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눈을 뜨니 어두컴컴했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부터 들었다. 새벽 4시 20분. 우유 배달 아르바이트라도 나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빛나는 액정을 멍하니 바라보며 어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연습실에서 파티를 했었다.
난 어제 처음 내가 카페인에 약하다는 것을 알았고, 거기에다가 탄산이 든 콜라까지 마시면 거의 취한 사람처럼 제정신을 못 차린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어쨌든, 그 후로도 파티는 계속되었다.
중간에 아나톨리라는 이름의 귀여운 후배도 한 명 추가되어 우리는 1시간도 넘게 더 수다를 떨고 놀다가 귀가했다.
기다리고 있던 빅토르가 날 보자마자 술을 마셨냐고 해서 난 고개를 저으며 커피와 콜라를 마셨을 뿐이라고 했다.
빅토르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이해해 주었다. 그는 내가 카페인에 취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카페인의 영향으로 저녁 식사도 잘 못 하고, 침대에 누워서도 잠을 제대로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12시는 다 되어서야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일어난 게 지금 이 시간이다.
“음…….”
일어나서 물부터 한 잔 마시자 잠이 달아났다. 조금 더 자도 괜찮겠지만 머리도 맑은데 잠으로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팔을 좌우로 스트레칭하고 파자마 위에 가운을 걸치고 복도로 나왔다. 쌀쌀한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새벽 4시에 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욕실로 가서 세안부터 하고 거울을 보니 오늘따라 표정이 꽤 좋아 보였다.
“……?”
커피를 마셔서 그런가? 요 반년간 내게 필요했던 것은 커피와 콜라였던 걸까?
하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커피를 마신다거나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 정도로 몸에 심각한 컨디션 난조가 올 정도로 카페인 등에 약하다면 아무것도 해선 안 된다.
나는 연주자로서 내 몸을 지켜야 할 의무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난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앉았다가 튕겨 일어섰다.
파자마를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날씨가 상당히 쌀쌀하니 잘 갖춰 입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요즘 읽고 있는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10월의 모스크바는 상당히 추웠다. 어두운 밤하늘을 보며 입김을 불어 보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영하권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매서운 바람이 짓쳐들었다.
아우터 앞섶을 여미다가 문득 벨카가 걱정되었다. 살금살금 벨카가 사는 집에 다가가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벨카는 잔뜩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그냥 자게 두어도 상관없을 테지만, 그 모습이 조금 안쓰러워 보여서 살짝 벨카를 불러 보았다.
“벨카.”
“…….”
“벨카.”
두 번 부르니 벨카가 눈을 떴다. 그리고 날 보더니 짖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저랑 같이 연습실에 가요. 오늘은 거기서 자요.”
“…….”
벨카는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하더니 터벅터벅 집 밖으로 나왔다. 마음 같아선 벨카를 안아 들고 싶었지만 내겐 그럴 힘도 없었다.
앞장서서 연습실로 향하자 벨카가 따라왔다. 눈이 반쯤 감긴 게 거의 졸고 있는 상태인 것 같았다.
별관의 연습실에 도착하자마자 라디에이터 전원을 올리고 그 앞에 벨카용 방석을 놓았다.
자리를 세팅해 주자마자 벨카가 그 위로 올라가서 다시 웅크리더니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눈을 감고 잠들어 버렸다.
난 흐뭇하게 벨카가 잠드는 것을 지켜본 뒤 스탠드를 켰다. 혼자였다면 연습실 전체를 밝혔겠지만 벨카가 있어서 그렇게 할 순 없었다.
홈시어터로 가서 헤드셋을 연결하고 음반을 골랐다.
평소 같았으면 음반을 고르는 데에만 몇 분은 걸렸을 텐데, 지금은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어서 쇼팽의 녹턴을 골랐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밤이기 때문이었다.
의자에 앉아 담요를 덮었다. 그리고 녹턴을 들으며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 시작했다.
내용이 그리 복잡하지는 않아서 읽기는 쉬웠지만 종종 모르는 단어가 나오곤 했다. 그럴 땐 스마트폰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해 나갔다.
이제 와서 러시아의 고전들을 하나씩 탐독하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어 공부를 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조금 의무적인 부분도 있었다.
러시아는 문학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높은 나라였다.
그냥 나 몰라라 할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내가 앞으로도 여기서 러시아인으로, 베르체노프가에서 살아가려면 정말 유명한 고전들은 읽어 봐야만 했다.
덕분에 한국에서도 잘 안 읽었던 책들을 하나씩 읽어 나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꽤 재미있단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
그렇게 쇼팽의 녹턴 전곡이 한 바퀴 돌았다. 책을 덮고 시계를 보니 6시였다.
아직 밖은 어둑어둑했지만 슬슬 일과를 시작하는 고용인들도 있을 시간이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나도 일과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 덮개를 열고, 손마디를 풀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바흐 말고는 아무것도 치기 싫었는데 오늘은 조금 의욕이 있었다.
흘깃 옆쪽을 보니 벨카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난 항상 하농과 평균율로 하루를 시작했지만 오늘만큼은 과격하게 벨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쇼팽의 녹턴으로 시작했다.
밤새 들었던,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연주한 쇼팽의 녹턴을 떠올리며 천천히, 들릴 듯 말 듯 아침 연습을 시작했다.
다행히 벨카는 이번엔 내 피아노 소리가 듣기 괜찮았는지, 일어나지 않고 그렇게 한참을 더 고로롱거리며 잤다.
* * *
학교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렸다. 소로킨들의 배웅을 받으며 교내로 들어섰다.
아직 기숙 생활을 하는 학생들은 등교하지 않을 시간이라 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몇 미터 앞에 어딘가 낯익은 남학생이 보였다. 얼핏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작은 학생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한참 고민하다가 그 손에 들린 바이올린을 보자 순간적으로 기억이 우수수 떠올랐다.
“아나톨리?”
“……?”
남학생이 내 쪽을 돌아보더니 알은체를 했다.
“누나.”
어제 나와 아나스타샤가 파티를 벌인 연습실에 어쩌다 운 좋게 찾아와서 얻어먹고 간, 동갑내기 여자 친구까지 있는 아주 괘씸한……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어쨌든 난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나톨리. 일찍 등교하시네요.”
“아, 안녕하세요.”
아나톨리는 어제 많이 친해진 후배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나를 조금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난 이 귀여운 후배와 앞으로도 친해지고 싶어서 함께 들어가자고 청했다. 아나톨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린에도 관심이 많은 나는 그와 같이 복도를 걸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나톨리는 지금 가지고 있는 바이올린이 작은 것 같다며 투덜거렸고, 난 조금만 더 있으면 큰 것을 쓸 수 있을 것이라며 달래 주었다.
이런 대화는 아나톨리가 자기 교실로 들어갈 때까지 이어졌다.
난 2학년 바이올린반으로 들어가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계단을 올라갔다.
반에 들어가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아나스타샤가 시크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해 왔다.
“어제 괜찮았어?”
“예, 그럼요.”
“잠은 잘 잤고?”
“조금 뒤척이긴 했지만요.”
“다행이네.”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이런 말을 했다.
“그래서, 어제 했던 약속은 지킬 수 있겠지?”
“……예?”
약속? 무슨 약속?
파티에서 나누었던 대화나, 모든 기억들은 새록새록 떠오르지만 무슨 약속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나스타샤가 내 얼굴을 보더니 픽 웃었다.
“음반 사러 가겠다고 그랬잖아.”
“아.”
그 말이었나…….
아나스타샤는 이번에야말로 어떻냐는 듯, 다시 물었다.
“오늘 학교 끝나고 같이 갈래?”
이걸로 세 번째다. 본래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한 번 거절한 사람에게 세 번이나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그렇게 했다. 이걸 거부할 순 없었다.
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같이 가요.”
“그래, 그래.”
아나스타샤는 편안하게 웃었다.
* * *
나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발렌티나까지 세 사람은 모스크바 시내에 있는 한 매장으로 향했다. 음반과 서적, 잡다한 팬시용품들까지 다루는 종합 매장이었다.
“더 멀리 가긴 귀찮으니까 여기서 사자.”
우리는 다른 곳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약속이라도 한 듯 곧바로 음반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가지 못한다고, 도중에 발렌티나가 한눈을 팔았다.
“아, 나 젤네일도 살 거야.”
“발렌티나, 넌 대체 그걸 왜 하는 거야? 피아노 치는 애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발렌티나와 아나스타샤가 투닥거렸다. 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건반을 치기 위해 짧게 다듬은 손톱이 보였다.
피아노를 다루는 연주자라면 평생 손톱을 길게 기를 일은 아예 없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발렌티나는 빽 소리를 쳤다.
“아, 몰라! 난 무조건 해야 하니까.”
“너 저번에 선생님한테도 한 소리 듣지 않았어?”
“와, 세상에, 세상에. 아나스타샤 네가 말하니까 진짜 설득력 완전 없어.”
“……그것도 그렇다.”
아나스타샤는 순순히 인정했다. 바로 어제만 해도 나랑 연습실에서 파티를 한 그녀가 이제 와서 교칙이 어쩌고 하는 것만큼 웃기는 일도 없을 것이다.
물론 발렌티나는 모르고 있겠지만, 난 실실 웃으며 둘을 따라갔다.
그렇게 음반 매장에 다다른 우리는 각자 매의 눈으로 음반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아나스타샤가 사고 싶어 했던 안드레이 블라디미로비치 가브릴로프의 신보부터 시작해서, 여학생이기 이전에 뼛속부터 음악가인 우리들은 사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발렌티나가 음반 하나를 마치 보물이라도 찾아냈다는 듯 치켜들었다.
“아나스타샤. 이것 좀 봐 봐. 봐 봐.”
“뭔데?”
“예브게니 이고레비치 키신의 슈만 앨범이야. 그렇게 찾아도 없었는데, 여기에 숨어 있었네.”
“……? 예브게니 이고레비치? 너 그런 거 듣니?”
“……뭐?”
“뭐.”
시큰둥한 아나스타샤의 발언에 발렌티나가 쌍심지를 켰다.
“아나스타샤 너 방금 우리 예브게니 이고레비치를 무시한 거야?”
“무시가 아니라, 현실이 그렇잖아. 비르투오조면 다야? 음색이 너무 가벼우니까 깊이가 없잖아.”
“깊이가 없긴 왜 없어? 쇼팽 들어 봤어?”
“응. 별로던데.”
“그럼 네 듣는 귀가 얕은 거겠지.”
“뭐?”
이번엔 아나스타샤가 으르렁거렸다.
“예브게니 이고레비치도 그렇고…… 저번에 이보 포고렐리치라면 결혼해도 좋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는데, 발렌티나 너 취향 조금 이상한 거 알아?”
“뭐 어때서? 마르타 아르헤리치도 인정했는데 난 그러면 안 돼?”
“아니, 뭐 상관은 없는데…… 취향이 이상하다고.”
“웃겨 정말. 아나스타샤, 너야말로 취향 이상해. 너 집에 라두 루프 전집 있다며? 안 어울리게.”
“나한테 안 어울린다는 게 무슨 말인데?”
“저어기 랑랑 앨범이나 사라고.”
“발렌티나, 너 말 다 했어?”
“다 했다. 어쩔래?”
솔직히 난 얘네 둘이 왜 붙어 다니는지 잘 모르겠어.
물론 둘은 소꿉친구고 피아노도 굉장히 잘 치는 데다가 예쁘기까지 했다.
겉으로 보면 둘이 친구라는 게 전혀 이상할 게 없었지만 자세히 보면 정말 싸우기도 잘 싸웠다.
게다가 그 주제가 전공인 음악이기라도 하면…… 둘은 정말 극과 극으로 갈려 싸우기 일쑤였다.
문득 언젠가 봤던 뉴스기사가 떠올랐다.
슈퍼마켓에서 남자 둘이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이라는 철학책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다가 총질을 한 사건에 대한 뉴스였다.
순수 이성을 비판하다가 이성을 잃는, 심각하고도 웃기는 사건이었지만 지금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음악가들을 놓고 지지고 볶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정말 이게 심각해지면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이젠 러시아라고 하면 몇 가지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문학과 철학, 그리고 음악. 그것들에 대체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는 걸까? 난 잘 모르겠다.
러시아에서 러시아인으로 산 지 반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난 모르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나 역시 음악가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저도 예브게니 이고레비치 키신을 좋아해요.”
“그렇지! 응?”
“타티아나 너마저…….”
순식간에 희비가 교차했다. 하지만 난 할 말이 더 있었다.
“그 보글보글한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뭐? 야, 타티아나! 연주는? 응? 연주는?”
“아하하하, 맞아. 그 헤어스타일 하나는 귀엽지.”
아나스타샤는 깔깔거리며 동조했고 발렌티나는 삐졌다는 듯 볼을 부풀리고는 휙 돌아서 버렸다.
그제야 나와 아나스타샤는 같이 발렌티나의 양팔에 달라붙어서 그녀를 달래 주었다.