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난 내가 커피 한 잔만 마셔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체질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
자꾸만 심장이 쿵쿵 뛰고, 현기증이 난다.
왜 집에 있을 때 늘 나제즈다가 홍차도 잘 못 마시게 하고 캐모마일같이 카페인이 없는 허브차만 타 주었는지 이제 알겠다.
카페인이 든 것을 마시면 이렇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새삼 여러 감정이 든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그간 날 보호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하필이면 기호품도 제대로 못 즐기는 몸인 것에 대한 억울함.
심각한 수준이 아니라면 이 분위기를 깨지 않고 즐기고 싶었지만, 끔찍할 정도로 난 카페인에 취약했다.
초콜릿에 든 카페인만으로도 심장이 더 거세게 뛰는 것 같았다.
내 상태가 나빠 보였는지 아나스타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타티아나. 괜찮아?”
“아, 괜찮아요!”
어쩐지 목소리도 조금 더 커진 것 같다. 난 그녀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말하며 다른 즐거운 이야기들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에도 무언가 뭉게뭉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어지러웠다. 현기증과 더불어 속도 조금 안 좋았다.
콜라를 마시면 속이 괜찮아질 것 같아서 컵에 콜라를 따라서 한 모금 마셨다.
“……윽.”
탄산에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아서 난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신음성을 냈다.
난 탄산도 제대로 못 마시는 거야? 술 담배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커피와 콜라를 마실 뿐인데도 몸이 힘들어하니 미칠 것 같다.
오기가 생겨서 인상을 쓰고, 눈물을 글썽여 가며 그 아픔을 참아 내고 나니 비로소 속이 조금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 * *
아나스타샤는 걱정 반 장난기 반으로 유심히 타티아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엔 거의 환자처럼 창백한 얼굴에 핏기가 도니 비로소 좀 사람같이 보이긴 했다.
조금 난감하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이렇게까지 커피에 약할 줄은 미처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타티아나는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더 카페인에 약했다.
겨우 커피 반 잔에 초콜릿 두어 개를 먹었을 뿐인데도 정신을 못 차렸다. 이렇게 약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타티아나를 거의 취한 사람처럼 만들게 한 것은 콜라였다.
콜라를 마시고 취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런 건 다 분위기에 취해서 하는 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
“응.”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죠?”
“글쎄?”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약간 신기하기도 해서 질문에 대답해 주며 그녀를 살폈다.
타티아나는 배시시 웃었다.
“아나스타샤.”
“응?”
“제가 무슨 생각 하고 있게요.”
“글쎄.”
비슷한 물음에 비슷한 대답. 아나스타샤는 일부러 타티아나를 조금 무성의하게 대했다.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만약 정말로 지금 타티아나가 약간 취해 있는 상태라면, 그녀에게서 무슨 말들이 나올지 궁금했다.
이렇게 무관심한 것처럼 굴면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 있는 말 없는 말 다 토해 낼 것이다.
비공식적으로나마 중앙음악학교의 최고 실력자나 다름없는 에르네스트를 피아노로 꺾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우울한 얼굴로 자기만의 생각이 많은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는 이참에 그 얼굴 뒤의 생각이 알고 싶었다.
타티아나는 약간 불만스럽게 쳐다보더니 평소와 다르게 조금 경박하게 웃었다.
“흐……후후…… 아나스타샤.”
“응.”
드디어 뭔가 말이 하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콜라에 진짜 취했든, 취한 기분이 든 것뿐이든 상관없었다.
아나스타샤의 의도대로였다. 그래, 항상 의지력으로 버티고 있는 것 같지만 너도 사람이니까.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아나스타샤는 다음 이어질 말을 기대했다.
“혹시…… 정말 혹시 모르니까 하는 말인데요…….”
“응. 뭔데?”
“갑자기 제가 이상한 말 하면……. 때려도 돼요.”
“……뭐?”
예상치 못한 말에 아나스타샤는 움찔했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를 한 손으로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때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왜 저런 말을 꺼냈는지가 궁금했다.
그냥 관심을 끌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하는 투이지 않은가.
“아나스타샤는 정말 예쁘니까…….”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타티아나는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지만, 불식간에 입 사이로 새어 나오는 말은 막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두서없이 중얼거리다가 입을 틀어막는 타티아나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평소 가지고 있던 의혹의 불씨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당황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
아나스타샤는 이참에 이전부터 궁금하게 생각했던 그것을 에둘러 물어보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직접적으로 물어볼 순 없었다.
“있잖아, 타티아나.”
“네에…….”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에르네스트 말이야…….”
“……이 좋은 자리에서 왜 그…… 자식 이름이 나와요……?”
아나스타샤는 깜짝 놀랐다. 늘 경어만 사용하는 타티아나가 험한 말을 쓸 줄은 몰랐다.
“그래, 그 자식.”
“…….”
“그렇게 쪽팔리게 차 놨는데 혹시 아직도 너한테 집적거리진 않아?”
아나스타샤는 일부러 조금 비난하는 투로 말했다.
이 비난에 타티아나가 동조한다면 그걸 시작으로 남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 파고들어 볼 생각이었다.
전반적으로 어떻게 느끼는지, 연애 대상으로 보기는 하는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샐쭉하게 대꾸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응?”
“그리고 일부러 그렇게 잔인하게 찼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한 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에요.”
“무슨 말이야?”
“그게 제게 맡겨진 일이었으니까……. 그가, 이제 겨우 열넷에 불과한 에르네스트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역할일지도 모르니까…….”
아나스타샤는 의도했던 방향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타티아나는 평소에도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콜라에 취해 버린 지금은 조금 더 심각했다.
그리고 타티아나가 처음 스스로 꺼낸 속마음에, 아나스타샤는 적잖게 놀랐다.
제 잘난 맛에 폭주하던 에르네스트가 헛짓거리를 하면 제동을 걸어서 제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게 왜 타티아나 네 역할이야? 그리고 너도 열네 살이야. 왜 한참이나 더 어른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건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수동적으로 지켜보겠다는 심산이 아니라 훨씬 더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에르네스트와 함께했었던 모양이었다.
역할 운운까지 하는 걸 보면 단순히 사람이 착한 게 아니라 일종의 강박으로까지 비쳤다.
에르네스트가 무리를 하다가 넘어진들 그건 그의 인생이고 그의 실책이다. 왜 그걸 애먼 타티아나가 신경을 쓴단 말인가?
“…….”
적당히 하라고, 그게 다 쓸데없는 참견에 불과하다고 말해야 했지만, 부르기는 에르네스트를 그 자식이라고까지 부르면서도 막상 행동은 옹호하고 지키려는 걸 보니 차마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한승우의 이야기도 물었다. 타티아나는 유독 그 유학생을 챙기곤 했기 때문이다.
“네 역할 중엔 그 한국인 유학생, 승우 한. 그 애를 돕는 것도 있는 거야?”
“예…… 그것도 제 역할이죠.”
“대체 왜?”
“그건…….”
뭐라고 설명하려던 타티아나가 순간 눈빛을 달리하며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른 듯했다.
아나스타샤는 조금 더 캐물어 볼까 했으나, 타티아나는 그간 조금 들떠 있던 기분조차 단번에 날아간 듯 신경을 곤두세우고 눈에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자 뭔가 더 묻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타티아나는 아직도 숨기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아나스타샤는 그 비밀들을 들을 수 없을뿐더러, 운 좋게 타티아나의 의지력을 무너뜨릴 수 있더라도 그것을 들었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안해.”
“……?”
“그냥…… 다른 게 조금 궁금해서 물어보려던 건데 이상한 방향으로 번졌네. 더 안 물어볼게. 안 그래도 너 지금 힘들 텐데.”
“약간 어지럽긴 하지만 괜찮아요. 다른 거? 그게 뭔데요?”
“직접적으로 물어보기엔 조금 그런데.”
“괜찮아요. 제가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아까 말한 이상한 말이라는 게 뭐야?”
“윽……!”
타티아나는 이상하리만큼 쩔쩔매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과민 반응할 줄은 몰랐다.
그간 충분히 오해를 사게 행동한 부분이 많다는 자각이 전혀 없는 걸까?
물론 타티아나에겐 조금 묘한 부분이 있긴 했다.
당장 안겨 오기라도 할 것처럼 스스럼없이 다가오려다가도 갑자기 벽을 치듯 몇 걸음 물러서 버리는 듯한 느낌.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무언가 자제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막연히 느낄 뿐이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한참 당황해하던 타티아나는 빠르게 말했다.
“그, 그냥 아까 에르네스트나 한승우에 대해 말했던, 그런 것 말하는 거에요.”
“그건 확실히 이상한 말이긴 했지만. 때리라며?”
“확실히 이상하면 때리세요. 자, 어서요.”
“…….”
아나스타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타티아나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선 가볍게 이마를 톡 튕겼다. 타티아나는 화들짝 놀라더니 곧 해맑게 미소를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자기도 모르게 타티아나를 쓰다듬을 뻔했다가 간신히 참았다.
그 대신 그녀는 물었다.
“있잖아, 타티아나.”
“예.”
“나랑 친구 하고 있는 것도 네 역할 중 하나인 걸까?”
아나스타샤는 조심스레 말을 맺었다.
에르네스트가 폭주하는 것을 막아선 것도, 한승우를 도와주는 것도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타티아나라면, 아나스타샤와 친구로 지내는 것 역시 그러한 역할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건 아나스타샤의 가슴에 불안감으로 박혀 있었다.
그런데 그 질문에 타티아나는 이전처럼 당황해하거나 빈틈을 찔린 듯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단지 그녀는 의아해하다가, 살며시 눈을 흘겼다.
“무슨 이상한 말씀이세요? 이마 대세요.”
“……어?”
“어서요.”
아나스타샤는 더듬거리며 머리를 가져다 대었고 타티아나는 어설픈 동작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다른 사람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치는 행위 자체가 처음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타티아나는 스스로도 조금 어색한지 장난스레 웃더니 아나스타샤와 눈을 마주치고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말하는 것들을 이해시켜 드릴 순 없을 거에요.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제가 중앙음악학교로 편입 와서 사귄 제 첫 번째 친구에요.”
“……아하하.”
아나스타샤는 약간 창피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꿋꿋하게 말을 잇는 타티아나를 보면서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타티아나는 굉장히 사람을 잘 믿고 배려하는 편이었다. 지금 이 자리만 해도 그랬다.
카페인에 약하다면 그만두면 될 일인데 그녀는 구태여 아나스타샤와 어울리려 했다.
종종 우울해지고, 차가워지지만. 타티아나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편하게 지내 주면 참 좋을 텐데.
아나스타샤는 속으로 생각하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 알 수 없는 기준 또한 타티아나의 성격 중 하나였다. 아나스타샤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했고.
여전히 숨기는 비밀도 많고 조금 알 수 없는 면모도 많았지만, 아나스타샤는 더 이상 친구의 비밀을 캐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콜라에 취할 줄은 상상도 못 해서 충동적으로 몇 마디 묻긴 했지만,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만든 자리도 아니었다.
“맞아. 우린 친구야. 그렇지? 타티아나.”
“……? 그래요.”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듯한 말에 영문도 모르고 타티아나가 답했다.
아나스타샤는 즐거이 웃으며 타티아나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우리 그냥 놀자.”
“놀아요……? 뭘 하고요?”
“피아노과가 뭘 하고 놀겠어. 피아노 치고 놀지.”
피아노과 학생들에게 피아노란 끝없는 공부거리이기도 하고 거대한 벽이기도 했지만, 그대로 놀잇거리이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를 피아노 앞에 앉혔다. 그리고 여전히 어리둥절해 있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
타티아나는 멀거니 건반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들었다.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은 아닌지라 조금 자신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타티아나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연주자였다. 그녀는 곧 한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익숙한 멜로디라서 모를 수가 없었다.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독일 작곡가 요한 파헬벨의 바이올린 작품이었고 수백 년간 잊혔다가 20세기에 들어서야 재발굴되어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 작품이었다.
굉장히 단순하고도 아름다운 기본 멜로디를 계속 변주시켜 나가는 형태의 변주곡이라 연주자에 따라 쉽게 연주하자면 얼마든지 쉽게, 어렵게 연주하자면 또 얼마든지 어렵게 편곡할 수도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이렇게 화려한 캐논 변주곡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기본 멜로디를 꾹꾹 누르며 템포와 음향의 기준을 잡은 타티아나는 그 이후로 말 그대로 미친 듯이 건반을 휘젓고 다녔다.
쇼팽의 몇십잇단음표나 되는 화려한 꾸밈음과 리스트의 옥타브 스케일, 슈만의 개성적인 부점과 당김음, 라흐마니노프의 뭉개듯 흘려 버리는 패시지 처리.
피아니스트가 발휘할 수 있는 수많은 기교와 표현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서 하나의 작품이 되어 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장조로 평범하게 시작했던 곡은 라장조로 이조되었다가 다음은 마장조로 바뀌었다.
순식간에 잘 파악하지도 못할 정도로 옥타브를 넘나들며 이조하는 통에 아나스타샤는 곡을 읽어 내는 것을 아예 포기해 버렸다.
익숙하지 않은 카페인과 콜라에 조금 횡설수설하는 모습까지 보이던 사람이 이런 곡을 즉흥적으로 내보일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콜라에 취했던 것이 다 거짓말인 것만 같다.
마치 영원히 계속될것 같이 연주되던 곡이 끝나고 아나스타샤는 또다시, 타티아나의 곡에서 많은 것을 얻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보여 준 수많은 기법들, 센스와 노하우들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재즈나 락 같은 다른 장르가 아닌, 클래식의 낭만주의 카테고리 내에서 이루어졌다는 것 또한 중요했다.
타티아나는 이 와중에도 전통적인 화성과 선율의 구조를 완벽하게 지켰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연주를 마친 타티아나는 숨을 헥헥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재밌네요.”
그저 그녀는 재미있게 한 곡 선보였을 뿐이다.
아나스타샤는 도대체 타티아나와 자신 사이에 얼마나 거리가 벌어져 있는지 잠시 아득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웃었다.
“그럼 됐어.”
그 후로도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는 번갈아 가며 피아노를 연주했다.
무작정 서로의 연주에 박수만 치진 않았다.
대체 그게 무슨 곡이냐며 웃고 놀리기도 하고, 엉망인 연탄곡을 연주하면서 서로 자신한테 맞추라며 투닥거리기도 했다.
피아노 한 대만 있다면 다른 놀잇감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타티아나가 문득 말했다.
“아나스타샤.”
“응.”
“아나스타샤가 왜 이런 자릴 만들었는지…… 알겠어요.”
“그래?”
“오늘은…… 말고 내일 음반 사러 가요.”
“그래.”
“같이 놀러도 가고.”
“그래.”
“어쩌면…… 저는 영영…… 안 될지도 모르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지금 아나스타샤에게도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
타티아나가 또 이상한 소릴 늘어놓기 시작했다.
항상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것처럼,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의무감을 품고 사는 친구.
무슨 말인지 물어본다면 타티아나는 이번에도 고심하고 궁리해서 어렵게 대답해 주겠지만, 아나스타샤는 그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타티아나는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