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1화 (31/1,277)

##  31화

에르네스트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며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었다.

단 나흘 만에 에르네스트가 추진하는 러시아 피아니즘 연주회는 궤도에 오르려 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작게나마 반발도 있었고 쓴소리도 나왔지만 모두 머잖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자신했다.

학교엔 에르네스트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훨씬 더 많았다.

학생들 사이엔 에르네스트라면 뭘 하든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어차피 자신이 여태껏 비공식적으로 러시아 학생 대표나 다름없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공식화된다 하더라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었다.

가장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던 타티아나를 끌어오는 것도 어렵지 않게 해냈다.

에르네스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타티아나는 처음엔 조금 겁먹은 것 같더니 결국 그의 의견에 동조해 주었다.

동조뿐이랴, 바로 연구회에 참가해 주기까지 했다.

타티아나의 선천적인 박애주의자적 기질은 그녀로 하여금 잠시 방황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그녀 역시 어쩔 수 없는 러시아 피아니스트였던 것이다.

에르네스트가 위클리 연주회에서 보여 준 강렬한 이미지엔 매료되지 않고 배길 수 없었으리라.

타고난 성정이 착하고 부드러운 그녀가 아무에게나 웃어주고 다니는 것을 보면 복장이 뒤집히는 기분이 들곤 했지만, 이젠 옆에 두고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하지만 타티아나는 곧장 연구회에 가입하고도 아직도 주변을 맴돌며 꽤나 주의 깊게 지켜보는 태도를 고수했다.

그러다가 가끔 조심스럽게 반대 의사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결코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앞으로 타티아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신중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에르네스트가 반으로 들어서니 아직 이른 시간이라 몇몇 학생들만 보였다.

거의 본능적으로 백금발의 소녀를 찾던 에르네스트는 아직 그녀가 등교하지 않았음을 알아차리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대신 타깃을 찾아내었다.

“안녕?”

에르네스트는 사람 좋게 웃으며 책상 위에 턱 걸터앉았다.

단어장을 펴 들고 공부를 하고 있던 유학생이 놀란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에르네스트의 웃음이 가늘어졌다.

한승우.

타티아나가 과할 정도로 관심을 표하는 한국인 유학생.

에르네스트는 처음부터 한승우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전 세계에서 오만 연주자들이 모이는 곳이라지만, 러시아어도 제대로 배우지 않고 피아노 실력 하나만 믿고 이 중앙음악학교의 문을 두드렸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백 보 양보해서 거기까지도 좋았다.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어차피 중앙음악학교는 별의별 특이 케이스가 다 있는 곳이고, 에르네스트는 딱히 차별주의자거나 이해심이 부족한 사람도 아니었다.

피아노, 그 정도면 잘 치는 편이었고 절대음감도 뛰어난 것 같으니 러시아어만 익히면 잘 적응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정도는 멀리서 응원해 줄 마음도 없잖아 있다.

하지만 그 모자람을 핑계로 타티아나의 관심을 끌어 간 것은 정말 비겁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처음 본 실기시험장에서부터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공부는 잘 되어 가냐?”

“음…… 응.”

오호, 그사이에 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나.

“영어는 꽤나 하던 것 같던데. 러시아어도 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네?”

“……응.”

“거기에 독일어까지 할 수 있다면 정말 유리해질걸. 다음엔 그쪽으로 유학 가 보지 그래.”

“열심히 하고 있어.”

못 알아들으면서 되는대로 대답하긴.

에르네스트는 조금 비웃으며 짓궂게 말했다.

“그래 열심히 해야지. 타티아나가 더 이상 신경 쓸 일 없도록.”

“……?”

한승우는 타티아나라는 단어에 반응한 듯 조금 눈빛을 달리했다.

이 자식 봐라?

에르네스트가 킥킥 웃으며 허릴 굽혔다.

“야. 그리고 너 조금 착각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

“진짜 관심이랑 동정은 구분 좀 하고 살자. 그 정도는 알 것 아냐?”

한승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에르네스트가 그리 좋은 의도로 말을 걸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분위기로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게 문제를 만들 순 없었다. 한승우는 여기서 그의 편을 들어 줄 학생 따위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말을 잘 못하니 시시비비를 가리기에도 너무 불리하다. 때문에 잠자코 침묵했다.

에르네스트는 조금 더 도발적으로 한승우를 내려다보았지만 그 역시 일을 키울 생각은 없었다.

괜히 꼴 보기 싫다고 여기서 싸움을 거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한승우는 잃을 게 별로 없었지만 에르네스트는 잃을 것이 많았다.

“구분은 너나 잘 하지?”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한 명 더 끼어들었다.

에르네스트는 인상을 구기며 돌아보았다. 평소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영국 유학생, 리처드가 심드렁하게 말을 건네 왔다.

“철딱서니 없게 군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만. 생각보다 더 심각하네.”

“뭐? 너 말이면 단 줄…….”

“이제 그 러시아 대머리 연구회인지 뭔지로 니 친구들 모은다며? 중앙음악학교의 명물이 되겠군.”

“야!”

에르네스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책상을 걷어찼다. 쾅! 책상이 덜커덩 날뛴다.

“죽고 싶어? 러시아 피아니즘 연구회야!”

“러시아 러시아 러시아. 시끄러워.”

리처드가 귀를 후비며 에르네스트의 말을 무시했다.

곧바로 신랄한 비난이 이어졌다.

“무슨 앵무새처럼…… 그간 귀찮아서 내버려 두고 있었는데 방학 사이 무슨 마약이라도 먹었냐? 왜 병세가 악화되었어?”

“야. 리처드. 너 진짜 죽고 싶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심상찮다. 에르네스트는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섰다.

“영국에서 무슨 귀족이니 어쩌니…… 내가 그딴 것 신경 쓸 것 같아? 여긴 러시아야. 까불다가 죽는 수가 있어.”

“그래, 그래. 네가 말하는 러시아는 그런 나라지. 폐쇄적이고, 어둡고, 폭력적이고. 그 잘난 피아노 말고 주먹으로도 증명하려면 해 보든가.”

“못 할 것 같지?”

“얼마든지. 난 언제나 네가 먼저 치기만을 기다리고 있거든.”

“……이 자식이 진짜.”

리처드는 한 번도 흥분하지 않고 에르네스트를 대했다.

에르네스트는 어쩐지 혼자만 바보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후. 빌어먹을 자식. 재수 없게 혓바닥 놀리긴.

에르네스트와 리처드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앙숙이었다.

리처드는 매사 관심 없다는 듯 굴었지만 에르네스트와 다투는 것은 주저하지 않았고 에르네스트는 쭉 자신을 무시하는 영국인 유학생이 싫었다.

둘은 만날 때마다 싸웠고 늘 이런 식이었다.

리처드는 예리하게 에르네스트가 가진 맹점을 찔렀고 에르네스트는 화를 내다가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곤 했다.

에르네스트가 화를 억누르는 것 같자 리처드가 그제서야 픽 웃었다.

“쳤으면 재밌었겠는데.”

“너 정말 그렇게 입방정 털다가 맞으면 안 아프냐?”

“그게 아니라. 뒤를 봐.”

뒤를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타티아나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무표정해 보였지만 조금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에르네스트는 순식간에 머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만약 정말 화를 못 참고 터뜨려 버렸다면 큰일 날 뻔했다.

“……젠장.”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군.”

“닥쳐, 리처드. 네가 뭘 알아?”

“글쎄…….”

리처드가 슬쩍, 에르네스트의 어깨 너머로 타티아나를 보았다.

“너보단 쟤가 더 말이 잘 통하겠다는 것 정도?”

잠시 리처드를 노려보던 에르네스트가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타티아나에게 접근하면 죽여 버린다.”

“놀고 자빠졌네. 너 쟤랑 사귀기라도 해?”

“분명 경고했다.”

리처드가 친하게 군다면 타티아나는 아무 생각 없이 리처드를 대할 것이다.

항상 그랬듯이 음악가로서. 에르네스트는 그 광경을 떠올리기만 해도 혈압이 오르는 듯했다.

빌어먹을, 그 애는 너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서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늘 무방비해 보이는 모습이 항상 걱정이 된다.

* * *

아쉬웠다.

진짜 한 번 제대로 치고받나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에르네스트가 내 눈치를 보더니 슥 자리를 피해 버렸다.

난 속으로 혀를 찼다. 벨도 없긴…… 나였으면 들이받았다. 지금 몸으로는 아무리 용을 써 봐야 택도 없으니 잠자코 있는 것에 불과하지.

에르네스트가 만들겠다고 한 연구회에 대해선 이미 교내에 소문이 쫙 퍼졌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잘되리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벌써 여기저기선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

지금 보니 에르네스트와 가장 사이가 안 좋은 리처드가 뭔가 신호를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만.

난 여러모로 고민이 많았다.

진짜 어찌어찌 승승장구하더라도 머잖아 분명히 문제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마뜩잖았다. 에르네스트는 아직 열네 살이고, 그렇게 수업료를 크게 내기엔 배우는 것이 너무 미미했다.

기껏해야 겸손함 정도 아니겠는가. 겸손함은 굳이 수업료를 내지 않고도 충분히 배울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난 에르네스트가 너무 과격하게 망가지길 바라지 않았다.

만약 추락해야 한다면 그전에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착륙시키고 싶은 게 내 심정이었다.

어쨌든 간에 그 역시 세상에 몇 없는 클래식 연주자 동지 아니겠는가. 그것도 천재적인 실력을 갖춘.

“…….”

진짜 뭣하러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지…….

그냥 내버려 둬도 상관없는 일을 난 또 어떻게든 중간에 개입해 보려 궁리하고 있었다. 왜 이러고 사는지 모르겠다, 진짜.

수업 내내 고민해 봤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굉장히 강적이었다.

좋게 설득하는 건 이미 한계에 다다른 것 같고, 에르네스트와 완전히 갈라서 봐야 되레 내가 그를 컨트롤할 여지를 완전히 잃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나스타샤 때처럼 억지로 연습실 같은 곳에 끌고 가 본들, 에르네스트는 되레 더 좋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심사를 볼 사람들을 앉혀 놓고 조금 더 공식적으로 일을 벌이면…….

궁리할수록 태산이었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 내가 에르네스트보다 월등히 낫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지도 않았다.

뭘 하든 내 의도대로 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냥 다 집어치우고 내 할 일이나 잘 할까 싶다가도…….

“……으휴.”

요즘은 아주 나만 보면 강아지처럼 눈빛부터 달라지는데 매정하게 내쳐 버리기도 참 애매했다.

그렇게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수업을 마치고 아나스타샤, 발렌티나와 점심을 먹었다.

관심 없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아나스타샤와는 달리 발렌티나는 여기저기서 듣는 것이 많은 듯했다.

좋은 이야기도 있겠지만 안 좋은 이야기도 많았으리라. 영 표정이 좋지 않았다.

솔직한 말로 에르네스트가 저 난리를 치는 데에 나도 찔리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식사 후엔 거의 도망치듯 연습실로 향했다.

피아노 앞에 앉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바로 무언가 연주하지 않고 건반을 슬슬 문질러 보았다. 매끈한 상아의 감촉.

“다 필요 없어…….”

중얼거리면서 이전부터 연습하던 라 발스를 다시 시작하려는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난 우뚝 멈춰 섰다. 진짜 누가 두드린 거야?

순간 무언가 예지능력처럼 문 뒤에 누가 있을지 예상되었다.

가서 직접 문을 열어 주지 않고 잠금장치만 해제한 뒤 멀찍이 물러섰다.

“들어오세요.”

아니나 다를까 끼이익 문이 열리며 산만 한 덩치의 낯익은 남학생이 들어왔다.

이젠 너도 내가 여기 틀어박혀 있단 걸 아니까.

“뭐야, 또. 한승우.”

“어…….”

한승우는 조금 주저하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숙제…… 음, 제출…… 테스트.”

“숙제 내기 전에 검사받으러 왔다고?”

맞게 알아들은 건지 뭔지 모르겠다.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달라고 손을 내밀었더니 가방을 뒤적이더니 노트를 꺼냈다. 그러고도 한참을 나에게 못 주고 망설였다.

이 자식은 또 왜 이래?

난 다가가서 노트를 탁 낚아채곤 의자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러시아어 숙제였다.

선생님의 배려로 한승우는 특별히 한참 난이도 낮은 숙제를 받아서 개인적으로 하고 있었다.

대충 노트를 훑어보는데 한승우는 계속 뭐가 그리 불편한지 다소곳하게 앉아서 꾸물거렸다. 나도 보기가 상당히 불편했다.

결국 노트를 탁 접고 물었다.

“아니…… 숙제를 봐 달라니, 안 하던 짓 하는 건 좋은데 자세는 왜 그래?”

“……음. 숙제…… 다시…….”

“이제 와서 문장 만들려 하지 말고. 속 터진다.”

태블릿 컴퓨터를 던져 줬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 말도 적지 않고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한승우.”

턱 밑까지 다가가서 올려다보니 흠칫 놀라며 물러선다. 난 나지막하게 물었다.

“너 뭐 숨기는 거 있지.”

“…….”

굳이 번역기를 통해서 다시 묻진 않았다.

난 지금 해결해야 할 일들이 일단락되기 전까진 한승우를 되도록 조금 멀리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며칠간 조금 차갑게 대한 게 없잖아 있긴 하지만…….

약간 귀찮은데.

“안 되겠어.”

“……?”

“따라 나와.”

난 연습실 밖으로 나가며 손짓했다. 한승우가 어물거리며 쫓아왔다.

우리가 향한 곳은 복도 중간쯤에 있는 휴식 장소였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서 일단 한 잔 먹이고 날 찾아온 진짜 이유가 뭔지 이야기를 시작해 볼 참이었다.

일단 뭐라도 입에 넣으면 뱉는 게 있지 않겠는가?

다행히 지금은 지갑에 동전도 있었다. 처음에 아나스타샤가 나한테 동전도 안 가지고 다닌다고 한 덕에 요즘은 항상 챙겨 다니는…….

“……타티아나?”

에르네스트가 우릴 보곤 얼빠진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여기서 뭐 하냐는 듯 의뭉스럽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음…….

그냥 도망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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