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월요일. 다시 한 주가 시작되었다.
등교해서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아나스타샤가 놀랐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타티아나. 에르네스트랑 하기로 했다면서?”
“무슨 말이에요?”
“시치미 떼기는. 그 연구회인지 뭔지 하기로 했다고 에르네스트가 떠들고 다니던데. 난 아예 당연히 들어가는 걸로 되어 있던데?”
행동력 하난 정말 빠르다……. 난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들어오실 건가요?”
“아니? 내가 왜?”
아나스타샤도 평소 마이페이스 그대로였다. 내가 왜? 정답이었다.
난 약간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죠. 굳이 들어갈 필요는 없겠죠.”
“넌 왜 바로 결정했어?”
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일단 지켜보기로 했어요.”
“지켜보다니?”
갑자기 아나스타샤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믿었던 아나스타샤마저 그쪽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아 보여서 조금 피곤해졌다.
가만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아나스타샤는 날 말릴 생각이 없었다.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나스타샤가 말하지 않았나요. 일단 발을 담가 보고, 아니다 싶으면 빼도 상관없다고.”
“으, 응? 그러긴 했지.”
“그래서 그렇게 해 보기로 했어요.”
“……그렇다고 네가 정말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약간 예상 밖이라는 듯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렸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었다.
난 철저히 관찰자의 시점에서 에르네스트가 뭘 어떻게 하는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에르네스트가 러시아 피아니즘에 대해 가진 자긍심과 자신감 등은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되레 격려해 주고 싶다. 응원해 주고 싶다.
예술적 테마로서의 러시아는 지킬 만한 가치가 있었고 에르네스트는 그만한 능력이 있는 천재였다.
앞으로도 훌륭한 러시아 피아니즘의 정수를 담은 연주자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진실된 내 바람이었다.
하지만 조금 현실적으로 보자. 에르네스트는 아무리 잘났어도 열네 살이다.
겨우 열네 살짜리가 뭘 알겠는가? 나라에서 주는 예술가 훈장도 받았고 장래가 유망한 중앙음악학교 수석답게 피아노 하나는 정말 귀신처럼 치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말해야 할 내용을 에르네스트는 너무 거침없이 쉽게 말하고 있었다.
진짜 음악에 대해서라면 주저 없이 막말을 일삼던 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그게 너무 지나친 나머지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혹은 배타적으로 되거나 어느 쪽이든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면, 내가 브레이크가 되어 볼 생각이었다.
지금 에르네스트는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폭을 제한하고, 적을 너무 많이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이 또한 그 나름의 성장통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덜 아픈 게 좋지 않겠는가.
때문에 난 곧바로 에르네스트와 대립하지 않고 일단 함께하는 방향을 택했다.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싶기도 했고…… 그가 보여 준 피아니즘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표하고 싶기도 했다.
일단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로 했으니 얌전히 따라가 보자.
약간은 흥미진진하기까지 하다.
* * *
무슨 일이 있어도 방관하겠다고 마음먹은 지 단 반나절 만에 결심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
“다음이요.”
앞에 서 있던 여학생이 주춤거리며 묻는다.
“아무 곡이나 상관없나요?”
“네.”
에르네스트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여학생이 피아노 앞에 앉아서 심호흡을 하더니 쇼팽의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꽤 귀여운 음색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불성실하게 의자 뒤로 죽 늘어지며 목을 까딱였다.
난 뒤편에 서서 이게 무슨 짓인지 지켜보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연습실 하나를 빌려 테스트를 치르고 있었다.
이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어떤 연구회나 동아리에 들더라도 실력 검증은 있어야만 했다.
어느 정도 기본을 갖추고 있는지 들어는 보아야 앞으로도 어떻게 함께해 나갈지 궁리를 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하는 실력 테스트라면 찬성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오디션을 보고 있었다.
방금 쇼팽을 치고 나간 여학생, 불합격이었다.
난 조금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심사위원을 같이 했어야 했다.
지켜보기로만 마음을 먹었기에 혼자 하라고 내버려 뒀더니 에르네스트는 정말 마음대로 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
다음 사람이 들어오기 전, 난 조용히 그를 불렀다. 에르네스트가 대번에 화색을 띠며 날 돌아보았다.
“응, 타티아나.”
“…….”
웃는 얼굴을 보니 쓴소리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미안하지만 제 생각엔 이런 오디션은 그리 좋지 않게 보여요.”
내 말에 에르네스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고? 오는 사람 가리지 말고 다 받아?”
“…….”
러시아 피아니즘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고 간판을 내걸었더니 러시아 학생들뿐만이 아닌, 유학생들도 꽤 많이 참여를 희망했다.
그 모두와 함께할 순 없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너무 깐깐한 기준을 두고 있는 듯했다.
난 조심스레 말했다.
“러시아 피아니즘을 연구하고 싶은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최소한 함께 연구하고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들은…….”
“저 애들 중 몇 명이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
거꾸로 그가 나에게 물었다.
난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대꾸하려다가 멈칫했다.
당사자가 아닌 내가 옆에서 보아도 훤하게 보였다. 실제로 찾아온 여학생들은 대부분 연구회보다는 에르네스트에게 관심을 보였다.
에르네스트가 퉁명스레 말했다.
“진지하지 못할 거라면 나도 어쩔 수 없어.”
“그 또한 에르네스트의 역할이지 않나요?”
“무슨 소리야.”
“진지하지 않다면 진지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죠.”
“내가 무슨 수로?”
“……저번이랑 말이 또 달라지신 건 아시나요? 에르네스트. 러시아 연주자들의 기준이 되어 주겠다고 했잖아요?”
“현실적으로 봐야지, 현실적으로. 타티아나.”
“…….”
기가 막혀 말문이 턱 막혔다.
진심으로 이 녀석을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어졌다.
이 쪼끄만…… 물론 나보다 크지만, 어설프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꼬맹이가, 뭐? 현실적? 그게 지금 네가 할 소리야?
지금이라도 확 들이받아 버릴까 생각하다가 같이하기로 한 지 하루 만에 그러는 건 스스로 보기에도 조금 꼴사납다고 여겨져서 간신히 화를 억눌렀다.
내가 내 입으로 하겠다고 했으니까 하루는 참아 보자…… 하루는.
* * *
“아나스타샤!”
“왁!”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를 발견하자마자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드디어 숨통이 트였다는 듯, 전신으로 반가움을 표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나스타샤는 깜짝 놀라 몸을 뒤틀었다.
당장이라도 확 끌어안아 버릴 것 같은 기세를 보이던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의 앞까지 다다라선 조금 머뭇거리더니 팔을 붙잡았다.
아나스타샤는 잘 모르지만 타티아나에겐 지켜야만 할 선이라는 게 아직도 조금 남아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팔을 잡은 채 타티아나가 다짜고짜 요구했다.
“아나스타샤. 저한테 잘 참았다고 해 주세요.”
“응? 어?”
“어서요. 그냥 잘 참았다고 해 주시면 돼요.”
“어…… 잘 참았어?”
“하아…….”
아나스타샤가 떨떠름하게 원하는 대로 해 주자 타티아나는 스르르르 옆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나스타샤는 황당하다는 듯 그 모습을 보다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에르네스트가 그렇게 버거워?”
“제가 왜 이 고생을 하는 걸까요…….”
도통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타티아나가 중얼중얼거렸다.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웃으며 그 옆에 앉았다.
아직 타티아나와 친해진 지 몇 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녀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우선 타티아나는 피아노에 대해서만큼은 거의 경건한 사제처럼 맹목적으로 바뀌어 몰입했고, 또 그만큼 어마어마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천재였다.
그 외의 것으로 보면, 집안이 재벌이고 외모가 빼어나고 말투가 조곤조곤한 아가씨 같고…… 여러 가지 특징이 있었으나 아나스타샤는 그런 것은 잘 몰랐다.
아나스타샤가 아는 것은 타티아나가 생각보다 스스로를 잘 챙기지 못하는 덜렁이이며 그것과는 완전히 반대로 타인의 일이라면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돕기 좋아하는 참견쟁이라는 것 정도였다.
자기 같았으면 일찍이 무시하고 지나쳤을 것들을 타티아나는 자기 일인 양 최선을 다해 돕곤 했다.
지금 그녀가 사서 고생을 하는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의 이런 점을 꽤 귀엽게 지켜보고 있었다.
“화 풀어, 타티아나.”
“화가 나는 게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저 자신에게 화가 나네요.”
“……그렇게까지 스트레스 받을 거면 지금이라도 그만두지 그래?”
“아뇨, 오기가 생기네요. 지켜볼 거예요. 어디까지 가는지.”
물론, 오로지 좋은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가 보기에 타티아나는 고집이 강하고 프라이드가 높았다.
그리고 정말 화가 나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폭력적으로 변하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아직까지 타티아나가 그렇게까지 화난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얼마 전 발렌티나에게 들었던 타티아나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나서는 사실 조금 당혹스러웠다.
아나스타샤는 문득 타티아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정말 천사처럼 상냥한 아이였다.
저런 아이를 화나게 하려면 도대체 무슨 짓을 해야 하는 걸까?
“에르네스트가 절 시험에 들게 하네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가 이 학교에서 타티아나를 폭발시키게 될 첫 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다급해졌다.
에르네스트가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타티아나가 이성을 잃고 돌변해 버릴까 봐 그 점이 가장 걱정되었다.
“그 애가 뭘 했는데 그래?”
“하…….”
타티아나는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한숨을 쉬다가 설명했다.
“에르네스트와 앞으로의 운영 방침에 대해 이야기를 좀 했어요.”
“그런데?”
“……마스터 클래스를 하겠다는 거예요 저랑 번갈아서.”
“뭐?”
“말려도 안 들어요…….”
마스터 클래스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수업이다.
그 전문가는 말 그대로 마스터. 한 분야의 마스터라고 인정받는 사람이어야 했다.
저명한 피아니스트도 아닌 열네 살 학생이 마스터 클래스를 하겠다고 하면 그냥 코웃음 치고 무시할 일이 아니라 진지하게 붙잡고 혼을 내야 할 수준이었다. 대체 누구에게 뭘 가르치겠단 것인가?
아나스타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걔 왜 그렇게 심각해졌지? 원래 그런 애 아니었는데.”
“모르겠어요…….”
에르네스트가 과하게 도취되어 있음을 깨닫고 몇 번이고 좋은 말로 말리려 했다.
타티아나는 속으로 거의 빌듯이 했다. 제발 에르네스트, 정신 좀 차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도통 타티아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무조건 자신이 기획해 둔 방향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클리에서 보여 준 연주 단 한 번으로 타티아나가 설득되어 자신을 따라와 준 것 또한 그 자신감에 한몫하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처음 에르네스트가 말했던 기준을 조금 적당히 생각했음을 인정했다.
연구회를 만들어서 러시아 피아니즘의 연구에 매진하고 싶은 학생들을 모아, 그 자신이 흔들리지 않는 기준점이 되어서 다른 길로 새지 않도록 붙잡아 주며 함께 나아가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이미 자신이 거의 완성된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건 완전히 다른, 심각한 소리였다.
“에르네스트, 그대로 두면 큰일 날 거예요.”
타티아나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혼자 내버려 두면 정말 멋대로 폭주해 버릴까 봐 혹시나 해서 아예 무시하지 않고 따라 주었다.
그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에르네스트는 무서울 정도로 막 나가고 있었다. 단 하루만 지켜보았는데도 너무나 확연했다.
에르네스트의 오랜 친구인 아나스타샤 역시 조금 심각해졌다.
“그렇다고 어떻게 할 방법도 없잖아.”
“……그렇죠.”
조금 단순하게 비약하자면 이 학교엔 에르네스트의 적수가 없었다.
건방지거나 인성이 더럽거나 모두 쓸데없는 것들에 불과했다. 이곳은 결국 실력이 전부인 정글인 것이다.
이 정글의 최상위 포식자를 말린단 말인가? 잘난 척이 아니라 정말 잘난 것이었다. 심지어 추종자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아마 마스터 클래스를 강행해도 참가자가 줄을 설 것이다. 그것은 에르네스트를 더더욱 기고만장하게 만들 것이고.
악순환의 연속이다.
“선생님들에게 이야기를 해 보면?”
“더더욱 반항적으로 나오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그리고 생각해 보니 선생님들이 적극적으로 걔한테 재갈을 물리려고 할 것 같지도 않아.”
타티아나 역시 동의했다. 선생들 중엔 대놓고 말하진 않아도 에르네스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다.
모두가 호의적이었고 에르네스트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조금 파격적인 일이 벌어진다고 한들 막아 줄 확률이 높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잠시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시점에서 조용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이대로 진행하다간 반발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반드시 생긴다.
결국 시간이 흘러 사태가 심각해지고, 본격적으로 반발하는 학생들과 한바탕해서 깨지고 흠집이 나고 나서야 스스로 지나쳤음을 깨달을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말릴 수 있다면 말려 보겠지만 들어 먹을 고집도 아니었다. 결국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타티아나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거의 체념한 듯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지만, 두 눈은 여태껏 볼 수 없었던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