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9화 (29/1,277)

##  29화

공기가 뜨거워졌다.

콘서트홀을 꽉 채운 박수와 환호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깔끔하게 한 손을 들어 화답하곤, 피아노 앞에 앉았다.

무대 매너에 익숙한 그 모습이 당연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연주를 준비하는 그를 보며 난 그가 날 붙잡고 이야기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긍지, 자신감, 불안감.

러시아인으로서 넌 어떤 곡으로 날 설득할 거지, 에르네스트?

난 가만히 에르네스트가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의자 높이를 조절하고, 거리를 맞춘 뒤, 손을 뻗어 건반과의 거리를 가늠한다.

손을 닦은 손수건을 보면대 옆으로 휙 던지고는 곧바로 건반을 짚었다.

“……!”

난 팔걸이를 움켜쥐었다가, 힘이 풀려서 스르르 좌석에 내려앉았다.

놀라기도 했지만, 지금 드는 가장 큰 마음은 후회였다.

최소한…… 최소한 미안하다고 그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난 평소 그의 과시적인 성격이나 자존심이 시야를 좁게 만들 수밖에 없으리라 얕잡아 보고 있었다.

때문에 그가 꺼낼 수 있는 카드는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단순한 연주자가 아니었다.

“…….”

스크리아빈 소나타 2번. 소나타 판타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선곡이었다.

철학적 신비사상과 내면의 탐구에 일생을 바쳤던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스크리아빈. 그의 자유롭고 거대한 음악이 홀을 메웠다.

기교적 난이도도 상당하고 주제가 확실하지 않은 곡들이 많기 때문에 많은 연주자들이 스크리아빈을 어려워하고 잘 표현해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표현해 낼 수만 있다면 연주자의 정체성을 확연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러시아 피아니스트의 자신감과 실력. 그 모든 것이 곡에서 드러났다.

“…….”

에르네스트 역시 1악장을 생략하고 2악장부터 곡을 시작했다.

빠른 프레스토, 화성이 두텁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지만 유려하게 치려면 상당한 수준의 테크닉을 필요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르네스트는 유려하게 무궁동을 끌고 나갔다.

쇼팽과 리스트의 낭만주의를 데생으로 그려 놓고, 그 위에 러시아적 채색이 이어졌다. 얼핏 쇼팽처럼, 슈만처럼 들리지만 전혀 달랐다.

스크리아빈 특유의 방만함과 부유감을 걷어 내고 그 위에 견고한 부피감을 더해서 지그시 누른다.

그것은 그대로 묵직한 무게가 되어 무대를 장악해 나갔다.

다시 한 번 에르네스트의 선곡에 감탄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에르네스트의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었다. 정말 과감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선곡이었다.

스크리아빈의 소나타 2번은 아직 종교나 신비적 색채가 그다지 드리워지지 않았던 시절에 작곡했던 곡이기에 에르네스트가 원하는 대로 끌고 나갈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었다.

그렇게 그려지는 음악은 러시아적 테마를 배경으로 둔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과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이 연주는 에르네스트가 그리는 러시아 피아니즘이었다.

“…….”

난 숨 쉬는 것도 잊고 온전히 에르네스트의 연주에 심취할 수 있었다.

어떠한 기술적인 부분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연주는 그 자체로 에르네스트가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로서, 난 이 메시지에 집중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매력적인 음색이 쌓이며 형체를 드러냈다.

저 멀리, 희미하게 드러나는 풍경은 어두운 바다였다.

더 먼 바다에선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어서 어쩐지 조금 두려워졌지만, 난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조심스레 바다로 향했다.

구두를 벗고, 발을 담갔다. 차가울 것이라 생각했던 바다는 예상과 달리 포근했다.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성당도, 종도 없었다.

이 밤바다를 더 자세히 느끼고 싶어서, 약간 겁 없이,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순간, 에르네스트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

화들짝 놀라 턱을 당겼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에르네스트는 피아노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내 쪽으로 한눈을 파는 일 따윈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강렬한 환영을 느꼈다.

에르네스트는 나에게 묻고 있었다.

너 역시 이 바다를 잘 알지 않느냐고.

“…….”

난 대답을 해 주어야만 했다.

“브라보!”

에르네스트의 연주가 끝났다.

콘서트홀 전체에 환호성이 메아리쳤다. 난 찬사를 보내는 것도 잊고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에르네스트는 무대 앞으로 조금 나와서 세련되게 인사를 보내곤 퇴장했다.

“타티아나.”

“…….”

“타티아나?”

“으, 예?”

“끝났어. 나가자.”

겨우 4분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지만 난 그사이 에르네스트와 너무 많은 대화를 한 것 같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약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나스타샤가 조금 걱정스럽게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왔다.

“너도 어쩔 수 없구나.”

“……뭐가요?”

“아니야.”

“?”

아나스타샤와 함께 콘서트홀 밖으로 나왔다.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여전히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잠시 후, 연주자 대기실 문이 열리며 오늘 위클리 무대에 섰던 학생들이 나왔다.

저번 주에는 각각 친구들과 뭉쳐서 칭찬이나 격려를 주고받는 모습들이 자주 보였는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에르네스트가 나오자마자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그러곤 너 나 할 것 없이 꽃을 건네고, 초콜릿을 주고, 사인을 받고, 사진을 찍고…… 난리법석이었다.

난 아직까지도 중앙음악학교에 가지고 있었던 환상이 조금 깨지는 것을 느꼈다.

에르네스트는 거의 연예인 같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창가에 기대어 서서 황당한 시선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엄청난 인기네요.”

“언제부터더라…… 공로 예술가 훈장 탔을 때였던가, 영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가서 상 타 왔을 때부터였던가. 무슨 당연한 것처럼 이렇게 되더라고.”

에르네스트는 벌써 커리어도 상당히 가지고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잠시 지켜보고 있는데 발렌티나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나스타샤가 반갑게 맞았다.

“발렌티나! 어떻게 멘델스존을 칠 생각을 했어? 정말 최고였어.”

“그래? 고마워.”

“여기, 타티아나도 아까 너 칭찬 많이 했었어.”

“……고마워, 타티아나.”

발렌티나는 비교적 솔직하게 감사를 표했고 난 다시 한 번 그녀의 연주에 대해 칭찬했다.

발렌티나는 아카데믹한 연주였다고 해 주었을 때 가장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세 명이 되어 지나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가까스로 팬들로부터 해방된 에르네스트가 다가왔다.

“보러 와 줬구나.”

에르네스트의 손에는 한 송이씩 받은 꽃이 어느새 꽃다발이 되어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오셨어, 슈퍼스타?”

“난 연주보다 이게 더 힘들어 죽겠어.”

“팬 서비스도 잘 해야 큰 피아니스트가 되는 거래.”

“그래서 열심히 하잖아.”

에르네스트는 정말 귀찮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그리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가볍게 아나스타샤, 발렌티나와 이야기를 나눈 에르네스트가 마지막으로 날 돌아보았다.

평소와 같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미소. 난 속으로 인정했다. 그는 저런 자신감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이번 위클리를 두고 나와 에르네스트 사이에 승부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지만 그는 명백하게 승리감을 느끼고 있었고, 난 왠지 모를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도, 나도 따로 드러내어 말하지 않아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래서.”

이전과 이어지는 물음이었다.

“어땠어?”

“…….”

지금 그에게 테크닉이 좋다는 둥 같은 이야기를 해 봐야 바보 같은 소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걸 묻는 게 아니었다.

난 그냥 솔직하게 전했다.

“좋았어요.”

“그뿐이야?”

“……재촉하지 말아요.”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직 사람도 너무 많고 생각도 정리되지 않았다.

* * *

방과 후. 조금 한산해진 교실에서 나와 에르네스트는 마주했다. 오늘은 한승우도 리처드도 없이 단둘이었다.

난 자리에 앉아 있었고 에르네스트는 교실 앞에 기대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에르네스트가 대화를 열었다.

“대답을 듣고 싶은데.”

“…….”

“아직도 생각할 게 남았어? 난 충분히 보여 줄 만큼 보여 줬다고 생각해.”

그 말대로였다. 에르네스트는 호언장담하고도 남을 정도로 훌륭한 연주자였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요. 에르네스트는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여 줬어요.”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물어봐야 했다.

“전 에르네스트가 왜 연구회를 만들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이미 중앙음악학교 전체가 에르네스트에게 열광하고 있었다. 그는 정점에 선 지 오래였다.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터.

러시아인으로서 러시아 학교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는 그의 의지는 어지간해선 깨어지지 않을 듯했다.

그런데 굳이 더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미를 잘 모르겠다.

난 이런 화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굉장히 무례하다고까지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이 조금 과격하게 물어보았다.

“우리 조금 솔직해질 수 있을까요.”

그는 정말 솔직하게 말했다.

“난 더 이상 널 내버려 두지 못하겠어.”

“……제가 러시아인이라서?”

난 조금 당황해서 말을 돌리고 말았다.

에르네스트는 그리 조금 고민하다가, 정면으로 날 바라보았다.

“넌 그 누구보다 나와 많이 닮아 있어. □□□□□□ 항상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지. 그런데 왜 그걸 유학생에게서 찾는 거야?”

약간의 의문, 분노가 거기에 있었다. 내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여기엔 조금 오해가 있었지만 난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를 지켜보았다.

에르네스트가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줄 수 있어. 그래서 보여 준 거야.”

그가 보여 준 음악은 확실히 수준 높은 것이었다. 단순한 악상의 전개를 넘어선 뚜렷한 러시아의 색채감.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에르네스트는 또래 사이에선 적수가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하지만……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래서 절 연구회로 묶어 두려고 한 건가요?”

조금 경계하듯 물어보자 에르네스트 역시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널 보고 결심한 것은 맞지만 □□ □□□ 한참 전부터 해 왔어.”

“한참 전부터?”

다시 묻자 그가 대답했다.

“선생님들도 러시아 피아니즘이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 물으면 정확하게 대답하지 못해. 하지만 대부분 날 두곤 확실하게 말하지. 러시아 피아니스트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그 누구라도 에르네스트의 연주를 듣는다면 러시아를 떠올릴 수밖에 없으리란 점엔 나 역시 동의했다.

“내가 줄 수 있다는 건 그런 의미야.”

그의 말은 더없이 단순했다. 연구회를 만들고 자기가 가장 뚜렷한 색이 되어 주겠단 말이었다. 어떤 시각에선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난 에르네스트가 하는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많이 동의했다.

요즘 시대에 어느 한 나라의 정신과 관념 등을 계승하고 유지하려는 연주자는 굉장히 드물었다.

에르네스트 같은 거대한 신념을 지닌 피아니스트야말로 나같이 개인적인 욕망을 우선시하는 피아니스트보다 훨씬 귀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다.

열네 살이 가지기엔, 반대로 열네 살이기에 가질 수 있는 큰 포부이기도 하고, 대단한 자긍심이기도 했다.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의 기준이 되어 주신다는 건가요.”

“길을 잃지 않도록.”

“에르네스트가 보기엔 제가 길을 잃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요?”

에르네스트는 말없이 날 지켜보더니 툭 말했다.

“이제 막 잘못 디뎠지. 그래서 불안해하고 있고.”

한 점 거짓 없이 진심으로 내가 잘못된 길을 찾아 헤메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열네 살밖에 안된 그가 날 그렇게 바라본다는 것에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느꼈지만 크게 반론할 생각이 들진 않았다.

충분히 그는 나를 그렇게 볼 수도 있었다. 어떤 부분에선 정확한 사실이기도 했고.

난 에르네스트의 진단을 깊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가볍게 말했다.

“2주일밖에 안 되었으니깐요.”

“그러지 마, 타티아나.”

에르네스트가 조금 더 다가왔다.

더없이 진지한 태도라 더 이상 피하거나 도망칠 수 없었다. 답을 해야만 했다.

문득,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일단 저질러 보고 아니다 싶으면 발 빼면 되지 않느냔 아나스타샤의 말이 떠올랐다.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무대 위에서 보여 준 그의 피아노가 너무 진솔했다. 그 바다는…… 조금 더 발을 담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좋아요.”

“뭐라고?”

난 고개를 들었다.

“에르네스트가 어디로 갈진 아직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속는 셈치고 한번 따라가 줄게요.”

“정말이야?”

“예.”

일단은 넘어가 줄게.

넌 정말 꼿꼿하고 당차.

하지만, 너야말로 그렇게 앞만 보고 가다가 문득 길을 잃을지 몰라, 에르네스트.

그렇게 홀로 넘어져 버리면 너무 아프잖아. 그땐 나라도 널 붙잡아 줘야 하지 않겠어?

그게 지금 내가 이 학교에 있는 또 하나의 이유일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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