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실력이 전부인 이 세계에서 에르네스트가 자신만만한 강자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 또한 항상 승자와 패자가 나뉘어지는 잔인한 역학에 익숙하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르네스트가 이겼어요.”
“……크.”
이렇다 저렇다 길게 따지지 않고 깔끔하게 승리를 인정해 주자 에르네스트가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 정당하지도, 멋지지도 않은 승부였다는 것은 본인도 아는지라 너무 기뻐하지 않으려는 것 같아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듯했다.
난 어쨌거나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최선을 멋지게 보여 주었고 한승우는 꼴사납게 자폭했을 따름이니.
에르네스트 너머의 한승우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죄지었어?
물론 죄가 많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곡의 수준도 모르고 날 내기거리에 넣고 무리수를 뒀다가 참패했으니. 4박 5일을 붙잡고 욕을 해도 모자라다.
하지만 뭐 어떤가?
살다 보면 질 수도 있는 것이지. 어떻게 매일같이 이기기만 하고 살겠는가.
한승우 역시 오늘 일로 배운 것이 많을 것이다. 그것을 붙잡고 보다 높은 곳으로 향할 수만 있다면 져도 진 것이 아니다.
열네 살이라면 앞으로의 가능성이 훨씬 더 많은 나이였다. 난 한승우가 이 정도에서 그칠 연주자가 아니라 믿는다.
물론 당장의 굴욕은 이겨 내야겠지만.
에르네스트가 한승우에게 으스대며 말했다.
“내기는 내가 이겼으니 지켜라, 한승우.”
“…….”
한승우는 침묵했다. 나 역시 제지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앞으로가 문제네. 에르네스트는 더더욱 기가 살아서 다닐 텐데. 아까 내기 항목에 내가 뭘 해야 한다는 건 없었으니 크게 문제 될 것은…….
“□□□□. 그러니까 스스로 분수를 좀 알았으면 좀 좋아.”
“…….”
“그깟 한국에서 배운 피아노가 여기서 먹힐 리가 없잖아. □□□ □.”
“…….”
순간,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에르네스트.”
“응? 타티아나.”
“저랑도 해요.”
“뭘?”
“내기.”
어느샌가 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한껏 승리감에 취해 있던 에르네스트는 당혹스럽다는 듯 날 쳐다보았다.
“무슨 내기?”
“피아노로 제가 이기면 연구회 해체하세요.”
그때까지만 해도 여유 있던 에르네스트의 태도가 삽시간에 굳어 버렸다. 난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타티아나. 지금 나한테 그걸 요구하려면 너도 거는 게 있어야 하는데.”
“에르네스트가 이기면 뭐든지 해 줄게요.”
“……뭐?”
백지수표를 던지니 갑자기 에르네스트가 황망해했다.
“뭐든지?”
“예.”
“그런 말 막 하는 거 아닌데. 너 정말 후회 안 하겠어?”
“예.”
에르네스트가 머릿속으로 주판을 굴리는 듯 생각에 잠겼다. 환희, 갈등, 유혹.
난 그가 승낙하리라 확신했다. 이렇게까지 미끼를 드리우고 도발했는데 받지 않으면 넌 남자도 아니다, 에르네스트.
승낙해.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잠시 후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해 봐.”
나와 에르네스트 사이에 내기가 성립되었다. 내가 이기면 에르네스트는 연구회를 해체하고 내가 지면 에르네스트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준다. 간단한 내기다.
옛날 생각 난다. 정말.
피아노로 향했다. 고개를 든 한승우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비켜.”
“…….”
꼼짝도 않던 한승우가 이번엔 거의 얼이 빠진 표정으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넌 나중에 두고 보자.
그러니까 일단 내가 하는 걸 잘 봐.
의자를 맞추고 대충 앉은 다음.
건반을 후려갈겼다.
피아노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연습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음의 폭력이 모두를 집어삼켰다.
세르게이 세르게이비치 프로코피에프의 사르카즘sarcasm. 다섯 곡 중 첫 번째 곡.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정서, 웃는 자신을 모욕하고 우는 자신을 경멸하는 그 특유의 주제를 더욱 뚜렷한 표제음악으로 그려 낸 곡이다.
그의 곡에선 또 다른 러시아의 면모를 찾을 수 있었다. 풍자와 유머, 비웃음.
프로코피에프라는 작곡가가 본래 그렇지만 정통적인 클래식과는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형식이나 조성은 어디까지나 전통적이고 또 낭만적인 선율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지만, 그 폭력적인 음향은 현대예술의 그것과 닮아 있다.
악장지시 템페스토소. 폭풍처럼. 마치 타악기처럼 건반을 다뤘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리고 손목이 비명을 지르지만 어떻게든 버텨 냈다.
본 템포보다 더 빠르게 속도를 올려 단시간에 이미지들을 쏟아부었다. 피아노를 부숴 버릴 것처럼 때려 눌렀다.
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문장을 써서 전달한다.
난 이 곡으로 에르네스트를 조롱했다.
누구나 부러워할 천재성과 피를 토하는 노력으로 쌓아 올린 대단한 실력들을 이런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일에 써 버리는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크게 비웃으며 손가락질했다.
환멸과 경멸.
대체 뭘 하는 거야 머저리들아?
스스로가 부끄럽지도 않아?
빈정거리고, 우롱하고, 야유하며 깔보았지만,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비참했다. 불편했다.
내 비웃음은 귓가에 맴돌고, 곧 나 자신을 향해 비웃고 있는 것이 되어 버렸다.
나 또한 똑같은 머저리다.
“…….”
모든 게 허무하고 귀찮다는 듯, 마무리를 하고 손을 떼었다.
2분 정도 되는 짧은 곡인데 워낙 빠르게 쳐서 얼마나 걸렸는진 잘 모르겠다.
라 캄파넬라? 그 리스트의 고난도 대곡?
그야말로 가차 없이 짓밟아 버렸다.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뭉개 버렸다.
“에르네스트.”
무심한 표정으로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자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난 그의 연주자로서의 영혼에까지 상처를 입혔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갑고 냉정했다.
“누가 이겼죠?”
“…….”
에르네스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전 그가 나에게 했던 것과 같이, 난 그에게 결정권을 넘겼다.
이건 내가 에르네스트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열네 살에 불과한 에르네스트에겐 과한 부담일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승부욕 강한 그에겐 엄청난 유혹이었다.
눈 딱 감고 내가 별로였다고 말하기만 한다면 그는 모든 게 해결된다. 연구회는 존속되고 날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난 물론 그의 말에 따라 주겠지만, 아마 지금까지 대하던 방식과는 다르게 그를 대하게 될 것이다.
에르네스트가 그걸 감수하겠다면…… 내 사람 보는 눈이 틀린 것이겠지. 그렇게 되면 그 또한 내가 감수할 일이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결정해, 에르네스트. 정말 이게 마지막 기회야.
넌 너무 건방지고 안하무인이고, 그래서 내가 발끈해서 나서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 생각도 없이 무턱대고 위험부담을 끌어안고 이렇게까지 하진 않아.
널 믿기 때문에.
네가 날 명예를 아는 음악가로 인정했듯이.
너 또한 그리할 거라 믿기에.
그렇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고 믿기에.
“…….”
엄청나게 고뇌하고 있는 것이 눈에 선했다. 조금 딱할 정도로.
에르네스트는 날 봤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고개를 돌리고 중얼중얼거리더니, 다시 날 보고 말했다.
“네가…… 이겼어. 타티아나.”
거짓말 한 번 하면 모든 게 손에 들어오는데도 불구하고,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승복했다.
정말 말하기 싫다는 듯, 스스로 말하면서도 대체 자기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씹어뱉듯 말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간에, 에르네스트는 음악가였다. 내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난 그것이 너무 반갑고 기뻤다.
“에르네스트.”
“……그래.”
“제가 제 비밀을 하나 가르쳐 드릴게요.”
“……뭐?”
무슨 나라 잃은 사람처럼 처참하게 맥이 빠져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결코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동정을 건네는 기분은 아니다. 그에게 조금 더 신뢰를 가질 수 있었기에 건네는, 신뢰의 행위였다.
나는 약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처음으로 진실을 고했다.
“제가 이 학교에 오기 전에 누구에게 피아노를 배웠는지 혹시 궁금하지 않으세요?”
“누군진 몰라도 □□□□ 저명한 선생일…….”
“전 한국인 교수에게 사사했어요.”
“……뭐?”
에르네스트가 처음 보는 얼굴로 펄쩍 뛰었다.
그가 평소 생각하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거, 거짓말하지 마, 타티아나. 네가 한국인 교수에게 배웠다고?”
“예. 맞아요.”
“그 말을 믿으라고? 네가 만드는 음악은 결코 러시아인이 아닌 다른 외국인이 가르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닌…….”
“어째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에르네스트.”
난 살풋 웃으며, 다시 피아노로 몸을 돌려 건반을 눌렀다. 즉흥적인 선율을 지어 나가며 노래하듯 말했다.
“전 폴란드의 리듬도, 독일의 음질도, 러시아의 음색도 모두 한국인 교수에게 사사했어요. 물론 지금은 거의 다 잃어버렸지만…….”
“잃어버렸다고……?”
“아, 그건 아직 비밀이에요. 어쨌든.”
실수했다. 말을 돌리기 위해 되는대로 이어 나가던 즉흥곡을 순간 이조해서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2번의 한 부분을 빠르게 쳐 내고, 다시 말했다.
“저는 에르네스트를 응원해요. 저 역시 러시아인이고, 러시아의 음악과 정서를 좋아하니까.”
“…….”
“하지만 너무 외길만 보고 걷진 말아 주세요.”
에르네스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내가 한 말의 반절이나마 이해했다면 무언가 바뀌지 않을까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이 애들은 충분히 바뀔 여지가 있었으니까.
난 의자에서 일어나서 걸어 나오면서, 한승우를 일견했다. 그는 아직도 죄책감과 창피함이 혼재된 표정으로 나와 눈을 못 마주치고 있었다.
일단 지금 말을 걸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지금 같을 땐 차라리 혼자 있고 싶겠지.
난 그대로 연습실을 나와 문을 닫았다.
“아아아아…….”
그대로 안도의 한숨을 내뿜으며 스르르 주저앉았다.
미쳤지, 미쳤어. 미쳐 버린 거야, 드디어.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에르네스트가 스스로를 속이지 않을 것이란 전제하에 한 짓이었지만 아주 질 나쁜 도박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안해…….”
순간 머리에 피가 올라 저지른 짓이긴 했지만, 정말 악랄하고 욕먹을 짓이었다.
피아노로 꺾어 놓은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까지 이른 과정과, 내가 내건 조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스스로 모든 것을 인정하고 포기하게 만든 것까지. 그 모든 과정이 너무 심했다.
더군다나 다른 고난도의 대곡도 아니고 프로코피에프의 사르카즘으로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를 꺾어 버린 것이 아닌가?
두 곡 사이엔 엄청난 난이도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르네스트를 하여금 내가 보여 준 사르카즘에 위압당하고, 졌다고 시인할 수밖에 없게 짓눌렀다.
에르네스트는 정말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물론 지금 에르네스트에겐 어느 정도 충격 요법이 필요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가 충분히 납득할 만큼 거대한 대곡을 준비해서 멋있게 맞붙는, 좋은 그림을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이 좁은 연습실에서 도발해서 유혹하고 조롱하며 비웃은 다음, 깨뜨려 버렸다.
“…….”
어쨌든 끝났다.
비록 내가 에르네스트에게 한 짓은 최악이었지만, 더 길게 안 끌고 이 정도에서 정리한 게 차라리 다행이라 할 수도 있었다.
이제 에르네스트는 연구회를 해체할 테고 그에 반발하던 학생들은 좀 더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서기 전에 그만두겠지.
에르네스트는 지금처럼 중앙음악학교의 자랑이자 러시아 피아니즘을 추구하는 연주자로 그 위치를 공고히 하면 될 일이다. 그 실력은 거짓이 아니었으니.
한승우? 나에게 뭔가 이상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난 그 애가 러시아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피아노나 열심히 연습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난 한승우가 나에게 무언가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간 고민했던 일들이 일단락되고 나자 힘이 쭉 빠졌다.
“으…….”
비척거리며 휴게소 쪽으로 갔다. 동전을 넣고, 음료수를 하나 뽑아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마음 같아선 집에 가서 쉬고 싶었지만 아직 2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음료수를 홀짝였다. 이것만 다 마시고 다시 연습실에 가서 라 발스나 치다가…….
“……타티아나?”
조금 늘어져 있던 자세를 후다닥 바로잡았다. 앗, 너무 풀어져 있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쳐다보니,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손가락에 건 스트랩을 빙빙 돌리며 물었다.
“또 달리기라도 했어? 왜 축 늘어져 있어?”
“아나스타샤. 전 무슨 일이 있어도 달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전 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건 또 무슨 소린지…… 어쨌든.”
아나스타샤가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뭔진 몰라도 재미있는 거라면 가르쳐 줘.”
그녀는 내가 힘없이 늘어져서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꼴을 보고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는 것 같다고 직감한 것 같았다. 거의 동물적인 감각이었다.
난 조금 갈등했지만, 숨길 일도 아니었고 해서 바른대로 말했다.
“에르네스트가 연구회를 해체할 거예요.”
“……뭐?”
아무리 아나스타샤라도 조금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럴 리가?”
“그렇게 됐어요.”
“말도 안 돼. 타티아나, 네가 한 거야?”
“그렇게 되겠네요.”
“세상에, 그 쇠고집을 어떻게 꺾었대?”
난 조금 웃으며 말했다.
“그만큼 프라이드가 높은 사람이니까요, 에르네스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