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4화 (34/1,277)

##  34화

옆에 앉은 아나스타샤가 한껏 들떠서 조잘거렸다. 에르네스트를 오래 봐 온 그녀이니만큼 할 말도 많은 듯했다.

“난 걔가 4학년 이후로 누구한테 졌다고 말하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어.”

“4학년이면…… 10살 때부터요?”

“응. 그때부터 유명했거든.”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가 혹시 분해서 울지는 않았냐며 신이 나서 이것저것 물었다.

도대체 아나스타샤의 안에서 에르네스트는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 건지…….

그렇게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날 보며 배시시 웃었다.

“어쨌든 이제 목줄 채웠으니 걱정 없겠네.”

“목……줄요?”

“그렇잖아? 아니야?”

“…….”

난 조금 떨떠름했다.

아나스타샤는 앞으로도 에르네스트가 이렇게 폭주하는 일이 있으면 내가 나서서 목줄을 잡아당겨 주리라 생각하나 본데…….

그럴 생각도 없었을뿐더러, 앞으로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에르네스트의 라 캄파넬라.

딱 잘라 말해서 지금 나보다 낫다.

내가 지금 구현해 낼 수 있는 라 캄파넬라로 에르네스트와 승부를 봤다면 필패했을 것이다.

내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내가 이런 결투에 능숙했기 때문이다.

연주회가 아닌 대결이라는 판단이 들자마자, 내 본능은 머릿속에 있는 10여 년 앞선 경험과 넓은 레퍼토리 안에서 프로코피에프의 사르카즘을 뽑아내었다.

일반 청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블라인드 컴페티션이었다면 아마 더 화려하고 고난도의 대곡을 내보여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짓눌러야 할 대상은 단 한 명.

아주 간단했다. 귀가 멀고 사고가 마비될 정도의 빠른 속도로, 폭력적으로 이미지와 메시지를 쏟아부어서 심리적 압박을 주고 밀어붙였다.

심사를 볼 사람이 없는 이런 일 대 일 대결은 스스로 졌다고 생각하는 쪽이 정말 패배하게 된다.

이런 일 대 일 대결의 본질을 알고 있는 내가 그에게 패배를 강압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었다.

아무리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아도 새끼손가락만 잡고 꺾으면 비명 소리를 이끌어 낼 수 있듯, 난 그렇게 자만하고 있던 에르네스트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이건 잘한 짓이 아니었다.

보다 정정당당히 그를 상대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서든 내가 본래 갖고 있던 음악을 되찾아야만 했다.

전부는 바라지도 않으니 단 한 곡이라도…….

“타티아나.”

“예, 예?”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아나스타샤는 태평하게 이런 소릴 했다.

“에르네스트에게 제대로 목줄도 채웠겠다, 이제 전교에 네 적수가 없는 거네.”

“……?”

“그렇잖아. 내일부턴 에르네스트 대신 아마 네가…….”

“아나스타샤!”

난 위기감을 느끼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왜 이러냐는 듯 날 내려다보았다.

“이 이야기 절대 아무한테도 하지 말아 주세요.”

“뭐? 왜?”

아무 생각 없이 말해 버렸지만 소문이 난다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8학년 편입생이 천하의 에르네스트를 피아노로 꺾어 버렸다는 소문은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난 더더욱 가까이 다가가며 부탁했다.

“아나스타샤. 전 조용히 지내고 싶어요.”

“조용히는 무슨, 타티아나 네가 눈에 안 띌 리가…….”

“제발. 부탁이에요.”

“없…….”

간절히 바라보자 아나스타샤가 목을 뒤로 쭉 뺐다. 물러서고 싶은 모양인데 내가 어깨를 틀어쥐고 있으니 꼼짝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잠시 후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알았어.”

“고마워요!”

“그런데 타티아나. 네 부탁을 들어줬으니 너도 이제 내 부탁을 들어줘.”

“……?”

그래야 하는 거였어요?

뭐라고 항변하지도 못하게 아나스타샤가 바짝 얼굴을 붙이며 말했다.

“피아노 쳐 줘.”

“……예?”

그길로 난 꼼짝도 못하고 아나스타샤의 손에 연습실로 끌려갔다.

이것 쳐 달라, 저것 쳐 달라, 이건 어떻게 하느냐, 저건 어떻게 하느냐……. 궁금한 것도 많고 열정도 넘치는 아나스타샤에게 한참을 시달리다가 풀려난 것은 2시간이 지나서였다.

죽을 것 같다 진짜…….

* * *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시끌시끌한 소리에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뭐야?

“에르네스트! 네가 이렇게 갑자기 그만둬 버리면 우린 뭐가 되는데?”

“…….”

“잘난 듯이 무슨 오디션까지 열더니, 책임감도 없냐?”

“…….”

교실 한편에 에르네스트가 앉아 있었고 그 주변으로 학생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 사이사이 에르네스트를 향한 성토가 섞여 있었다. 한눈에 봐도 무슨 일인지 알 만했다.

에르네스트가 갑자기 연구회를 해체하고 다 없던 일로 하겠다고 하자 그를 지지하던 학생들이 찾아온 것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광경이지만 짜증을 내며 따지는 소리가 상당히 살벌하게 들렸다. 만에 하나 더 심한 상황으로 번지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가 만든 일이고 그가 감수할 일이었지만, 난 약간의 책임감을 느끼며 문가에서 그들을 살폈다.

“뭐라고 말 좀 하지?”

“…….”

학생들은 그렇게나 자신만만하게 시작했던 일을 제대로 해 보지도 않고 그만두어 버린 에르네스트가 아무 설명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더욱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때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뭐 어떤 제스처를 취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어서 가만 바라보는데, 그가 피식 웃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것만으로도 난 알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내게 진 것이 창피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 사이에 내기가 있었고 거기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말한다면 저 학생들의 시선과 관심이 한순간에 내 쪽으로 쏠릴 것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 입을 다무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문가에 서서 어떻게 할지 조금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옆으로 휙 지나쳐 갔다.

“비켜 줄래?”

“……아.”

리처드였다.

그는 사람들이 모여 있든 말든 별 신경도 안 쓴다는 듯 태연하게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진을 치고 있던 학생들이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쟤 누구야? 리처드잖아. 몰라? 우리 학교에 딱 하나 있는 영국 유학생. 쟤 에르네스트랑 사이 안 좋지? 응. 재작년엔가 거의 서로 죽일 뻔했다던데.

수군거림이 조금 있었으나 리처드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에르네스트 쪽으로 향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팽팽해졌다.

모두가 조금 더 물러섰다. 학생들은 리처드가 에르네스트에게 가서 직접적으로 비웃기라도 하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기세 좋게 발족한 연구회로 뭔가 제대로 해 보지도 않고 해체해 버렸으니 충분히 놀릴 만했다.

“흐암.”

하지만 리처드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대충 에르네스트로부터 두세 칸 정도 떨어진 곳에 뻔뻔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곤 하품까지 쩍 하더니 스마트폰을 꺼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의아함이 번졌다. 쟤 왜 저래? 에르네스트랑 한바탕하는 거 아니었어? 이상하네. 다시 수군거림이 조금 일더니, 쭈뼛거리며 몇몇이 리처드에게 다가가려다가 포기하고 가 버렸다.

리처드가 앉은 위치가 절묘하게 다시 학생들을 뭉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분위기가 어색하게 변하더니 결국 학생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떠났다.

음…….

리처드가 에르네스트를 도와줬다고 봐도 되겠지?

생각보다 쉽게 주변이 정리되었다. 난 그제야 한숨 돌리고 뒷자리에 앉았다.

교실이 조용해지자 에르네스트가 고개만 돌려 리처드를 보고 몇 마디 했다.

너무 멀어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리처드도 시큰둥하게 몇 마디 답했다.

여전히 티격태격하는 것 같았으나 그 모습이 그리 어색하게 보이지 않아서, 난 조금 웃었다.

* * *

우울했다.

수업을 마치고, 식사를 하고. 5층에 있는 연습실로 향했다.

연습실 문을 잠그고, 비로소 혼자가 되자마자 난 넋두리를 내뱉을 수 있었다.

“사바세계는 최악이구나…….”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비틀비틀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되는대로 건반을 누르자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가 연구회를 해체한 뒤의 여파는 생각보다 내 신경을 거슬렀다.

그냥 에르네스트가 시작해서 끝내 버린 일순간의 변덕으로 치부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보다 깊은 내부 사정이 있었으리라 짐작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학생들도 많았던 것이다.

그 핵심엔 어김없이 내가 등장했다.

잠시 에르네스트를 따라다니며 지켜보는 사이 다른 학생들에게 얼굴을 너무 많이 비친 탓이었다.

내 이름이 나오자 더더욱 극적인 스토리가 붙었다.

내가 에르네스트와 싸웠다느니, 협박을 했다느니, 보기와 다르게 한 성깔 한다느니, 귀찮게 굴었다느니, 심지어 사귀었다가 헤어졌다느니 별의별 소문이 다 도는 듯했다.

발렌티나는 그 소문을 몰고 와선 사실이냐며 거의 내 멱살을 쥘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기가 막혀 화도 나지 않았다.

발렌티나에게 죄다 헛소문이라고 말하고, 사정을 아는 아나스타샤도 내가 에르네스트를 싫어했으면 싫어했지 좋아할 일은 없을 거라고 설득하자 그제야 물러나 주었지만…… 난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다.

다행히 사귀었다가 헤어졌느니 뭐니 하는 제일 재수 없는 소문은 쉽게 사그라들었다.

한 마디도 안 하고 침묵하던 에르네스트가 직접 나서서 그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소문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났을 텐데 에르네스트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은 듯했다.

그 점은 높게 산다, 에르네스트. 널 정말 다시 보게 되는구나.

하지만 연구회를 사이에 두고 의견 차로 싸웠다는 소문은 충분히 근거가 되기에 충분했다.

에르네스트도 그 질문엔 맞다 아니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실 피아노로 싸운 건 맞기 때문에 그리 틀린 소문은 아니긴 하지만…… 거슬렸다.

“…….”

한숨을 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너희들 마음대로 생각하렴.

난 그렇게 방관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괜히 또 무언가 대응하려다가 잘못하면 조용히 살고자 하는 내 작은 소망은 정말 산산조각 날 것이다.

귀찮다…….

애초에 난 그리 사회성이 좋지도 않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오해를 안 사도록 이미지를 관리하는 것도 힘겨워했다.

쓸데없는 소문이 돌자 다 귀찮았다. 진심으로.

“후…….”

가만 떠올려 보면 난 원래 이런 인간이었다.

피아노 말고는 별로 중요한 것도 없고, 신경 쓰는 것도 없는 그런 재미없는 인간.

인간관계고 자기 관리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별로 없었다.

음악 이야기 외의 사적인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해 본 적은 극히 드물었고, 맨날 피아노랑 씨름하는 게 내 인생이자 행복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오만 곳에 오지랖을 부리고 다니는 이상한 여자애가 되어 버렸다.

혼자 있다고 외롭거나 하진 않았지만, 예전처럼 누가 있다고 불편한 것도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같이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것도 이전보다 쉬웠다. 가끔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일을 벌이기도 했다.

내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어처구니없을 때가 많았다.

잘 모르겠다.

몸이 바뀌었으니 내가 점점 변해 가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와서 고집을 세워 봐야 의미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난 변화를 편하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또 그 변화의 방향이 사교적인 쪽이라면,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라고 기쁘게 여길 수도 있는 것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스스로 환영할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내게 그렇게 여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

라 발스를 다시 시작했다. 요즘 한창 연습 중인데 마음에 안 드는 구간이 많았다.

난 피아노에 집중해야 했다.

별 같잖은 소문들이야 내버려 두면 알아서 가라앉을 것이다.

그 후로 학생들이 날 보는 눈들이 조금 달라지긴 하겠지만, 내 알 바 아니지 않은가?

남들이 뭐라 하든 신경 끄고 난 내 음악을 되찾는 데에나 집중하면 된다.

그건 내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일이었다.

자신 있어야만 하는 일이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