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2화 (32/1,277)

##  32화

“……타티아나.”

에르네스트가 멀거니 날 부르다가 한승우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눈빛이 조금 흔들리다가, 다시 내 쪽으로 향한다.

그가 말했다.

“타티아나. 너 왜 이런 곳에 있어.”

“아, 잠시 이야기할 것이 있어서요.”

“이야기할 것? 그런 게 있을 수가 없는데.”

지금 뭐라는 거야?

영문을 몰라서 바라보자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갑자기 성질이 확 뻗쳤다.

지가 뭔데 이젠 거의 무슨 단속을 하려고 들어?

왜 그러는지야 이해가 간다.

그래서 혹여나 열네 살짜리 심기 거슬릴까 봐 분위기 살살 봐 가면서 비위 맞춰 줬더니…… 열받네, 이거 정말.

짜증스럽게 되쏘았다.

“이야기할 것이 왜 없나요? 같은 반 친구잖아요?”

“친구? 친구라면 그 사이에 우정이 있어야지. 동정이 아니라.”

“뭐라고요?”

어이가 없어서 웃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그가 보기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통찰력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조금 섬뜩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최소한의 기준은 있어야지.”

“최소한의 기준?”

“네 옆의 그놈 같은 아무에게나 친절을 베풀고 다니지 말라는 말이야. 친절의 총량은 한정적이니까.”

“에르네스트.”

“그래.”

“에르네스트도 그 아무나에 속하고 있다는 건 모르겠어요?”

공기가 싸늘하게 굳었다.

“뭐?”

에르네스트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혀 상상도 못 한 지점에 기습을 당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난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진짜 몰랐니? 에르네스트가 작게 입술을 떨었다.

“무슨 말이야? 타티아나.”

“들으신 그대로예요.”

“내가 아무나나 다름없다고?”

“에르네스트가 저와 어떠한 특별한 관계에 있는 건 아니잖아요? 같은 반 친구고, 음악가고.”

난 옆의 한승우를 돌아보았다.

“한승우와 다를 게 뭐죠? 전 모르겠어요.”

“…….”

세기의 천재. 러시아 공로 예술가. 중앙음악학교 수석. 그런 어마어마한 수식어들이 에르네스트의 앞에 붙어 다닌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여전히 그는 학생이다.

“전 그래서 에르네스트의 말마따나 에르네스트에게도 충분히…….”

“타티아나.”

에르네스트는 갑작스레 화를 내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날 응시하며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현실이 그렇잖아요?”

“그래……?”

그때 갑자기 한승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 녀석 왜 이래?

“뭐야, 비켜. 이야기 중이잖아.”

하지만 한승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말해도 요지부동.

“비키라니까?”

비키지 않는 한승우 저편에서 에르네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 □□, 타티아나. 넌 왜 그 유학생에겐 편하게 말하는 거야?”

“…….”

이번엔 내가 움찔했다.

에르네스트의 말대로였다. 난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집에 있는 벨카에게까지 경어를 썼는데 유일하게 한승우에게만은 편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

벨카에게 경어를 쓰는 이유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 그렇다고 설명하면 되지만 한승우의 경우엔 어려웠다.

사실 딱히 이유도 없었다. 그냥 얘한테만큼은 경어를 쓰기 싫었다.

“그러게요.”

“그게 무슨 대답이야? 네가 그랬지. 같은 반 친구라고. 그럼 모두에게 똑같이 편하게 대해.”

“…….”

에르네스트는 그걸 굉장히 고깝게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원한다면 당장 욕이라도 한 사발 퍼부어 주고 편하게 지내면 어떨까 생각하는데, 한승우가 말했다.

“그만하지.”

순간, 난 물론 에르네스트도 벙쪘다.

잠깐만, 지금 니가 낄 상황이 아닌 것 같…….

“푸하하하하!”

에르네스트가 말 그대로 빵 터졌다.

난…… 빌어먹을. 목 뒤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누가 날 지켜 준다는 게 기뻐서? 아니, 창피해서!

왜 낄 데 못 낄 데 분간을 못 하는 거야? 이 미친놈아. 나와!

옆으로 피했더니 자연스럽게 다시 가로막는다. 지금 난 이 등을 맨손으로 어떻게 치워 버릴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이게 대체 뭐야. 잠깐만, 어디 연장 없나. 연장…….

에르네스트는 웃겨 죽겠다는 듯 말했다.

“풉, 그, 그만하래……. 너 진짜 웃긴다, 유학생.”

“…….”

“너 지금 상황 파악 전혀 안 되는 것 같은데. 내가 타티아나에게 뭐라도 할 줄 알았냐?”

그 말엔 나도 조금 움찔했다. 난 에르네스트가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상식인이라는 전제를 놓고 있었지만 사실 꼭 그러리란 법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난 정말 겁 없는 짓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승우의 옆으로 조금 주의 깊게 에르네스트를 살폈다. 그는 낄낄거리며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야, 유학생. 지금 이 자리에서 너보다 내가, 심지어 타티아나 본인보다 더 걱정이 많은 건 알고나 있냐?”

“…….”

“주제 파악하고 너나 비켜. 진짜 밟아 버리기 전에.”

에르네스트가 으르렁거리며 다가왔다. 그 분위기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잠깐만요, 에르네스트.”

“거기 그거 좀 나오라고 해.”

“말 안 듣잖아요.”

“못 알아듣는 거겠지.”

“하…….”

이대로 둘이 싸움이라도 붙는 건가? 갑자기 깝깝해진다.

그냥 둘이 시비가 붙어서 싸우는 것이라면 지지고 볶든 말든 상관없다. 불구경 싸움 구경이 가장 재미있는데 내가 왜 말리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내가 연관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혹시나 교내에 날 두고 남학생 둘이 주먹다짐을 했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도저히 고개를 들고 살 자신이 없었다.

나에겐 아직 지켜야 할 것이 있다. 니들이 뭘 알아, 이 자식들아. 니들 편할 대로 하지 마.

마음 같아선 둘 다 패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저 미친놈들이 둘이 진짜 치고받기라도 한다면 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기다려요. 싸움은 절대 안 돼요.”

“뭐, 왜. 타티아나.”

“그야…….”

“그럼 네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해 줄까?”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에르네스트가 가까이서 한승우를 노려보았다.

“이 자식도 잘 하는 것 있잖아. 피아노.”

“…….”

“그걸로 붙어 볼래?”

* * *

5층에 위치한 한 연습실. 난 방치된 채 멍하니 앉아서 머리를 맞대고 있는 두 남학생을 보고 있었다.

태블릿 컴퓨터를 가운데에 놓고 뭔가 합의 사항을 찾는 것 같은데…… 난 잘 모르겠고.

“……하.”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에르네스트가 날 보고 짜증나게 굴길래 선 넘지 말라고 한마디 했고, 에르네스트가 살짝 열 받아 있는 상태에서 한승우가 날 가로막고 한바탕하나 싶더니 역시나 중앙음악학교 아니랄까 봐 피아노로 겨루자는 말이 나와서 여기까지…….

조금 웃기긴 했다.

참 간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학생들끼리 각자 다루는 악기로 승패를 겨루는 일. 전에 다니던 예술고등학교에서도 자주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이렇게 진지하게 하는 것이 아닌, 놀이에 가까웠다. 할 줄 아는 게 악기 만지는 것밖에 없는 학생들이 재미로 하는 놀이.

“…….”

하지만 에르네스트와 한승우는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태블릿 컴퓨터를 사이에 두고 합의점을 만들고 있었다.

잠시 후,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들었다.

“야.”

“…….”

“이대로 하는 거다. 알겠어?”

“응.”

난 이때다 싶어 끼어들었다.

“에르네스트. 무슨 내용인가요. 저도 알 수 있나요?”

“단순해. 내가 지면 널 속박하지 않고, 저놈이 지면 너한테 접근하지 않기로 했어.”

“…….”

속박? 접근?

이 미친놈들이 진짜 일을 벌였구나.

난 벌떡 일어섰다.

“절대 안 돼요. 제가 무슨 물건인가요? 왜 제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그런 걸 정하시나요?”

“……네가 모르는 그런 게 있어.”

있긴 뭐가 있어! 내가 그렇게 바보로 보여?

진짜 머리끝까지 열이 뻗쳐서 한마디 더 하려는데 에르네스트가 진중한 눈으로 날 돌아보았다.

“그리고 승패 여부는 타티아나 네가 봐 주면 돼.”

“……뭐라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저에게 심사를 맡기신다고요?”

“그래.”

“저 그러면 무조건 에르네스트가 졌다고 할 거예요.”

어이가 없다 보니 진심이 툭 튀어나왔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더니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해 보든가.”

절대 그렇겐 못 하리라는 자신감이 있는 듯했다.

난 다시 한 번 그렇게 하겠다고 되쏘지 못했다.

에르네스트의 말엔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도 있지만, 내가 음악가,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진지하고 진실 된 태도로 임한다는 걸 잘 안다는 듯한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만약 에르네스트가 정말 월등히 뛰어나다면…… 난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판정을 내리고 나면 스스로 내뱉은 것이니 주워섬길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에르네스트가 내게 결정권을 쥐여 준 이유는 단순했다.

진실을 말하고 벗어날 수 없도록 스스로 족쇄를 채우라는 것이다.

“에르네스트.”

“응.”

“지금 굉장히 야비하다는 건 아시나요?”

에르네스트는 반드시 자신이 이기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한승우도 굉장히 뛰어난 연주자이긴 하지만 당장은 에르네스트에게 밀릴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상관없어.”

에르네스트는 밝게 웃으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연주자들 사이에 야비한 게 어디 있어?”

말을 맺기가 무섭게 에르네스트의 손이 건반 위를 달렸다.

별 고민도 않고 그가 고른 곡은 프란츠 리스트의 파가니니 에튀드 3번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이 곡을 부르는 가장 유명한 제목으로는, 라 캄파넬라.

에르네스트는 굳이 러시아 작곡가의 곡을 고집하지 않고 과시적이고 화려한, 말 그대로 겨루기의 목적에 부합한 전투적인 곡을 골랐다.

종소리가 울렸다.

굉장히 직관적이고 낭만적이었다.

수천 개의 작은 종이 울리는 듯한 음색을 엮어서 만들어 낸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곡.

프란츠 리스트가 남긴 수많은 대곡들 중에서도 굉장히 많이 연주되고, 사랑받는 곡이었다.

주제 자체는 단순하고 구조도 변주곡 형태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그림이 어렵진 않았다.

어떻게 보면 단순명쾌한 이 곡이 그렇게나 인기가 높은 이유는 단순했다.

단순히 기교적으로만 봐도 상당히 고난이도의 곡이었기 때문이다.

두 옥타브를 넘나드는 도약, 충분한 훈련 없이는 불가능한 트릴. 그에 따라 요구되는 선천적인 유연함과 타건력.

특히 중반부에 나타나는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사용하는 트릴은 그랜드 피아노가 아닌 일반 업라이트 피아노로 연주하게 되면 번갈아 가며 건반을 누르는 트릴 속도보다 건반이 올라오는 속도가 늦어서 연주하기 힘들어질 정도로 빠르다.

그 정도로 빠르게 트릴을 전개해야 하는 손가락의 훈련도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고.

“…….”

에르네스트는 이 어려운 곡을 매우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풀어 나갔다. 소리가 아주 매끄럽고 고르다.

이렇게 고른 소리를 내는 것에서 그의 연습량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었다.

스크리아빈의 소나타 2번 2악장의 그 빠른 아르페지오를 쉽게 소화해 내는 것을 보고 느끼긴 했지만 에르네스트의 기교는 정말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표현력 또한 월등했다.

분명 프란츠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다. 짤랑이는 수많은 종소리를 묘사한 곡이다. 하지만 이 곡에서 난 또 다른 종소리를 느꼈다.

라흐마니노프에게서나 느낄 수 있던 대성당의 종소리. 그 거대한 울림을 난 간간이 느끼고 있었다.

더욱 웅장하고 낮게 울리는 종소리가 곡 저변에 깔려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나 주장하던 러시아 피아니즘은 그 어디에서나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 정도 실력이 겨우 열네 살.

천재는 천재구나.

그가 귀찮게 굴고, 날 짜증나게 만들고…… 사적인 감정들이 모조리 날아가 버릴 정도로 에르네스트는 대단한 연주를 보여 주었다.

마지막 음을 찍고, 곡을 마무리한 뒤 에르네스트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난 짧게 평했다.

“브라보.”

“감사합니다.”

순수한 내 찬사에 에르네스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보여 줄 것은 다 보여 줬다는 듯 한승우를 도발하거나 하는 일 없이 얌전히 빈 의자를 당겨 가 앉았다.

모든 걸 제쳐 놓고 연주자로만 놓고 보자면 에르네스트는 정말 깔끔하고 이상적인 연주자였다.

다음은 한승우 차례였다.

피아노 앞에 앉은 한승우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연주에 돌입했다.

“……음.”

에르네스트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한승우가 시작한 곡 역시 파가니니 변주곡이었다.

하지만 리스트가 아니었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파가니니 변주곡, 1권.

“…….”

한승우가 왜 이 곡을 택했는진 알 것 같았다.

파가니니 연습곡을 꺼내 든 에르네스트에게 직접적으로 대항하려면 좀 더 과시적이고 화려한 곡이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 아주 정확한 계산이었다. 브람스의 파가니니 변주곡 1권은 어렵기로 이름이 높았다.

기교파 작곡가로 유명한 리스트가 쓴 파가니니 연습곡 6번보다 더.

그냥 같은 리스트의 곡으로 맞붙는 것보단 이게 더 현명한 방향이었다. 제대로 연주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적합한 선곡도 없었다.

제대로 연주할 수만 있다면.

에르네스트는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표정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들으면 들을수록 연습량 부족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한승우는 이 곡에 들어 있는 14개나 되는 바리에이션 중에서도 빠르고 기교적인 것들만 골라서 이어붙이고 있었는데 그게 되레 더 이상하게 들렸다.

단순한 이야기였다. 한승우의 실력은 분명 이 곡을 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쉽게 꺼낼 수 있을 정도로 소화해 내진 못했다.

그뿐이다.

왜 그렇게 마음이 급한 거야?

이 수준으론 그 누구도 납득시키지 못할 것이란 걸 알면서.

11분의 곡을 약 4분 정도로 압축한 한승우는 곡을 마무리하고도 한참 동안이나 의자 위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나도 그에게 잘했다고 찬사를 보내지 못했다.

“…….”

“자.”

에르네스트가 앞으로 나섰다.

“누가 이겼지? 타티아나.”

판정의 시간이 왔다.

싸늘하게 에르네스트를 올려 보았으나 그는 더더욱 기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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