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8화 (28/1,277)

##  28화

“아나스타샤.”

“응?”

아나스타샤는 커피를 마시면서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스마트폰에 잔뜩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았다.

난 이때다 싶어 지나가는 투로 물어보았다.

“에르네스트의 피아노는 어때요? 아나스타샤가 듣기에.”

“에르네스트?”

그녀는 별생각 없이 되새기더니 말했다.

“괴물이지.”

“괴물이요?”

“응.”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던 아나스타샤는, 문득 스마트폰을 만지던 손을 멈췄다.

“그 애가 피아노과 8학년 수석인 건 알테고... 첫 협주곡을 협연한게 아홉 살이고, 작년엔 정부에서 주는 공로 예술가 명예 훈장까지 받았지. 선생님들은 걔가 딱 백 년만 전에 태어났으면 러시아 음악사가 바뀌었을 거란 소릴 하곤 해.”

“…….”

중앙음악학교 피아노과 수석, 아홉 살에 협연, 공로 예술가. 간단히 말해 전 세계를 통틀어도 동 나이 대에 적수가 별로 없는 천재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날 바라보았다. 천재라고 평한 에르네스트의 반대편에 내가 놓인다.

그리고 그 저울은 내 쪽으로 기울었다.

“그런데 내가 듣기엔…… 타티아나, 네가 조금 더 낫거든.”

“…….”

“너 정말 얼마나 천재인 거야?”

여지껏 많이도 들었지만, 지금 내가 답변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가볍게 고마워요, 라고 감사를 표했다. 아나스타샤의 말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제스처였다.

그녀는 픽 웃더니 말했다.

“난 잘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는 □□□ 느꼈을 수도 있겠네. 걔가 너한테 꽂힌 것엔 그 이유도 있겠지 뭐.”

“꼬, 꽂히다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직도 몰라? 그렇게 티 나는데?”

아나스타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아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주변 사람들이 이렇게 다 알 정도라면 곤란했다. 난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변명을 만들었다.

“오해겠지요. 에르네스트는 그저 자신이 만들 연구회에 함께할 사람을 모으고 있을 뿐이에요.”

“연구회? 아, 그거 결국 하려나 보네. 흐응…….”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콧소리를 내며 날 훑었다. 난 살짝 어깨를 틀었다.

“뭐, 뭐예요?”

“아니야.”

“말해 줘요. 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지.”

아나스타샤는 조금 웃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진지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에르네스트가 너한테 연구회 이야기를 했다고 그랬지.”

“예. 함께해 달라고…….”

“액면 그대로 믿지는 마.”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알아요.”

“알면 다행이고.”

아나스타샤는 냉정했다.

단적으로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를 그리 신용하고 있지 않는 듯했다.

나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복도에서 마주한 에르네스트의 목소리는 정말 올곧고, 조금 도취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순수했지만, 거꾸로 거기서 내가 바로 딱 잘라 거절했다면 그가 과연 뚝심 있게 연구회를 만들려고 했을까? 그 점에서 나는 조금 회의적이었다.

이것 역시 단순한 자의식과잉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에르네스트는 나와 함께가 아니라면 아예 시작조차 할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다.

이건 조금 이상했다. 혼자서 자신이 없다기엔 그에게는 러시아인 친구가 많다. 그게 굳이 나여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약간은 거짓의 냄새를 느꼈다.

날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약간 실망인데.

아직까진 조금 귀엽게 봐주고 있는 편이지만, 정말 어제 보여 준 모습이 모조리 거짓말이었다면 난 그에게 조금 더 차가워질 것 같았다.

최소한 피아노를 연구하고 싶다는 그 진정성만큼은 진실이어야만 했다.

“연주를 들어 보면 알겠죠.”

심증은 조금 있었지만, 난 에르네스트의 연주를 보고 나서 판단하기로 생각했다.

위클리 연주회는 온전히 연주자가 정하는 자유곡을 선보이는 연주회고, 에르네스트는 나에게 대놓고 자신의 연주를 보고 결정하라고 선전포고를 날렸다.

날 지목했으니 분명히 그의 연주에선 내게 보내는 메시지가 있을 터.

결국 에르네스트나 나나 연주자였다. 수많은 말이 오갔지만 결국 각자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음악뿐이란 말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는 주어야겠지.

“근데, 타티아나.”

“예.”

“난 솔직히 너랑 에르네스트가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켁, 켁!”

난 사레가 들려 크게 기침했다. 내가 방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아나스타샤는 내 상태는 보지도 않고 멋대로 떠들었다.

“물론 발렌티나가 널 죽이려 하겠지만 그 정도는 내가 막아 줄게.”

“잠깐, 그게 무슨…….”

“아니다. 발렌티나가 아마 손도 못 대겠지? 타티아나, 너네 집이 훨씬 더 크잖아.”

“그게 문제가 아니라!”

“생각해 보면…… 에르네스트가 너한테 죽고 못 사는 거, 난 솔직히 이해 가. 넌…….”

아나스타샤는 조금 아련한 눈으로 날 보았다.

“내가 만약 남자였다면 다섯 번도 더 고백했을걸.”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정말!”

“아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호탕하게 웃으며 아나스타샤가 낄낄거렸다. 난 약간 비난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싱그럽게 웃어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늘 좋다 싫다가 분명하고 자유분방했다.

그렇게 기분에 따라 던지는 말에 불과하니 어렵게 받아들일 필요 역시 없었다.

하지만 난 아직도 그녀가 가끔 이렇게 좋다는 표현을 할 때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조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내 말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야.”

“어떻게 안 심각할 수가 있나요?”

“어려울 게 뭐 있어? 그냥 사귀어 보고, 아니다 싶으면 헤어질 수도 있지. 안 그래?”

“안 그렇거든요?”

“왜? 집이 엄해서 그런가? 하긴, 넌 약간 구식이긴 해.”

구, 구식?

충격으로 굳어 버리자 아나스타샤는 아차 싶었는지 손사래를 쳤다. 그녀도 지금은 좀 심했다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그, 너야말로 백 년 전에 태어났다면 러시아를 □□□□ □□□□…… 대충 그런 뜻이…… 아니라 그만큼 클래시컬하다는…….”

“백……년…….”

“……내 맘 알지?”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조금 안쓰러운 빛까지 띠었다.

난 진짜 발끈했다. 이 열네 살짜리가…….

이를 악물고 반격했다.

“그래서 아나스타샤는…… 연애해 본 적 있나요?”

“응? 없어.”

“?”

너무 당당하게 나오니까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턱 막혔다.

대체 뭐지, 이 자신감.

난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투덜거렸다.

“여태…… 사람을 구식이니 뭐니 말해 놓고…….”

“타티아나 너는 너 좋다는 남자가 있잖아. 난 없고.”

“……?”

“만약 에르네스트가 나한테 그렇게 매달렸으면 난 대번에 좋다고 했을걸? 그만하면 괜찮지. 잘생겼고, 머리 좋고, 피아노 잘 치고.”

“예?”

“그런데 이상하게 여태 학교 다니면서도 나 좋다고 하는 남자는 없더라고. 왤까?”

아나스타샤는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스로에게 매력이 부족하거나 문제점이 있으리라곤 일절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물론 아나스타샤는 정말 예쁘고 착하지만 조금 다른 방향으로 유명인사이기도 했다.

보드카를 구해 와서 연습실에서 술판을 벌였다가 정학을 먹었던 일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었다. 바로 작년, 열세 살 때 벌인 일이었다.

중앙음악학교엔 아무래도 모범생들이 많았다. 아나스타샤같은 여자애를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어쨌든…… 그런 본인은 소문만 신경 쓰지 않는다면 아무나 상관없다는 듯 말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럼 아나스타샤가 먼저 좋다고 해 보시지 그래요?”

“없어, 그런 남자.”

이것 봐…….

“에르네스트는 괜찮다면서요?”

“그건 그쪽에서 매달릴 때 이야기지. 내가 그러긴 싫어.”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말은 쉽고 시원스레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엄청나게 눈이 높았다.

말로는 자기 눈 안 높고 아무나 상관없다고 하는 사람이 알고 보면 가장 눈이 높단 말이 있기도 하다.

“…….”

“왜?”

저기 미안한데, 아나스타샤. 연애에 대해선 너도 나 못지않게 구식인 것 같거든?

이 불편한 진실을 말해 줄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난 결국 말하지 못했다.

***

시간이 되어 나와 아나스타샤는 함께 콘서트홀로 향했다.

2층에 위치한 콘서트홀은 238석으로 이 학교에서 가장 큰 홀이었다.

저번 주에는 5층에 있는, 조금 작은 챔버홀에서 했었는데 이번엔 어쩐 이유에서인지 규모가 커져 있었다.

그 이유는 콘서트홀에 들어가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 사람이 왜 이렇게 많죠?”

200석이 넘는 좌석이 거의 다 차 있었다. 여학생들이 거의 2/3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교생이 400명이니까 이 정도면 시간이 되는 여학생들은 거의 다 왔다고 보면 되었다.

“왜겠어. 에르네스트 때문이지.”

아나스타샤는 덤덤히 말했다. 다른 이유는 있을 수도 없다는 투였다.

“말도 안 돼요.”

“항상 이랬어.”

단독 콘서트도 아니고 교내 위클리 연주회다.

앞서 수많은 학생들이 준비해 온 곡들을 연주하고, 에르네스트 역시 그 사이에서 연주하는 곡은 딱 한 곡일 뿐이었다.

그것도 길어 봐야 10분 이내의 짤막한 곡으로.

그 한 곡을 듣자고 이 많은 사람이 모인다고? 학년도 과도 불문하고 이 정도 인기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 학교 여자애들이 점잖은 편이라서 이럴 때나 와글와글한 거야. 기회니까.”

“기회요?”

“이따가 봐.”

“……?”

곧 무대가 암전되었고 나와 아나스타샤는 대화를 멈췄다.

잠시 후, 스포트라이트가 피아노 주변을 비췄다.

검은색 광택을 흘리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사람을 홀리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무대에 서고 싶었다. 오늘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지만, 손이 근질거렸다.

“…….”

이렇게 무대를 그리워하면서 왜 미하일 선생님에겐 위클리부터 하고 나서 생각해 보겠다며 덜떨어진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다.

항상 나는 이중적이었다. 지금도 연주자로서 날 보일 자신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대에는 서고 싶었다.

이게 얼마나 간사하고 이기적인 욕망에 불과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무대에 서고 싶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무대를 바라보는 사이 첫 주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한 남학생이었다.

자세를 잡고, 잠깐 숨을 고른 후, 연주가 시작되었다.

쇼팽 프렐류드 24곡 중 8번째 곡. 부제는 ‘절망’.

긴박하고, 저돌적이다. 2분이 안 되는 짧은 전주곡이지만 그 하나가 완성된 주제를 담고 있는 곡이었다.

수없이 휘몰아치는 음표들을 그저 기계적으로 쳐 내기만 해도 비슷하게 들리긴 하지만 좀 더 깊이 있는 주제를 표현하려면 상당히 힘든, 꽤 난이도 있는 곡에 속했다.

남학생은 깔끔하게 이 프렐류드를 쳐 나갔다. 스케일이 뭉개지거나 절뚝이는 일은 전혀 없었다.

서서히 잦아드는 음을 마지막으로, 곡이 끝났다. 박수와 답례 인사가 짧게 이어졌다. 나 역시 박수를 쳤다.

저번 주에도 느꼈지만 역시 이 중앙음악학교 학생들의 수준은 일반적인 음악학교를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보통 저 나이 대의 학생이라면 이렇게까지 원숙하게 소화해 내기 힘들고 그저 악보만 급하게 따라가기 마련인데, 못해도 몇 단계는 앞서 있는 듯했다.

그 뒤로도 몇 명의 학생이 더 지나갔고, 발렌티나도 무대 위로 올라왔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누가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 눈을 마주쳤다.

발렌티나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평소엔 풍성하게 부풀어 있던 갈색 머리가 지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긴장하는 일 없이 당당하게 손을 올렸다.

첫 소절을 듣고 살짝 놀랐다.

“멘델스존?”

멘델스존의 론도 카프리치오소.

멘델스존이 15세에 작곡한 아주 유명한 곡이었다.

발렌티나는 2분 정도의 서주 부분을 생략하고 프레스토부터 시작했다.

이게 그녀 개인의 연주회라면 처음부터 연주했겠지만, 아무래도 짧은 시간 내에 강렬한 연주를 보여 주어야 하는 위클리에서 조금 느긋한 안단테는 생략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리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전체적으로 밝고 명랑한 곡이다.

복잡한 주제를 담고 있지 않고 랩소디처럼 자유롭게 작곡된 카프리치오소이기에 깊이 있는 표현력보다는 순간적인 리듬감이 상당히 중요했다.

발렌티나의 실력은 굉장히 뛰어났다. 그녀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론도 카프리치오소는 특유의 발랄함을 보여 주는 듯했다.

피아노에서 튀어나온 음들이 무대에 떨어졌다가, 튕겨 올랐다. 저들끼리 뭉친 음들이 통통 튀며 무리를 이루어 무대를 뛰어다녔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웃음이 나오게 하는 음색이었다.

그녀의 손은 가볍지만 얕지 않았다. 발렌티나는 이미 음의 무게를 끌어오는 방법을 어렴풋이 터득하고 있었다. 난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음색의 풍부함뿐이 아니었다.

발렌티나가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은 연주가 이어지면서 두드러졌다.

아무 생각 없이, 마치 음악의 요정처럼 자유롭고 신나게 연주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와중에도 아주 미세하게 박자를 미끄러뜨리는 것을 난 정확하게 느꼈다.

발렌티나는 상당히 정교한 왼손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청중들은 영문도 모르고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상당히 노련한 실력이었다.

본래 있는 경쾌함에 발렌티나가 보여 주는 화려한 기교가 합쳐지자 잠시의 지루할 틈도 없이 4분이 지나갔다.

큰 박수가 쏟아졌다. 발렌티나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박수를 보내며 아나스타샤에게 귓속말을 했다.

“정말 잘하네요.”

“그렇지?”

친구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아나스타샤가 한결 들뜬 모습으로 맞장구쳤다.

발렌티나는 여전히 나를 별로 안 좋아하겠지만…… 난 이런 연주를 보여 주는 사람을 싫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발렌티나와 친해질 수 있을까 조금 고민하는데 에르네스트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이전까지 한 번도 없었던 우레와 같은 박수가 콘서트홀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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