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5화 (35/1,277)

##  35화

오늘은 미하일 선생님과 레슨이 있는 날이었다.

미하일 선생님의 레슨실 문을 두드리기 직전, 조금 망설였다.

오늘은 선생님이 과제곡으로 내 준 베토벤 소나타가 아닌 라 발스의 레슨을 부탁드려 볼 생각이었다.

연습하라는 골라 준 곡은 연습하지 않고 난데없이 내 마음대로 라 발스 같은 대곡을 덜컥 들이미는 건, 사실 지도 선생님에 대한 실례라고 할 수 있었다.

미하일 선생님에게도 그 나름대로 교수법이라는 게 있고 커리큘럼이라는 것이 있다.

차근차근 의도하는 대로 학생이 과제곡에 집중해서 따라오길 바라실 것이다.

하지만 난 라 발스에서 한 소절 정도는 얻어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을 느꼈다.

마치 쇼팽 소나타에서 운 좋게 한 악절을 되찾은 것처럼.

내게 있어선 이 또한 중요한 일이었다. 때문에 억지를 조금 쓰는 한이 있더라도 미하일 선생님에게 먼저 말씀을 드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레슨실 문을 작게 노크했다.

“선생님. 타티아나입니다.”

“들어와라.”

미하일 선생님은 언제나처럼 웃으며 날 맞아 주었다.

“안녕하세요.”

“앉거라.”

미하일 선생님이 레슨실 구석에 비치되어 있는 전기포트에 물을 올렸다.

난 바로 앉지 않고 자연스레 그 옆에 가서 티포트와 잔을 꺼내 놓았다. 찻잎도 꺼내서 준비했다. 미하일 선생님은 허브차를 좋아하신다.

선생님은 슬쩍 날 보더니 옅게 웃었다.

“앉으라니까.”

“도와드릴게요.”

“원 참…….”

물이 끓는 사이, 누군가 먼저 화두를 던지기 전의 정적이 있었다.

이때가 기회다 싶어 오늘은 라 발스를 레슨해 주실 수 있나 물어보려는데, 미하일 선생님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근래 아주 유명 인사가 다 되었더구나.”

“……예?”

선생님은 장난스레 웃었다.

“에르네스트와 싸웠다는 말이 들리던데.”

“싸, 싸우다뇨. 그럴 리가요.”

일단 모르쇠로 대답했더니 미하일 선생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에르네스트는 워낙에 자존심이 강해서 다그치고 싸워서 설득할 수 있는 애가 아니니까. 네가 좋은 말로 잘 설득했겠지. 어떻게 했는진 모르겠지만, 그건 정말 고맙구나, 타티아나.”

“……?”

싸워서 설득할 수 없는 애를 좋은 말로 설득할 순 있어요? 무슨 착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 일단 모른 척했다.

전기포트에 올려 둔 물이 다 끓었다.

찻잔과 티포트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데우고, 물을 버린 다음 찻잎을 넣고 다시 물을 부었다. 찻잎이 우러나는 사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나도 미하일 선생님도 한 마디 말도 없었지만, 난 약속이라도 한 듯 2분 남짓의 쇼팽 마주르카를 한 곡 연주했다.

가만 서서 시간을 재고 있으면 심심하지 않은가. 게다가 선생님은 내 쇼팽 중에서도 마주르카를 특히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이럴 때 한 곡씩 쳐 드리면 감상하시는 게 눈에 보여서 연주하는 나도 즐거워진다.

짤막한 한 곡을 치고 내려오자 미하일 선생님이 웃으며 칭찬했다.

“더 좋아졌구나.”

“감사합니다.”

감사를 표하고 찻물이 다 우러난 티포트을 들어 각자 잔 위에 망을 놓고 차를 따랐다. 한 모금 마셨더니 음…… 그냥 허브차다.

집에 있을 때도 나제즈다가 종종 카페인이 없는 허브차류를 타주긴 하지만, 솔직히 차 맛은 정말 잘 모르겠다.

짧은 티타임도 지나가고, 이젠 정말 레슨을 할 시간이었다.

“타티아나. 그러면 저번에 과제로 준 곡은 다 읽어 왔는지 한번 볼까.”

“선생님.”

무조건 지금 말해야겠다 싶어서 말을 꺼냈다.

“제가 개인적으로 연습하고 싶은 곡이 있는데 혹시…… 봐 주실 수 있으신가요.”

“당연하지.”

미하일 선생님은 정말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왜 자신의 지도에 따라오지 않느냐고 야단을 치시진 않을까 조금이나마 걱정했던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허락이 떨어졌는데도 머뭇거리자 미하일 선생님이 손짓했다.

“물론 내가 시켰던 건 제대로 해 왔겠지?”

“예.”

“네가 다 했다면 한 것이겠지. 그래서 개인적으로 하고 싶다는 곡은 무슨 곡이냐?”

“…….”

미하일 선생님은 참 좋은 선생님이긴 한데…… 이 정도로 스스럼없이 날 믿는 모습을 보일 때면 조금 맹목적인 게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어쨌든 라 발스의 악보를 내밀며 말했다.

“라벨의 라 발스예요.”

“……타티아나. 너 이런 곡도 칠 수 있느냐?”

기가 막히기도 하시겠지. 객관적으로 봐도 라 발스는 열네 살짜리가 치기엔 무리인 대곡이었다.

기교적 난이도도 필요로 하는 표현력도 초고난도에 속했다. 음대 졸업 연주회에서도 가뭄에 콩 나듯 가끔 보이는 곡이었다.

그걸 열네 살짜리가 하겠다고 덤비고 있으니 조금 우습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하일 선생님은 전혀 웃지 않고 진지하게 물었다.

“왜 라 발스지?”

“…….”

왜냐고 물으신다면 할 말이 없었다.

그야말로 내 미련이나 다름없는 곡이기 때문이었다.

사고를 당하기 직전, 연주회에 올리기 위해 준비했던 프로그램 안에 라 발스 또한 있었다.

결국 무대에서 보이진 못했지만 마지막까지 연습했던 곡이니 머리에 남은 것도 더 많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욕심.

……멍청한 소리인 것 잘 안다. 난 항상 바보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필사적이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이해를 구할 수 있을까.

아무에게도 못 한다.

대답하지 않고 침묵하자 미하일 선생님이 잠시 날 보다가, 라 발스 악보를 펼쳐 몇 장 넘겼다.

미하일 선생님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간 네 손을 지나간 악보들이 늘 그랬듯 아무 표시도, 낙서도 되어 있지 않구나. 마치 악보에 쓰여진 지시 외에 다른 모든 것은 네 머릿속에 담겨 있다는 듯이…….”

“…….”

난 조금 놀랐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이상하게 비칠 여지가 충분했다.

선생님이 안경을 고쳐 썼다.

“하나 묻겠는데, 타티아나.”

“예.”

“혹시, 항상 날 시험하고 있는 것이냐?”

“……!”

그야말로 기절할 듯 놀라서 도리질 쳤다.

“아뇨! 아니요, 왜 그런 말씀을…….”

“내가 보기엔 그렇게 보여서 말이다. 그간 내가 네 지도 선생으로서 해 준 것도 별로 없긴 하다만…….”

“선생님.”

“지금 네가 가져온 이 라 발스, 연주를 듣고 레슨을 해 준다 한들, 이번에도 내가 짚어 주는 몇 가지는 널 만족시키지 못할 테지. 그렇지 않느냐?”

미하일 선생님은 계속해서 악보를 휘휘 넘기며 말했다.

“난 늘 네가 원하는 부분을 짚어 주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이었다.

이런 대곡을 준비하는 걸 보면 급한 것 같다가도, 연주회를 미루는 것을 보면 어딘가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말해 난 널 잘 모르겠다, 타티아나.”

미하일 선생님의 지도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선생님은 열네 살의 내 몸이, 내 손이 가진 모든 포텐셜을 최대한으로 끌어낼 수 있도록 잘 지도해 주고 계셨다.

난 그저 내가 만들 수 있는 음악이 지금은 이 정도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을 뿐이다.

설명도 제대로 하지 못할 거면서 항상 더 원하고 있었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선생님…… 저…….”

“미안하구나, 타티아나. 이상한 소리를 해서.”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괜찮다. 라 발스 레슨을 원한다고 그랬지. 해 보거라. 봐 주마.”

“…….”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 가운데에서 난 최선을 다해 라 발스를 연주했고 미하일 선생님 또한 최선을 다해 레슨을 해 주셨다.

하지만 난 선생님이 말한,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새삼 느끼고 있었다.

선생님이 말하는 레슨 포인트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서 핀트가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내 머릿속에 든 같잖은 것들을 지워 버리고 미하일 선생님의 말을 우선시할 수도 있었지만, 난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건 내가 미하일 선생님에게 갖는 존경심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맥이 빠져서 레슨실에서 나왔다.

복도를 지나치는데 복도 중앙 휴게소에 앉아 있던 아나스타샤가 날 기다렸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자 아나스타샤가 다가와서 말했다.

“레슨 다 끝났지?”

“예.”

“앞으로 할 일 있어?”

“음…….”

나한테 약속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없다고 대답하려는 찰나 아나스타샤가 방긋 웃으며 박수를 짝 쳤다.

“있잖아. 그러면 오늘 안드레이 블라디미로비치 가브릴로프 신보 나온 거 사러 가자. 오늘 막 들어왔다고 하더라고.”

아나스타샤는 새 음반을 사러 가자고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리하겠다고 말했을 텐데, 오늘 내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난 그걸 막을 힘이 없었다.

“오늘 제가 좀 피곤해서…… 다음에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아나스타샤.”

“그래……?”

내 거절에 아나스타샤가 약간 굳었다가, 곧 밝게 웃으며 받아 주었다.

“알았어. 피곤해 보이네.”

“고마워요.”

그렇게 아나스타샤와 곧바로 헤어져서도 난 한참 동안이나 내가 왜 곧바로 거절했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

피곤하다고? 피곤하긴 했다. 하지만 정말 몇 안 되는 친구가 제안한 것을 바로 거절할 정도로 피곤한 것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를 따라가서 같이 음반도 사고 쇼핑도 하는 것이 스트레스를 푸는 데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대체 왜 거절한 거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별관의 연습실에 가지도 않고 방에 틀어박혔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레슨을 해 주셨던 미하일 선생님의 목소리가 자꾸 귓가에 어른거렸다.

빈 왈츠의 리듬이 정확하구나 하지만 조금 더 늘어뜨리는 것도 좋겠다.

이 구간에서 크레센도와 디크레센도가 교차하도록 연주하는 건 어디서 배웠는진 몰라도 정확한 해석이구나.

음, 그 부분은 괜찮다.

안 괜찮아요. 괜찮으면 안 돼요.

이게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이란 말인가. 난 내가 원하는 답을 미리 생각해 놓고 그걸 선생님이 말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내 음악. 되찾아야 한다고 늘 주장하고 추구하는 소리. 그것을 구성하는 근간이 뭘까 항상 생각해 왔다.

아직까지 기억은 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엔 단순히 기술이 부족해서, 이 몸이 약하고 재능이 없어서 못하고 있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이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열네 살에 나는 라 발스를 어렵사리 칠 수 있는 수준까지 와 있었다. 삐걱거리고, 위태롭지만. 그래도 최악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보다 난이도가 낮은 곡들, 기교적으론 아무 걸림이 없는 곡들을 연주할 땐 내 머릿속에 있는 이 음악이 그대로 구현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아무리 같은 방법으로, 같은 느낌으로 건반을 눌러도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음이 생겨났다.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다.

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겨우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처음 봤을 때의 그 하늘하늘한 느낌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피아노를 치는 용도로 개조하는 데에 총력을 다했다. 손마디가 조금 굵어진 것이 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내 몸은 내 마음을 변화시키고 있었지만 내 마음 역시 몸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면 되잖아? 물론 손가락이 갑자기 길어진다든지, 인대가 강해진다든지 하는 일은 없겠지만.

피아니스트인 타티아나로 살 자신 정도는 충분히 있었다.

늘 불만족스럽고 청중들을 속이는 것이 될지언정, 아무도 모른다면 그게 딱히 죄가 되지는 않지 않겠는가?

벌써 몇 번이나 했던 생각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를 악물고 헛소리 말라고 스스로에게 고함을 질렀다.

한 곡도 안 돼?

난 타티아나의 모든 것, 심지어 내 잘못도 아닌 과거까지 끌어안고 가기로 했어.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무슨 일이 있어도 저항하지 않고 그렇게 살기로 했어.

그렇다면 최소한 음악만큼은 내 것이면 안 돼?

전부가 안 된다면 많이 바라지도 않아. 내 미련을 증명할 수 있는 단 한 곡이면 돼.

이전에 손에 쥐고 있던 내 음악들은 그 손이 망가지면서 모두 훨훨 날아가 버렸지만, 다시 한 곡이라도 되찾으려고 하면 안 되는 거야?

타티아나의 과거를 모두가 없던 일로 해 버리는 것이 그녀를 완전히 지워 버리는 잔인한 행위인 것처럼, 나 역시 내 음악을 하나도 되찾지 못하면 내가 완전히 없어져 버리는 것과 똑같아.

아직도, 반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이런 생각을 하곤 해.

늘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찾곤 있지만, 이미 내 기회는 끝났고, 지금도 내 삶을 허락받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저 타티아나의 삶을 이어 나가도록 내 영혼이 대리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그 역할과 의무에나 충실해야 한다고.

하지만, 정말 한 곡도 안 돼?

“……콜록.”

왜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허락을 얻어야 하는 것처럼 애원하고 있는 거야.

대체 누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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