 소리인진 잘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가 말하는 연구회는 일반적인 것과 조금 다른 뉘앙스로 들렸다.
조금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어떤 연구회를 만드실 건데요?”
“러시아 피아니즘 연구회.”
“…….”
에르네스트의 말에 난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바로 벽 하나 너머 교실에서 영국인과 한국인이 머리를 맞대고 러시아어 공부를 하는 시대이지 않은가. 굳이 러시아 피아니즘이라는 것을 연구회로 만들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혹시나 민족주의적 색채가 스며 있다면 약간 야단을 치려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려던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조금 안도했다.
걱정했던 바와 달리 에르네스트는 그리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순수한 열망이 어린 눈동자가 반짝인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타티아나. 난 네가 이 학교에 온 것에 어떠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같이 연구회를 만들면 많은 도움이 될 거야.”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세계 각지에서 날아드는 천재들, 그 틈에서 러시아인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수석을 유지하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하는 하루하루.
그 와중 편입해 온 난 그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까. 그리고 지금 다른 유학생들과 친하게 지내는 난 그의 눈에 어떻게 보이고 있을까.
요 며칠간 크게 내색은 않고 있었지만 에르네스트는 나름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
난 곰곰이 생각했다.
러시아의 클래식 음악은 독일과 함께 세계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연구회를 만들어서 함께 공부하는 것도 좋겠지만 난 그런 곳에 벌써부터 들어갈 생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의 제안을 곧장 거절하진 못했다.
그는 나로부터 동질감과 위안을 얻고 있었다. 설령 그게 거짓일지언정, 그걸 가차 없이 걷어차 버릴 정도로 난 잔인하지 못했다.
동료의식을 느낄 만한 사람을 찾아내었을 때의 그 심정은 나 또한 잘 알기에.
조용히 지켜보자 에르네스트가 계획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리 많은 사람들을 □□□□ 못할 수도 있어. 하지만 너와 내가 □□□□ 된다면 분명…….”
“선생님들이 허락하실까요.”
“물론이지. 난 구세프 바실리예비치 선생님을 설득할 자신이 있어.”
에르네스트는 정말 진지했다. 이미 무언가 이야기가 오갔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우린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날 갈구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항상 날 저렇게 원하고 있었다.
속으로 쓰게 웃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내게 사랑 고백을 했다면 깔끔하게 차 버렸을 텐데.
난 되도록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에르네스트.”
“……생각을 해 보고 답을 줘. 지금은 안 돼.”
자신감의 대명사나 다름없던 그가 약한 소리를 했다.
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세요. 알다시피 이곳은 정글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
“정말 그렇게 생각해?”
에르네스트는 처음으로 내 말을 무시하듯 잘랐다. 그 스스로도 뱉어 놓고 조금 놀란 듯했다.
멍하니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너도 불안해하고 있잖아. 다 보여.”
“제……가요?”
“그래. 거짓말하지 마, 타티아나. 넌 누구보다 이 생태에 대해 잘 알고 불안에 떨고 있어.”
난 숨을 집어삼켰다.
에르네스트가 더더욱 가까이 성큼 다가오며 머리가 거의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 표정이 너무 무섭고 진지해서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에르네스트가 한 단어, 한 문장을 내 귓속에 새기려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이번 주, 위클리에 와서 봐.”
“…….”
“내가 네 불안감도 확실히 날려 줄 테니.”
“…….”
“대답은 그때 듣겠어.”
난 어쩌면 지금에 와서야 그의 본모습을 본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항상 내게 보였던 가벼운 태도는 말 그대로 내게만 보이는 태도였다는 듯, 그는 강렬하게 말을 맺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가 버렸다.
그저 치기 어린 자신감만 넘치는 꼬맹이라고 생각했었던 에르네스트는 그에 걸맞은 자존심과 긍지를 지니고 있었다.
아직 어리지만 분명한 러시아 남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